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308)
308화 외전 : 수어지교 운휘는 멍한 얼굴로 후원 정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 초류향이 다가왔다.
“이화궁주의 마음을 전혀 모르셨습니까?”
초류향의 물음에 운휘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주군.”
그랬다. 정말 짐작도 하지 못했다. 선우초린이 그에게 그런 식으로 뜬금없이 고백을 할 줄은……. 애초에 운휘는 그녀를 만날 기회조차 거의 없다시피 했다.
‘대체 언제부터…….’
운휘는 선우초린이 자신에게 반한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무런 접점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운휘가 심각하게 고뇌하고 있을 때. 초류향이 지나가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진녕 님이 깨어났습니다. 한데 극심한 내상을 입어서 한두 달 정도는 요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마음고생이 어지간히도 심했던 모양이다. 하긴 이해는 되었다. 그렇게 대놓고 선우초린을 쫓아다녔는데 결국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던 운휘였다니? 이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운휘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노진녕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놈을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초류향이 그런 운휘의 마음을 짐작했음인지 천천히 말했다.
“문병도 할 겸, 겸사겸사 노진녕 님을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만…… 운휘 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편하시다면 굳이 함께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아닙니다, 주군.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이런 일은 피하거나 도망쳐선 안 되었다. 운휘가 생각하기에 선우초린과의 일은 분명 오해였고, 오해는 당사자와 해결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게 순리고 올바른 해결 방법이다. 운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초류향과 함께 노진녕이 몸져누워 있는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문을 열자 노진녕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초류향은 노진녕을 힐긋 바라본 뒤 물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
노진녕이 대답하지 않고 곧장 초류향의 뒤에 있는 운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운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믿지 않겠지만 나는 전혀 몰랐던 일이다.”
“……개소리하지 마.”
깊은 내상을 입은 노진녕의 음성에는 힘이 없었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분노의 감정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초류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잠시 두 분에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초류향이 그렇게 바깥으로 걸어 나가자 운휘는 곧장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여자가 나에게 왜 그랬는지 정말로 모른다. 짐작 가는 것도 없다. 그러니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것은 전부 오해다.”
“크흐흐흣, 오해? 오해라고? 내 눈 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가장 믿었던 친구 놈과 입맞춤을 했는데, 그게 오해다? 날 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너는 내가 바보로 보이냐?”
“…….”
운휘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노진녕이 내뱉은 ‘바보’와 ‘가장 믿었던 친구 놈’이라는 말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그때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있던 노진녕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나왔다. 아직 몸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흥분했더니 내상이 다시 도진 것이다. 운휘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가 내상약을 내밀자 노진녕이 그 손을 쳐내며 말했다.
“그냥 뒈지게 냅둬! 걱정하는 척하지 마! 이 나쁜 새끼야! 크윽, 우웨웩!”
노진녕은 이제 입으로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씩씩거리며 운휘의 도움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운휘를 바라보았다.
‘친구…….’
운휘에게는 그 단어가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노진녕이 꺼낸 친구라는 단어를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으며 운휘는 말했다.
“……놀랍군.”
“……뭐가?”
운휘의 눈가에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나 역시 바보 천치인 네놈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 시간 동안 미운정이라는 것이 든 것 같군.”
“…….”
노진녕은 어이없는 얼굴을 해 보였다. 이 자식은 그럼 그동안 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했던 걸까? 흐르는 코피를 닦아 내며 노진녕이 나직하게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냐? 언제부터, 어떻게 그 여자를 꼬신 거야?”
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적 없다. 나는 너완 달리 그 여자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으니까. 어제의 일은 순전히 그 여자 혼자만의 생각이다.”
“…….”
운휘의 기색을 보니 이건 정말 거짓말 같지 않았다. 그래서 노진녕은 더더욱 열불이 치솟았다. 그렇게 열심히 지극정성으로 고백했던 자신은 조금도 받아 주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 음침한 놈이 좋다고 하는 선우초린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넌 너 자신이 재수 없는 녀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
노진녕은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입과 코에 피 칠갑을 한 상태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운휘를 바라보았다. 운휘는 노진녕의 그런 서운한 감정을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러다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라. 멍청이.”
“……?”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 여자와 사랑놀음 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정말?”
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군을 모시기에도 바쁜 몸이다. 그러니 너는 안심하고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계속 그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 된다.”
