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289)
제289화 각자의 사랑 방법
팽가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백무량이 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나를 방패막이로 쓰겠다고?’기가 막힌 일이었다.
천하의 검황이 자신이 부상에서 완벽히 나을 때까지 방패막이가 되어 달라고 한 것이다.
‘빌어먹을…….’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현재 팽가호에게는 외부에 드러나면 곤란한 치명적인 비밀이 있었으니까.
‘초류향과 친구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거야?’이것은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분명 가문의 존폐가 관계될 만큼 중요한 비밀이었다.
‘대신 그에 따른 보상은 해 준다고?’팽가호는 자신의 방에 들어와 벌렁 드러누우며 코끝을 찡그렸다.
검황 백무량은 시종일관 불만 가득한 얼굴인 팽가호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던 것이다.
‘검황의 무공.’팽가호는 손바닥을 펴서 들여다보며 검황이 제의한 조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했다.
하나 피식 웃었다.
‘필요 없어, 그딴 거.’어떤 보상을 해 준다고 하더라도 초류향을 배신할 생각이 전혀 없는 팽가호다.
다만 지금 팽가호가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은 백무량의 제안이 아니라 ‘협박’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가문에 피해가 가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팽가호의 약점을 백무량은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영감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백무량은 현재 최후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상의 몸 상태로 초류향과 만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팽가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덩치 큰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져 나가게 생겼다.
‘초류향 이놈아……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대체.’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도리가 없는 것이다.
우정도 중요하지만 역시 그것보다는 가문이 우선이다.
팽가호는 괴로운 얼굴로 침상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가 결국 벌떡 일어섰다.
백무량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 * *
초류향은 잠깐 짬을 내어 공손아리를 찾아갔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다 정말 의도치 않게 선우초린과 공손아리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침착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럴 수도 있다.’공손아리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이니 같은 여자도 반할 만할 것이다.
그렇게 초류향이 애써 선우초린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방 안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강렬한 기의 폭풍이 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이건…….’이렇게 불안정한 기의 파동이 느껴지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초류향은 망설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역시 각성의 순간이다.’방 안에 있던 공손아리 역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너무도 갑작스럽게 변화가 시작되려 했으니까.
초류향은 일단 굳어 있는 공손아리 곁에 다가가 그녀 앞을 막아선 후 전음으로 말했다.
[놀라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이화궁주는 화경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있는 중이니까요.]당황하고 있던 공손아리의 얼굴이 차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해 갈 때.초류향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운휘를 보며 전음으로 말했다.
[밖으로 나가서 이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해 주시겠습니까, 운휘 님?][알겠습니다, 주군.]운휘가 사라지고 나서 초류향은 일단 뒤에 있던 공손아리를 가볍게 안아 들고 의자에 조용히 앉혔다.공손아리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자 초류향이 전음으로 입을 열었다.
[환골탈태는 단시간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루나 이틀, 길게는 사나흘도 걸릴 수 있는 일이니 처음부터 힘을 빼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초류향의 자세한 설명에 공손아리는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초류향의 손을 잡으며 한결 안심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든든해.’이 시점에 초류향이 왜 갑자기 불쑥 등장했는지 공손아리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곤란하고 난처할 때 나타나 주어서 고마울 뿐이었다.
반면에 초류향은 선우초린을 보며 살짝 긴장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언제 위기가 올지 모른다.’화경이 되는 변화의 순간은 매우 길다.
그랬기에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만약 기의 운행이 잘못된다면 주화입마에 빠져서 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우초린이 이미 오래전부터 위 단계로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굉장히 안정적인 상태에서 각성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켜봐 줘야 한다.’만약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그것을 외부에서 바로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초류향 역시 공손아리의 옆에 앉아서 고요한 얼굴로 선우초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초류향으로서도 처음이었다.
타인이 화경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돌릴 수가 없군.’언제, 어떤 미묘한 변화가 문제로 진행될지 알 수가 없었다.
날카롭게 감각을 세운 채로 계속 살펴봐야만 했다.
‘스승님도 이러셨을까?’문득 떠오르는 기억.
초류향.
그가 깨달음을 얻어서 성장하려 할 때.
그때는 공손천기가 곁에서 지켜봐 주었다.
그가 세심하게 보살폈기에 이렇게 안정적으로 초류향이 고수가 될 수 있었던 거였다.
이런 의외의 상황에서 갑자기 떠오른 공손천기에 대한 기억에 초류향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는 내 차례인가.’선우초린의 아름다운 용모도, 그녀의 독특한 이성 취향도 지금 초류향의 머릿속에는 남지 않았다.
그저 지금 초류향은 선우초린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었다.
공손아리는 옆에 있는 침상에 살짝 누워 있었고, 초류향은 눈을 감은 채 선우초린의 전신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음?’초류향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가만히 선우초린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뚜벅- 뚜벅-
지척까지 접근했을 무렵.
