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301)
301화 은혜 북해빙궁의 후계자 적혈명. 그는 괴로웠다. 천마신교가 보란 듯이 천하통일을 이루었는데 그것을 저지할 수 없다는 현실이 그를 무척 힘들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사매들과 술을 한잔했다. 보통 술을 마실 때는 내력을 사용해서 술기운을 몰아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여긴 어디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적혈명은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왔다. 어제 마음이 싱숭생숭한 탓에 너무 과음을 한 모양이었다. 적혈명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손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만져졌다. 물컹-
‘응?’
적혈명은 찡그린 얼굴로 옆을 보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턱이 빠져라 입을 크게 벌렸다. 주다혜가 어깨를 훤히 드러내 놓은 채 그의 옆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대체?’
적혈명은 어이없는 얼굴을 해 보였다가 문득 떠오르는 섬뜩한 생각에 천천히 이불을 들춰 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주다혜과 적혈명. 둘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이다.
‘끄아아악!’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지난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다른 사매들은 다들 어디 가고? 갖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적혈명은 한동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잠시 후 겨우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을 부릅뜬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이 방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지?’
적혈명은 당황한 와중에도 우선은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빠르게 내력을 운용해서 술기운을 몸 밖으로 밀어냈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금세 청명해지고,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던 몸뚱이도 순식간에 정상을 되찾았다.
‘이제 그 다음은…….’
지금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었다. 그 다음에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기억도 나지 않는 ‘사고’에 대한 대처 방법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다행히 사매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양이니 빠져나가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적혈명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다 문득 주다혜의 잠든 얼굴에 시선이 간 적혈명은 멈칫해 버렸다.
‘말도 안 돼…….’
순간적이었지만 자고 있는 저 악마 같은 계집애가 귀엽게 보였던 것이다. 경악에 빠져 있던 적혈명은 급하게 고개를 저어서 잡생각을 떨쳐 놓고 멀리 떨어져 있던 옷가지들을 허공섭물로 당겨 조용히 품 안에 챙겼다. 그때. 누워서 자고 있던 주다혜가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허억!”
적혈명이 너무 놀라 헛바람을 들이 삼킬 때. 주다혜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적혈명을 바라보았다.
“왜? 도망치려고? 지금 그게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응?”
“…….”
적혈명이 주다혜의 거친 말투에도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엉거주춤 서 있을 때. 주다혜가 얼어 있는 적혈명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배시시 웃으며 자신 쪽으로 확 잡아당기더니 작게 속삭였다.
“대사형은 이제 내 거니까 어디로든 도망 못 가.”
“……!”
적혈명은 자신의 입술에 닿는 주다혜의 입술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북해빙궁의 후계자 적혈명. 지금 이 순간 그의 미래가 바뀌게 되었다. * * * 성심장. 그곳의 장주인 곽유환은 매일매일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천마신교가 천하를 재패하고 저항하거나 불필요한 가문들을 차례차례 숙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그들의 차례가 올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곽유환은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 때문에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
“바, 방금 뭐라고 했느냐? 천마신교의 교주라고?”
“예! 장주님!”
곽유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왜 여길……?”
“모르겠습니다. 일단 귀빈실로 모셔 놓았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알겠다. 내가 가 보마.”
무림 역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교주. 현재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자. 초류향. 그가 예고도 없이 성심장을 방문한 것이다. 탁- 귀빈실의 문을 열자 고급스러운 흑룡포를 몸에 걸치고 있는 침착한 얼굴의 미청년이 보였다. 젊어 보이는 얼굴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자연스럽게 전해져 왔다. 상대방은 정말로 천마신교의 교주인 것이다.
“서, 성심장주가 신교의 교주님을 뵙니다.”
“…….”
초류향은 허둥지둥 달려 나온 곽유환을 물끄러미 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절 모르십니까?”
“……예?”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습니까?”
“그, 그야 천마신교의 교주님이시지요.”
“…….”
곽유환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걸 묻는 걸까? 곽유환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대로 힘과 권력을 가진 놈들에게는 밉보이면 항상 결과가 좋지 않았다. 아무리 이쪽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더라도 한번 좋지 않은 인상이 박히면 뒤가 힘들다. 지금은 최대한 허리를 숙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굽실굽실거리는 곽유환을 지켜보던 초류향은 씁쓸하게 웃은 후 입을 열었다.
“곽운벽 어르신을 뵈러 왔습니다.”
“……제 아버님을요?”
“예.”
천마신교 교주가 왜 그의 아버지를 찾는다는 말인가? 곽유환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할 때. 초류향이 입을 열었다.
“안 계십니까?”
“아, 아닙니다. 후원에 계십니다. 이곳으로 모셔올까요?”
초류향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가지요.”
“그, 그러실 필요는…….”
하나 곽유환은 성큼성큼 움직이는 초류향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뒤를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졸졸졸 따라갈 뿐이었다. 금세 후원에 도착한 초류향은 그곳 정자에 앉아 한가로이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낚시를 하던 노인은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어이없다는 얼굴로 초류향을 보다가 곧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놈! 아주 신수가 훤해졌구나.”