노진녕은 허탈한 얼굴을 했다. 이놈은 지금 진심이었다. 게다가 평소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지금 이걸 위로라고 지껄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황당한 것도 황당한 거지만, 노진녕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선우초린같이 엄청난 미인이 고백을 해 왔는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새끼 설마 고자 아니야?’
노진녕이 막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할 때. 운휘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여 노진녕에게 다가와 그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읍? 우욱!”
이미 힘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는 노진녕이 저항해 보았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몸짓일 뿐이었다. 운휘는 압도적인 힘으로 노진녕을 찍어 누른 뒤 그의 입에 재빠르게 내상약을 쑤셔 박으며 말했다.
“죽게 내버려 두라고 했나? 웃기지 마라.”
“……!”
“너 역시 주군에게 반드시 필요한 몸이다. 함부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노진녕은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운휘를 응시했다. 이 음침한 놈의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내상약의 궤적이 마치 용암을 삼킨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내상약이 몸 안에 들어가자 전신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운휘가 나직하게 말했다.
“본래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분명한 내 실수. 그 부분에서만큼은 너에게 미안하다.”
“……!”
저 얼음장 같이 차가운 놈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노진녕은 열에 들떠서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가고 있는 와중에도 입을 헤하고 벌렸다 깜짝 놀란 것이다. 그런 노진녕을 차분하게 내려다보던 운휘가 말했다.
“깨어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뒤일 거다. 그러니 편안히 쉬어라.”
운휘는 기절해 버린 노진녕을 바르게 자리에 눕히고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초류향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초류향에게 다가간 운휘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군. 엉뚱한 일로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초류향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운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운휘 님을 믿습니다.”
운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향한 초류향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주군을 향한 운휘의 마음 역시 절대적이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오로지 주군만을 위해서 써야 한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사치일 뿐이다. 그것이 운휘의 생각이었지만, 초류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초류향은 운휘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나서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
“돌이켜 보니 그동안 제가 참으로 무심했던 것 같습니다. 운휘 님의 개인적인 행복도 마땅히 고려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운휘 님의 일방적인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운휘 님.”
“……!”
운휘는 황망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주군께서는 저에게 당연한 것을 요구하신 것뿐입니다. 제 인생에 주군 외의 다른 존재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초류향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운휘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그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를 더 이상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세요, 운휘 님. 저는 진심으로 운휘 님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노진녕에게는 미안하지만 초류향은 운휘만 괜찮다면 선우초린과의 혼례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반려자가 될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책임진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것이나 무공을 익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공부가 되더군요.”
“…….”
초류향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운휘의 눈동자가 서서히 흔들렸다. 그렇게 흔들리는 운휘의 눈동자를 보며 초류향이 희미하게 웃었다. 운휘는 정말로 충직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봐도 이런 사람을 만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둘도 없는 큰 행운이었다.
“이화궁주가 운휘 님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생각해 보세요. 노진녕 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운휘 님만 좋다면 이 혼례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마음이 있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그 마음이 전해졌기에 운휘는 크게 당황했다. 그렇게 혼란에 빠진 운휘를 바라보며 초류향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앞으로 제 모든 계획에서 운휘 님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제가 운휘 님에게 받은 만큼은 돌려 드리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최대한 전력으로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그러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주군. 저는 주군을 곁에서 모시는 것만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운휘가 정말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초류향은 단호했다.
“제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행복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그게 앞으로의 제 목표이자 운휘 님에게 드리는 약속입니다.”
한 번 내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게 초류향이라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에 운휘는 더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때 초류향이 운휘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말했다.
“꼭 이화궁주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마음에 드는 분이 생긴다면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앞으로는 운휘 님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
운휘는 입을 다물었다. 주군은 지금 진심이었다. 그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운휘도 알았기에 이제는 그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맞았다. 한데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여자에게 눈길조차 준 적이 없던 운휘인 것이다.
‘어렵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류의 명령은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하는 임무보다도 어려웠다. 애초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상적인 관계도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운휘였다. 그에게 갑자기 이성적인 관계를 맺으라 하는 것은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사람에게 물 위를 걸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운휘의 얼굴에 괴로움이 퍼지는 것을 바라보며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진지하게 자신의 제안을 생각하는 기색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 운휘가 모든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갑자기 초류향에게 읍을 해 보이며 말했다.
“……우선 모든 일에 앞서서 정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주군.”
정리해야 할 문제.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되었기에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화궁주를 찾아갈 생각이십니까.”
“예.”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휘가 그녀에게 거절의 말을 할 것을 알았기에 은근한 어투로 물어보았다.
