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281)
제281화 진퇴양난
쏴아아아-
그 날은 비가 내렸다.
비에 젖어 질척거리는 땅을 밟으며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초류향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냉하영을 찾아왔다.
“……아빠?”냉하영은 그 사람을 보자마자 빠르게 뛰어갔다.
그녀의 아버지 냉파천.
그는 등에 메고 온 묵직한 관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쿵-!
냉하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냉파천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알았다.
그녀를 비롯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냥 알았던 것이다.
드륵-
냉하영은 관을 열어 안을 확인한 후 조용히 다시 덮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입을 열었다.
“백무량은 어떻게 되었어요?”“……팔 하나가 잘리고 내상을 입었다.”냉파천의 말에 냉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비구름이 가득해서 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웠다.
빗물이 흘러서 얼굴 전체가 물기로 가득해졌다.
“……내 탓이다.”냉파천이 전신을 덜덜 떨며 자괴감 가득한 음성으로 말하자 냉하영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맞아요, 아빠. 아빠 때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냉파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딸의 음성이 잔인하게 그의 폐부를 후벼 팠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지금 냉파천의 심정은 고작 이런 비난으로 무마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으니까.
냉하영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조금 떨어져 있던 초류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놈을 죽여 줘. 너는 이제 반드시 그래야만 해.”냉하영은 한 음절씩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그 냉철한 시선에는 깊게 정제된, 농도 짙은 분노가 깔려 있었다.
초류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의 손으로 모든 일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저 거기에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백무량…….’초류향은 그가 야황을 이겼다는 사실 자체가 잘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찌 되었든 실제로 결과가 그리 나왔으니까.
초류향은 잠시 고민하다가 냉하영의 옆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해도 될까?”냉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향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드륵-
관 뚜껑을 밀어서 열고 초류향은 냉무기의 마지막 모습을 살펴보았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자는 듯이 누워 있는 야황.
그를 바라보는 초류향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심맥이 조각조각 끊어져 있다.’이상한 일이다.
단전이 이렇게 깔끔하게 파괴되면 몸 안의 모든 내력은 그 자리에서 단번에 활동이 멈춘다.
심맥이 이렇게 끊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데 이것은 마치 강력한 공력에 의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싸운 것 같은 상태가 아닌가?
‘장풍에 당한 건가?’백무량이 암습을 가했던 건가?
여러 가지 정리되지 않은 상황들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그려졌다.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봤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딱 꼬집어서 무어라 말할 순 없지만 분명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초류향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할 때.
그의 뒤에 서 있던 시엽이 몸을 휘청거렸다.
“스승님…….”시엽의 얼굴에 괴로움이 떠올랐다.
냉하영이 그런 시엽의 손을 잡아 갈 때.
냉파천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날 보호하다가 돌아가셨다.”보호하다가 돌아가셨다?
냉파천의 말을 듣는 순간 초류향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정도맹이 인질로 잡고 어르신을 협박한 겁니까?”초류향의 질문에 냉파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낮게 이를 갈며 말했다.
“나를 미끼로 폭약을 터트렸지. 아버지는 나를 보호하다가 내상을 입으셨다.”“아……!”초류향은 그제야 모든 의문이 한 번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야황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랬군.’냉무기는 처음부터 엄청난 내상을 입고 백무량과 싸운 것이다.
막강한 무공으로 내상을 억누르고 분산시켰지만, 결국 그것에 발목이 잡혀서 승패가 갈린 것일 터.
‘어르신은 자존심 때문에 돌아가신 겁니다.’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초강자와 붙는다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선택이다.
초류향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당신이 대단한 것이겠지만…….’스스로의 불리함을 알고서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여 주는 바도 있었다.
“백무량은 틀림없이 모르고 있었을 거다.”“무엇을?”“어르신의 몸 상태가 이렇게까지 엉망이었음을, 그는 분명 몰랐을 거다.”검황은 지금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력으로 야황을 죽였다고.
그러니 알게 해 줄 필요가 있다.
본인이 실력으로 냉무기를 꺾은 것이 아님을.
이제부터 초류향이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정도맹의 움직임은 어떻지?”“최대한 병력을 뒤로 물리고 있어. 그렇지만 잡아채야 해.”놈들이 정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 바로 놈들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니까.
초류향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올 생각이 없다면 우리 쪽에서 가면 되겠지.”백무량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오늘 최대한 놈들과의 거리를 좁혀 부숴 줄 생각이었다.
“오늘 밤에 놈들을 친다.”초류향은 오늘 밤.
정도맹의 무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 * *
냉하영은 밤이 될 때까지 긴 시간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
냉무기의 삶을 하나둘 떠올려 보며 냉하영은 중얼거렸다.
“이렇게 조급하게 떠나실 필요는 없으셨어요, 할아버지…….”그녀의 할아버지 야황 냉무기.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무림인이자, 사파 무림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었다.
그가 이룬 업적들은 너무도 엄청난 것들뿐이라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는 혈육에게는 너무도 무정한 사람이었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냉하영은 처음에 할아버지를 그렇게 이해했다.
