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30)
제30화 초류향의 도전(2013.04.25.)
중국 설화나 민담에 대한 자료들이 자세히 정리되어 기술돼 있다는 산해경. 그곳을 살펴보면 여러 종류의 용과 이무기에 관한 자료가 나온다.
하지만 거기 어디에서도 붉은 뿔이 돋아 있고 검은 비늘이 돋아난 거대한 이무기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산해경과 쌍벽을 이룬다는 광아(廣雅)라는 책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뿔이 돋아난 검은 비늘의 이무기. 그것은 아직까지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괴이한 존재였다.
* * *
‘있을 수 없는 일이다.’초류향은 산 위에 있는 진법을 향해 걸어가면서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보았다.
애당초 진법은 인간이 자연의 힘을 인위적으로 비틀어 만든 공간이었다. 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그 어떤 생물체도 살아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스승님은 분명 살아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이 용이든 이무기든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발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산을 올라가자, 과연 이야기 들었던 대로 괴이한 돌비석들이 사방에 세워져 있는 묘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초류향은 한달음에 가까이 다가가 그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젠장. 젠장!’주상산.
천마신교의 팔대 호법 중 한 명이자 구주십오객의 일원으로 강호에서는 혈음마군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 두더쥐처럼 땅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민 채, 흙투성이가 된 상태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초류향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이건 교주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교주님께서는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초류향 공자님의 삼백 장(900미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던 것이다.
거기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삼류무사 따위나 쓰는 토둔술을 사용하라니…….’토둔술(土遁術:땅속을 빠르게 이동하는 수법).
주상산은 여기서 좌절했다. 토둔술을 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바닥을 기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굴욕적인 자세 때문에 주상산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누구의 명령인가? 자존심을 돌보기 이전에 그에게 있어 교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의 미래라는 소공자를 보살피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어떤 짓이든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교를 위해서라면…….’주상산은 그렇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얼굴에 흐르는 땟국물을 대충 손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초류향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았다.
* * *
‘이건…….’돌비석에 새겨져 있는 문양들은 낯이 익었다. 아주 오래되어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산법의 수식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이 묘하게도 뒤섞여 아름다운 문양처럼 비석에 박혀 있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초류향은 침착하게 그것을 해석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식들과 문양들이 현재에는 잘 쓰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으면, 해석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차분하게 해석해가던 초류향은 눈을 반짝였다.
‘이것은 문자다.’누군가가, 고대의 누군가가 여기에 산법 수식으로 문자를 써놓았던 것이다. 그와 조기천 스승님이 산법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것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이미 한 번 비슷한 것을 해보았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깨달음이 찾아오자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돌비석에 새겨져 있는 수식들이 순식간에 해석되었던 것이다.
‘이무기라…….’비석에는 유독 이무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용이 되지 못하여 승천하지 못한 뱀. 그것이 이무기다. 대개의 경우 진법에서 나오는 이 표현은 대단히 은유적인 것인데 이번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한 문장들을 다 읽고 제일 마지막. 거기에 적혀 있는 하나의 문장이 초류향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여의주를 가진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다고?’초류향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갈량. 그가 웃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초류향이 묻자 제갈량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시큰둥하고 다소 퉁명스러웠던 그답지 않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애송이, 네가 산법에 재능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산법에 재능이 있는 이유? 그게 무슨 말일까? 초류향이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자 제갈량이 말했다. [답 없는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다 보니 정답이 있는 산법이 네 녀석에게 쉽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애송이, 너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그런 점이겠지.]제갈량은 거기까지 말을 한 후 비석을 애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 일이라는 것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재미가 있다.]이건 또 뜬금없이 무슨 말일까? 초류향이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제갈량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다만 그는 비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특유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오래된 것이 가끔은 새것을 이길 때가 있지. 그리고 나는 그러한 것이 좋다.]이것 역시 영문을 모를 소리였다. 초류향이 혼란스러워할 때 제갈량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르신께서는 이곳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제갈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섭선을 만지며 흐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초류향은 그의 태도에서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을 받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안에 들어가 봐야 했다.’제갈량.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맞았다. 진법에 대해 고민하든 말든 이것은 지금 상황에서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결론은 저 안에 들어가 봐야 확실하게 답이 나오는 것이다.
‘상궁지조였던가.’상궁지조(傷弓之鳥:활에 놀란 새).
한번 무언가에 놀라면 비슷한 조그마한 일에도 놀란다는 것을 뜻한다.
이곳에 오기 전에 진법 안에서 호되게 당했더니 저 안에 들어가는 것에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졌던 모양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저 안에 무엇이 있든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초류향에게는 산법이라는 절대적인 무기가 있지 않은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초류향은 성큼성큼 진법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왔는가?”“예. 사형.”“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사형이 부르는데 소제가 오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허헛, 말에 가시가 있구먼.”“그렇다면 아주 제대로 들으셨습니다.”태극검황 백무량. 그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어린 사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말년에 스승님께서 왜 사제를 거두었나 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구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성장했어. 부러우이.”대략 서른 살쯤 되었을까? 백색 무복을 차려입고 새하얀 영웅건을 이마에 두른 뺀질뺀질해 보이는 사내가 시건방진 얼굴로 말했다.