“그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실 수는 없는 겁니까? 제가 보았을 때 이화궁주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 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딱히 이화궁주가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저 뒤쪽 방에 골골거리며 누워 있는 놈은 이화궁주가 아니면 안 될 겁니다.”
초류향은 운휘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운휘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마음이 무척이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새삼 그 따스한 마음이 전해져 오자 초류향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화궁주를 만나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실 생각입니까?”
운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단호하게 거절할 생각입니다.”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그것이 운휘의 진심이라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제가 했던 말을 잊지 마세요, 운휘 님. 이제부터는 운휘 님의 행복을 위해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운휘 님도 노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
무척이나 흡족해하는 초류향과는 달리 운휘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만이 떠올랐다. 수라왕 초류향과 흑살마군 운휘. 둘의 이런 끈끈한 유대 관계는 천하에서도 유명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만큼 좋은 주종관계의 본보기로 남게 된다.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교분이 깊다)인 것이다. 하나 정작 당사자들 중 한 명인 운휘는 그저 주군께서 새롭게 내린 명령에 무척이나 힘겨워할 따름이었다.
수라왕외전. 제갈공명, 천하를 훔치다 유비가 죽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만나고자 한 사람은 가족도 아니고, 절친한 친구들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군사 제갈공명. 그를 은밀히 만나고자 했다.
“군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유비는 제갈공명과 단둘이 있게 되면 항상 그의 직책인 재상(宰相)이나 승상(丞相)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이렇게 군사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이왕 멀리 가시는 마당인데 제 생각이 중요합니까?”
“그럼, 중요하지. 그래도 지금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본 사람이 그대 아닌가? 내 인생에 대한 평가를 해 주시게나.”
제갈공명은 유비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솔직한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적당히 돌려 말씀드리길 원하십니까?”
유비는 제갈공명의 물음에 신중한 얼굴로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후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적당히 돌려 말해 주었으면 하네. 자네가 워낙 직설적이라 상처 입을까 두렵구먼.”
굉장히 흐릿한 웃음. 그 웃음에는 숨길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이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유비를 바라보던 제갈공명은 손에 들고 있던 섭선을 잠시 무릎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는 세간에서 평가하는 그대로 인덕(人德) 있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지요. 주변 사람들을 아끼고 보살피며 제 목숨만큼 아끼시니 그야말로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사람은 적이 없음)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할 듯싶습니다.”
“그런가…….”
유비의 입가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것은 누가 봐도 만족스럽다는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갈공명이 입을 열었다.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게나.”
“왜 그동안 모르는 척하셨습니까?”
“무얼 말인가?”
“제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군사야 워낙 능력이 출중하니 그중에 무얼 말하는지 잘 모르겠구먼.”
제갈공명은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유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시에도 이미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제갈공명이었지만 그런 그조차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의 주군. 유비만큼은 제갈공명조차도 아직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어차피 주군께서는 죽기 직전이시니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부분은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자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리하시게.”
유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갈공명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뻔뻔한 사람입니다. 죽는 마당인데도 참으로 양심이 없어요.”
유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웃었다. 지금까지처럼 힘들고 다 죽어 가는 웃음이 아닌 진정으로 즐겁고 맑은 기운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군사는 나를 그렇게 보았는가?”
“예. 한 치도 틀림없이 그리 보았습니다.”
“정확하구먼.”
“제 눈이 애초에 틀릴 리가 없지요.”
“그럼 내가 그대를 이렇게 부른 이유도 이미 알고 있겠구먼.”
“물론입니다. 이유를 알고 왔고, 부른 목적도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 망할 ‘곧 죽을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 필사적으로 방법을 궁리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군사는 들어주겠지.”
“…….”
청산유수의 달변가. 다른 것들도 뛰어나지만 특히 언변(言辯, 말재주)으로는 천하에 그를 당할 자가 없다고 알려진 제갈공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삐쩍 말라서 앙상해진 자신의 주군을 묵묵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군사는 그동안 정말 고생을 많이 해 주었네. 사실 별 보잘 것도 없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다 그대의 덕분이라 할 수 있겠지. 고마우이.”
“……굳이 그렇게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 정도는.”
한참 만에 입을 연 제갈공명의 어투는 팽팽한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이 힘이 없었다. 유비는 자신의 마른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제갈공명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의 온기를 접한 제갈공명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젊은 나이에 나를 따라와 고생만 하고……. 생각해 보면 내가 참 염치가 없는 놈일세. 자네 말이 다 옳아. 아주 옳게 보았네.”