곽운벽의 말에 초류향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르신.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클클, 죽지 못해 살고 있지.”
성심장의 장주 곽유환은 아버지가 천마신교의 교주에게 감히 하대를 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뻔했다. 그런데 교주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말을 받아 주며 웃고 있지 않은가?
‘둘이 무슨 사이야?’
곽유환의 머릿속에는 과거 백치였던 초류향에 대한 기억은 이미 지워지고 없었던 것이다.
“이놈아 뭐하고 있어? 빨리 가서 다과라도 내오지 않고?”
“예? 예예. 금방 내오겠습니다.”
곽유환은 아버지의 호통에 다과를 준비하러 부리나케 뛰어갔다. 뛰어가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런 아들이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곽운벽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놈이 천하를 집어삼켰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때 내가 아주 괴물을 세상에 풀어놓았구만.”
“예. 이번에는 그 은혜를 갚으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때 늦지 않게 정신을 차렸던 덕분에 지금의 이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곽운벽의 도움이 컸다.
“호오? 은혜를 갚는다라…… 그래, 어떻게 갚을 생각이더냐? 천하통일을 이룬 놈의 은혜 갚기라니……. 이거 무척 기대가 되는데?”
초류향은 그런 곽운벽을 바라보며 품에서 하나의 문서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으며 곽운벽이 말했다.
“응? 이건 뭐냐? 돈이더냐?”
“돈은 아니지만 그것과 비슷할 수는 있겠네요.”
곽운벽이 문서를 펼쳐 읽어 내려가다가 너털 웃어 버렸다.
“이건 나보다 내 아들놈이 더 좋아할 만한 선물이다.”
초류향이 곽운벽에게 건넨 것은 이곳 강남 지방 전체의 약초 독점권을 약속하는 문서였다.
“성심장은 무사할 겁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무사할 겁니다.”
“이게 네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냐?”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그것밖에 드릴 게 생각나지 않아서요. 일단은 그걸 받아 주시고 차차 생각나면 더 좋은 것을 드리겠습니다.”
“클클……. 나는 이런 쓸데없는 것 말고 한 가지만 들어주면 된다.”
“따로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곽운벽은 초류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가 뗀 뒤 입을 열었다.
“이것이면 되었다.”
“……예?”
손목을 잡았다가 뗐을 뿐인데 되었다니? 대체 뭐가?
“나는 저런 종이 쪼가리보다 네 괴상한 몸뚱아리에 더 흥미가 있어서 말이다. 지금 한번 훑어보았지.”
훑어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곽운벽은 정말 엄청난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 성격이 괴팍해서 문제였지만.
‘어쩌면 순수하게 의술에 관한 한 선우조덕 호법님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탐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때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곽운벽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네놈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몸뚱이에 특이한 것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구나.”
“특이한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그 월묘의 떡은 대체 어떻게 얻은 거냐? 예전에는 단전에 용의 여의주를 넣어 가지고 다니더니 이번에는 뱃속에 월묘의 떡을 들고 다녀?”
초류향은 이번에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곽운벽의 정확한 진단에 감탄해 버린 것이다.
“아주 우연하게 얻게 되었습니다.”
“쯧, 잘 활용해라.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과한 물건이니.”
“예.”
막수가 준 선물. 그 떡의 효능은 굉장히 다양했다. 그것을 먹으면 평생토록 배가 고프지 않았고, 몸에 치명적인 상처가 생기더라도 금세 치유가 되었다. 실로 엄청난 보물인 것이다. 초류향이 막수가 준 떡 조각의 효능에 대해 수긍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곽유환이 다과를 챙겨서 허둥지둥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곽운벽이 지나가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나를 만난 다음에는 어디를 갈 생각이더냐?”
초류향은 조용히 호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백치였던 저를 귀찮아하지도 않고 오랜 기간 보살펴 주신 분이 계십니다. 어르신 다음에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 하니까. 초류향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곽운벽도 춘삼의 얼굴을 떠올린 후 히죽 웃어 보였다.
“클클, 은혜 갚기라……. 말로는 쉽지만 막상 성공하고 나면 하기 귀찮은 일이지. 네놈은 제법 인간이 된 놈이었구나.”
곽운벽의 투박한 칭찬에 초류향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건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가 백치가 되어 있는 동안 보살펴 준 춘삼과 춘하월. 그들이 없었다면 초류향은 무사히 지금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잘 지내고 있겠지…….’
누구보다도 억척스러운 춘삼과 춘하월이다. 그들이라면 분명히 건강할 터. 다과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생각에 잠긴 초류향을 보던 곽운벽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낚시를 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 가 보거라.”
손을 휘저으며 이야기하는 곽운벽을 바라보다가 초류향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차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어르신.”
“좋을 대로 하거라.”
곽운벽이 다시 낚싯대를 기울이자 초류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춘삼과 춘하월을 만나러 가려는 것이다. 그들은 기억이 없던 그를 가족처럼 보살펴 주었던 은인들이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이제 지키러 갑니다.’
웃으며 자리를 떠나는 초류향의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