“제가 본래 여러 사람이 탐내는 뛰어난 인재입니다. 저 앞에 줄 서 있는 거 보이시죠? 제가 탐나시겠지만 차분히 저 뒤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세요. 사형.”당금의 무당파를 이루는 두 개의 별.
하나는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태극검황 백무량. 다른 하나는 무당산 깊은 곳에서 서서히 그 빛을 갈무리하고 있는 잠룡(潛龍). 구주십오객의 한 명이자 강호에서는 사자검군(獅子劍君)이라 불리는 이 사내. 사내의 이름은 유설빈(柳雪玭)이었다.
악을 미워하고 협의심이 넘치는 사내. 무당파 속가제자로 백무량과는 다르게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네 명이나 있었다. 그의 외양은 이제 막 서른 살 초반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쉰 살이 넘은 화경의 고수였다.
“한데 무슨 일로 사형께서 소제까지 이 험한 산골에 불러들인 겁니까?”사자검군은 바깥일에 잘 나서지 않았다. 적어도 ‘공식적인’ 일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당파의 숨겨진 검. 백무량 이후 무당파를 이끌어 나갈 다음 세대의 거목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에는 유흥가가 적군. 사제에게 공기 같은 여자들이 없는 동네라니, 내가 큰 실수를 했어. 미안하이.”유설빈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딜 가나 여자 없는 동네는 없지요. 사형은 여자에 대해 너무 모르십니다. 여자가 있는 곳이 유흥가뿐이라고 생각하시다니…… 쯧,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하셔야겠습니다.”“허헛, 사제에 비하면 그쪽 분야에서는 한낱 애송이 수준에 불과해 항상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이 어리석은 사형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시겠는가?”“오늘 밤에 어떻습니까? 제가 큰 깨달음을 내려드리지요.”백무량을 향해 유설빈이 ‘그래, 내가 크게 한번 자비를 베풀어준다.’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 진심이 담긴 표정을 본 백무량은 결국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곤란하겠군.”“약속이 있으신 모양입니다?”“아니, 사제가 해줘야 될 일이 있네. 오늘 밤부터 말이지.”여태까지 장난스러웠던 유설빈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가 가끔. 아주 가끔 무당파 외부로 ‘비공식적인’ 일 때문에 나가는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 일 때문에 이곳에 왔다.
그런데 이번은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항상 사전에 무슨 일인지 알고 준비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끝까지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던 것이다.
“아마 마교 놈들과 관련된 일이겠죠?”“제대로 맞혔네.”“대체 소제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백무량은 슬며시 웃었다.
그의 비장의 무기가 이제 준비되었으니 그걸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무당파에 막대한 이득이 생길 수도, 아니면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틀 뒤에 저쪽 반야평(般若平)에서 정마대전이 있을 걸세.”유설빈의 눈가에서 빛이 번뜩였다.
“정말 붙는 겁니까? 그놈들과?”“장난하려고 모인 인원치고는 지나치게 많지 않던가?”“사형이라면 얼마든지 지금 상황에서도 다 엎어놓고 농담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내가 사제에게 그렇게 신용 없는 사람이었던가? 그건 좀 서운하군그래.”백무량의 말에 유설빈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본파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형은.”“그렇다면 그건 욕이 아니었군.”맞았다. 무당파의 이득, 무당파의 밝은 미래에 관한 일이라면 그게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백무량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본파에 막대한 이득이 생길 수 있는 일이네. 그러니 사제가 꼭 성공해주어야 해. 이곳에는 사제 말고 내가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없구먼.”“저 유설빈입니다.”자신의 이름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유설빈이었다. 스스로의 이름이 곧 그의 신용을 대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백무량이었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사제인 걸 내가 왜 모르겠나? 하지만 이번 일은 특별히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걸세. 왜냐하면 이번의 정마대전은 모두 이것 하나 때문에 판을 벌인 거라고 봐도 좋으니까.”“호오?”유설빈은 의욕이 생긴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정마대전이라는 큰 판에 끼지 못하는 게 내심 아쉬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다. 과연 그게 무엇일까?
“그럼 소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백무량은 곧장 말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것은 중요한, 그것도 아주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그가 자주 하는 버릇이었다.
“정마대전이 벌어지게 되면 마교는 어쩔 수 없이 전 인원을 반야평에 동원하게 될 거야. 그동안 사제는 본파의 인원들을 데리고 은밀하게 월인도법을 회수해오게. 그게 이번에 사제가 해야 될 일이야.”월인도법의 ‘은밀한’ 회수. 그것이 바로 이번에 유설빈에게 내려진 특수임무였다.
“제 명예를 걸고 반드시 회수해오겠습니다. 사형.”“믿겠네. 사제.”정마대전의 뒤에는 이렇게 커다란 음모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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