“…….”
“그대를 만나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다스리며 내가 가진 그릇보다 더 큰 꿈을 꾸었네. 하지만 이제는 그 꿈을 깨야 할 시간인가 보네.”
유비는 병색이 완연한 환자의 눈에서 벗어나 본래의 형형하면서도 깊은 심연의 눈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눈빛을 고요하게 바라보던 제갈공명이 설핏 웃으며 입을 열었다.
“꿈은 즐거우셨습니까?”
“그럼, 과분할 정도로 즐거운 꿈이었네. 허허허…….”
유비는 한동안 허허롭게 웃다가 제갈량의 손을 돌연 꽉 움켜쥐었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완력은 도저히 죽기 직전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박력이 넘쳤다.
“군사에게 내 아들, 유선과 북벌의 대업을 맡겨도 되겠는가?”
제갈공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 얼토당토않은 소원, 거절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그대의 숨겨진 능력이 나에게 보여 준 능력보다 훨씬 뛰어남을 나는 이미 알고 있네. 그래서 하는 부탁이네만 내 아들의 어리석음이 대업에 지장을 줄 것 같으면 그 자리를 자네가 가지게.”
“…….”
이건 천하의 제갈공명으로서도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서라도 대업을 완성하라니? 그 말은 곧 왕권을 찬탈하라는 말이 아닌가? 제갈공명은 한동안 말없이 고요한 시선으로 그의 주군을 우두커니 지켜만 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읽은 유비가 흐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나라고 핏줄에 대한 애정이 없겠는가? 하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네. 그리고 나는 그대가 꿈을 이룰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제갈공명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유비의 꽉 움켜쥔 손을 풀어내며 입을 열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주군에 대한 제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겠습니다.”
“그 사이 바뀐 게 있나?”
제갈공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당신에 대해서 조금 보이네요. 너무 늦어 버렸지만.”
잠시 뜸을 들이던 제갈공명은 섭선을 가볍게 만지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도둑놈의 심보를 가졌습니다. 여태껏 아무도 당신의 그 검은 심성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당신이 훔치려는 게 너무나 커서 남들이 미처 보지 못했을 뿐이죠.”
유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조금 전과 같은 박력이나 힘이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도 흐릿한 웃음이었다.
“역시 천하에서 군사만…… 나를 이해하고 있었구먼.”
“천하를 훔치려는 당신은 큰 도둑입니다. 당신을 위해 일한 시간은 지극히 즐거웠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십시오.”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못하네, 군사.”
유비의 손에서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제갈공명은 그런 유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놓아 주어야 함은 알고 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유비가 제갈공명의 옆을 바라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아우들이 마중을 나왔구먼.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을 것 같네.”
제갈공명은 자신도 모르게 유비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곳은 텅 빈 공간으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던 제갈공명의 눈이 그답지 않게 크게 흔들렸다. 이제 정말로 그의 주군이 그의 곁을 떠나야 할 시간이 찾아왔음을 알았던 것이다.
“어쩌면…… 원하는 결과물을 보여 드리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진심으로 노력해 보겠습니다. 주군께서 원하시는 대로 천하에서 가장 이름 높은 도적이 되어드리지요.”
“……부디 대업을 이루시게나.”
제갈공명은 일순간 유비의 몸 전체가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후 천천히 쥐고 있던 손을 풀어내며 제갈공명은 흐릿하게 웃었다.
“다행히 좋은 곳으로 가시는 모양입니다. 웃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주군.”
223년 4월. 삼국시대의 영웅이자 촉한의 황제 유비(劉備). 행년(行年) 63살 나이로 죽다.
수라왕 외전. 공손천기의 이야기
“왜 교주가 되기 싫다는 거냐?”
“귀찮고 번거롭잖아요. 그런 거.”
“야, 이 미친놈아! 그럴 거면 너 대체 내 제자는 왜 된다고 했어?”
어린 공손천기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사부가 좋으니까요.”
“…….”
공손천기의 스승. 지옥마제 방문천은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너무도 천진난만한 대답과 미소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그가 잠시 멍하게 굳어 있을 때 어린 공손천기는 몸을 배배 꼬며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사부, 저번에 보여 줬던 거 있잖아요. 두 손에서 불덩이가 막 나오는 무공. 그거 다시 한 번만 보여 주면 안 돼요?”