바깥일에만 관심이 많고 가족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 냉정한 사람.
한데 최근에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지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야, 할아버지는…….’조금씩조금씩 할아버지에 대해 알아 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의 서투른 표현 방법을 이해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부분들도 있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너무 아쉬웠다.
이제야 할아버지의 감정을 읽고, 이해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때가 아니라 분노해야 할 때였으니까.
냉무기의 관을 옆에 두고 냉하영은 창밖을 보았다.
쏴아아아-!
아직도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빗소리에 섞여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예요.”지금 밖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소리는 세상이 바뀌어 가는 소리였다.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려면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만 하니까.
천마신교와 흑월회는 철저하게 준비해서 완벽하게 정도맹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고 완전하게 융합되어 있는 하나의 세상을 만들 거야.’이제 백무량은 정도맹의 전력이 아니라고 봐도 좋았다.
야황과의 승부에서 치명상을 입었고, 적어도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승부는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하지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행히 냉하영과 초류향은 대단히 젊었고,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 힘이 있었다.
“그곳에서 지켜보고 계세요, 할아버지. 제가 바꿔 가는 세상을…….”초류향은 분명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를 선택한 그녀의 판단은 정말로 훌륭했다.
초류향은 냉하영이 여자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았고, 다른 문파 소속이라는 이유로 쓸데없이 경계하지도 않았다.
항상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옳다고 여겨지면 그것을 망설임 없이 밀어붙였다.
‘비합리적인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눈과 머리가 초류향에게는 있어.’초류향은 지도자로서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다음 세대를 이끌고 나갈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그런 초류향 본인도 물론 대단하지만 그동안 곁에서 그를 지켜본 냉하영은 다른 의미로 그가 부러웠다.
‘가만히 초류향의 주변을 지켜보니 부러울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많았어.’냉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흑월회는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일을 맡을 만한 인재가 없었다.
할아버지였던 야황이 죽은 지금.
냉하영은 씁쓸하지만 흑월회가 그다지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임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녀는 생각을 계속 이어 나갔다.
‘초류향보다 더 대단한 것은 역시 공손천기야. 초류향의 성공은 공손천기라는 거목이 이뤄 놓은 토대가 훌륭했기 때문이니까.’전대 교주였던 절세신마 공손천기.
사실 초류향이 천하 제패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절세신마 공손천기가 천마신교를 워낙 굳건하게 다져 놓은 덕분이 컸다.
그동안 초류향이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여러 흔들림과 실패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설 수 있게 해 준 것은 분명 뿌리 깊게 내실을 다진 공손천기의 보이지 않는 단단함이었다.
‘아무튼 이제 중원은 바뀔 거야.’야황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물러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
그 사실을 알리는 날이 바로 오늘 밤이었다.
“다녀올게요, 할아버지.”냉하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를 시엽이 묵묵하게 뒤따랐다.
그 역시 지금 누구보다도 마음이 복잡했지만 스스로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지킨다.’냉무기는 바로 이것을 원했을 것이다.
냉하영의 뒤를 따라가며 시엽은 힐긋 고개를 돌려 야황의 관을 바라보았다.
‘편히 쉬시기를…….’냉하영과 초류향이 약속했던 시간이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다.
문밖을 나서는 냉하영의 눈은.
조금 전까지 보였던 감성적인 눈빛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냉철하고 이성적인 시선으로 변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은월호리’ 냉하영의 무서움인 것이다.
‘누구보다도 냉철하게…….’냉하영은 할아버지의 죽음에 약해지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그렇게 바깥으로 향했다.
* * *
정도맹 측의 비밀회의 장소는 지금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무량이 중상을 입었고, 천마신교는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그 와중에 유일한 수확이라면 가장 막강하고 두려운 적.
야황이 없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이까? 이제 이렇게 마냥 회의만 할 수도 없는 시점이 아니오?”신승 공야 대사.
현재 정도맹의 수장이자 소림사의 방장인 그가 안타깝게 입을 열자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과거에는 백무량이라는 초고수가 있었기에 희망을 걸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누가 그 대악마 초류향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무당파의 무당칠성이 교주의 손에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 막강했던 무당파도 사실상 반쯤 무너졌다고 봐야 합니다.”교주 초류향.
그 혼자서 무당파의 고수들을 몰살시켰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상관중달은 보고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막막하군.’계획이라는 것을 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백무량이 없으니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검황이 쉽게 이기도록 폭약까지 사용했는데…….’한데 야황 냉무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예상보다 너무 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백무량보다 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엄청난 폭약에 당하고도 백무량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니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백무량이 부상에서 회복되기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천마신교의 정예들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었고, 또 도망치게 되면 자존심이 상한 고수들이 내부에서 반발해 자멸할 가능성도 있었다.
정도맹의 두뇌인 상관중달.
그가 우울한 얼굴을 해 보일 때.
신승 공야 대사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때인 것 같소만…….”우선순위?
상관중달이 눈을 깜빡이며 공야 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런 상관중달을 바라보며 신승 공야 대사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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