감겨 있던 선우초린의 눈이 열렸다.
밝은 광채와 함께 그녀의 눈에서 현묘함이 떠올랐다가 깊게 가라앉았다.
초류향은 그런 선우초린을 보며 미소 지었다.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이화궁주.”선우초린은 눈앞에 나타난 초류향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교주님?”어째서 초류향이 여기 있는 걸까?
선우초린이 혼란한 얼굴을 해 보일 때.
초류향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공손천기가 과거 초류향에게 제일 먼저 건넸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습니까, 이화궁주?”선우초린은 멍청한 얼굴로 있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허기졌다.
그것도 아주 맹렬하게.
꼬르륵-
초류향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는 선우초린 앞에 육포를 내놓았다.
“일단 이걸 드시지요. 밖에 연락해서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 조만간 음식을 가져올 겁니다.”선우초린은 평소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육포를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갔다.
상당량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느낌에 선우초린이 당황할 때.
문이 열리고 이화궁의 사람들이 음식이 가득 차려진 큰 상을 들고 왔다.
“드시지요.”초류향이 권하자 선우초린은 망설이지도 않고 음식을 입 안에 구겨 넣기 시작했다.
한참 허겁지겁 먹고 있을 때 공손아리가 일어나 선우초린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몸은 좀 어때, 링링?”선우초린은 음식을 입 안에 넣다가 말고 공손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녀를 향한 마음이 정리가 좀 되었을까?
‘아니야.’아직도 예전처럼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면서도 미묘하게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선우초린은 손을 뻗어 공손아리의 머릿결을 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소군주님이야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피곤해 보이시는데.”“나는 괜찮아. 교주님이 고생했는걸.”한숨도 자지 않고 선우초린의 상태를 지켜보았던 초류향이었다.
선우초린 역시 그제야 자신의 곁에서 호법을 서준 것이 초류향임을 알아챘기에 밥을 먹다 말고 읍을 해 보이며 말했다.
“이화궁주가 교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사실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식사 마저 하세요, 이화궁주.”선우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음식에 집중했다.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먹은 다음에야 선우초린은 초류향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화경의 경지는 어떻습니까?”선우초린은 초류향의 질문에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요. 저는 뭔가 더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지금 그녀가 하는 말도 화경의 경지에 도달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선우초린은 어깨를 가볍게 움직여 보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것인지 불쑥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교주님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부탁?
초류향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해 보세요, 이화궁주.”“노진녕. 그놈과 한판 붙게 해 주세요.”“…….”초류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진지하게 선우초린을 바라본 것이다.
한데 선우초린 역시 몹시 진지했고, 그녀의 눈은 강렬한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큰일이군.’선우초린은 진심으로 노진녕을 두들겨 줄 마음인 모양이다.
그동안 쭈욱 지켜본바 선우초린은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었다.
노진녕이 엄청나게 지분거렸으니까.
‘하지만…….’이걸 쉽게 허락해 주기는 아무래도 곤란했다.
선우초린이야 노진녕을 진심으로 두들겨 팰 작정이겠지만 반대로 노진녕은 그럴 수 없었다.
노진녕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게 생긴 것이다.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부리나케 뛰어오고 있었다.
초류향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양반은 못 되는군.’쾅-
선우초린은 거칠게 열린 문가를 힐끔 바라보고 다시 초류향을 응시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초류향은 헉헉거리며 들어온 노진녕을 보고 쓰게 웃어 버렸다.
‘왜 하필 지금…….’다른 변명거리로 시간이라도 벌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럴 여유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초류향의 고민도 모른 채 노진녕은 격정에 가득 찬 얼굴로 선우초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디어 해냈군요, 내 사랑!”노진녕의 함박웃음과 그가 내뱉는 단어에 선우초린은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초류향을 재촉했다.
“교주님?”말 속에서 강한 의지가 전해져 오자 결국 초류향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합니다.”선우초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노진녕을 바라보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쫘악-
채찍을 꺼내 양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선우초린이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네놈의 징글징글한 면상을 밟아 버리고 싶었는데…… 참으로 오랫동안 참았다. 내 인내심에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야.”느릿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뱉듯이 말하는 선우초린의 전신에서 보랏빛 광기가 이글거리며 피어올랐다.
노진녕이 그런 선우초린의 태도를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벙한 얼굴을 해 보일 때.
선우초린이 나직하게 말했다.
“뒈지기 싫으면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응? 왜 그래, 갑자기? 우리 사이에…….”“……우리 사이?”
촤아아악-!
갑자기 노진녕의 발끝 바로 앞에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기다란 선이 생겨났다.
“일단 맞으면서 네 지나간 잘못을 반성해 봐라, 못난이.”초류향은 차마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못 보겠다는 듯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공손아리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노진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선우초린이 화경의 고수가 된 그 날.
노진녕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천마신교 가득히 울려 퍼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