“구양신공(九陽神功)말이냐? 그걸 갑자기 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거 고기 익혀 먹을 때 편할 것 같아서요. 사부가 맨날 고기를 덜 익은 것만 드시니까 저 많이 힘들었거든요.”
지옥마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늦게 거둔 그의 어린 제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물었다.
“내가 멍청해서 그런가? 고기 익혀 먹는 거랑 구양신공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네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지옥마제는 어느새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그의 어린 제자를 궁금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공손천기가 큰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거 배워서 고기나 익혀 먹으려고요. 불이 없을 때 딱 좋을 것 같던데요? 뜨끈하기도 하고.”
지옥마제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네놈은 구양신공이 어떤 무공인 줄 알고 그딴 데다가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그걸 배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줄이나 알아? 자그마치 십 년이다, 십 년. 나 같은 천재도 사 년 만에 겨우겨우 배운 거야.”
공손천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무공 하나 배우는 데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요? 별로 어려워 보이지도 않던데.”
지옥마제가 제자의 발언에 욱해서 뭐라 하기도 전에 공손천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한번 보여 줘 봐요. 처음 요령만 배우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부.”
공손천기의 태연한 어투. 잠시 동안 그런 제자를 바라보던 지옥마제의 입술 끝이 작게 씰룩거렸다. 천마신교의 십대 신공 중의 하나가 바로 구양신공이다. 그것을 고작 두 번 봤다고 익힐 수 있을까?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네놈 재주가 비상하다는 건 인정한다만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지. 암, 그렇지. 그 구양신공이 얼마나 높은 경지의 무공인데…….”
“그래서 안 보여 주실 거예요, 사부?”
“…….”
제자가 실망했다는 표정을 하자 지옥마제는 너무도 쉽게 그 작전에 넘어갔다. 지옥마제는 두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천기 앞에 선 후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크오오오― 바람이 타들어 가는 거친 비명 소리. 동시에 주위에 가득한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후끈하게 달궈졌다. 이윽고 그 열기가 정점에 이른 순간. 어느새 지옥마제의 손 위에는 수박보다 더 큰 불덩어리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공손천기는 그 모습을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복잡하네요.”
“크하하핫!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더냐? 본 교의 양강무공 중 최고가 바로 이 구양신공이거늘……. 그래도 너무 기죽지 마라. 네놈 정도의 재능이면 부단히 노력했을 때 대략 삼사 년 정도면 충분히 배울 수 있을 테니.”
“…….”
공손천기가 사부의 말에 곧장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제자를 바라보는 지옥마제의 입가에 차츰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항상 어린 제자가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가끔씩
‘어린 아이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늙은 영감탱이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영악한 녀석이 아니던가? 그 건방진 꼬마가 지금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차차 하나씩 버릇을 들이는 거다.’
지옥마제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쯤. 공손천기가 갑자기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며 양손을 앞으로 가볍게 내밀었다. 스우웅― 공손천기의 고사리처럼 작은 두 손이 붉게 달아오르며 손 주변의 공기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작게 일그러졌다.
“어라? 이게 아닌가?”
공손천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손을 내뻗었다가 거둬들일 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지옥마제는 당장이라도 안구가 튀어 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저, 저저…….’
비록 제대로 된 형태는 갖추지 못했지만 방금 그것은 분명히 구양신공이었다. 그것도 어설프게 겉모양만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핵심을 짚어 낸 구양신공이었던 것이다. 어디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단 한 번. 아니, 그 전에도 스치듯이 한 번 보았을 테니 총 두 번 정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도 어이없는 광경에 지옥마제가 잠시 멍청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공손천기가 울상을 한 채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죠, 사부? 이 정도면 다 된 것 같은데…….”
“…….”
이번에는 지옥마제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진지하게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보려 했다. 그리고 결론이 나왔다.
‘이 어린 녀석은 미친놈이지만 적어도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천재 중의 천재다.’
이때 지옥마제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이 아니고, 후대의 공손천기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이때 지옥마제가 했던 그 생각이 하나씩 들어맞아 가기 시작한 것은 수십 년이 지나 공손천기가 제자를 들였을 무렵부터였다.
만든이 한 마디
이것으로 수라왕 외전까지 끝났습니다.
웃긴게 수라왕 외전으로 8화 만들어놓고 별 내용도 없는 제갈공명과 공손천기 이야기를 권으로 따로 만듬.
시발 돈이 아깝다 이새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