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32)
제32화 정마대전(2013.05.02.)
수 세기에 걸쳐서 강산은 변해도, 무림에서는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관계가 있었다.
빛과 어둠. 흑과 백.
서로가 철저하게 대립되는 관계. 그것이 바로 정파와 천마신교 간의 관계였다.
“이번에는 정말 어쩔 수가 없구만.”공손천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싸움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고민도 많이 했고 노력도 많이 했다. 가급적 쓸데없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출정식을 앞두고 단상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공손천기는 망설였다. 이곳 감숙 분타를 벗어나면 느린 걸음으로도 반나절 거리에 있는 곳이 바로 반야평이다. 대다수의 인원이 집결해서 싸울 곳은 근방에서 그곳뿐이었다.
그러니 딱히 약속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도맹도 천마신교도 당연하게 그곳을 결전의 장소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단 그곳에 들어서게 되면 양쪽 모두 뒤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여야만 했다.
뿌득―
공손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그로서도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일파의 수장인 그가 결전 직전까지 이렇게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분명 감당 못 할 피해가 되어 돌아올 것이 너무도 뻔했으니까.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단상 위로 걸어 올라간 공손천기는 자신만을 보고 있는 오천 명의 무인들을 한 번 스윽 훑어보았다. 그리고 본인도 모르게 흐릿하게 웃어버렸다. 공손천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무인들의 시선 속에는 너무도 분명한 한 가지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그렇게 싸우고 싶었더냐?’뜨겁게 끓어오르는 피. 미칠 듯이 박동하는 젊은 심장 소리가 귓가로 전해져왔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무인들 특유의 투쟁심. 그것이 지금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실수였다. 저 후끈한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해버렸다. 덕분에 지금 공손천기의 머릿속에, 싸움을 막을 명분도 막을 생각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 역시 천생 무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참긴 했지.”공손천기가 작게 입을 열자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공손천기는 단상에서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 순수한 오천 명의 무인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내가 그동안 이기심을 부렸던 모양이다. 너희들을 진짜로 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말이다.”확실히 이 세계에서는 싸우지 않고 무언가를 얻을 수 없었다.
이곳은 강호.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인,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이다.
공손천기는 그 사실을 떠올리고 히죽 웃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강한 놈이 곧 정의였다. 그리고 이제 아무래도 그 정의를 새롭게 세워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들은 그동안 너무 참아왔다.
“저놈들이 우리 집 앞마당까지 와서 설치고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다들 싸울 준비는 되었느냐?”공손천기의 질문에 오천 명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命)!”우레와 같은 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공손천기의 입가에 실낱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녀석들의 박력과 마주하자 마음속에 한 가닥 남아 있던 망설임이 사라졌던 것이다.
망설임이 사라진 공손천기의 전신에서 갑자기 숨길 수 없는 거대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천천히 장내를 휘감더니 곧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좋아. 그럼 이제 정파의 위선자들에게 진짜 공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도록 하자.”공손천기가 말을 마치고 손을 흔들자 오천 명의 무인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중앙에 길이 생겨났다. 그 길을 공손천기가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자 그 뒤로 우 호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길을 따라 연무장을 벗어난 공손천기의 뒤로 오천 명의 무인들이 거대한 검은 태풍이 되어 뒤를 받쳤다.
망설임이 사라진 공손천기. 지금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그 무엇이든, 처절하게 깨부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도맹에게 있어서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 * *
“아미타불…….”염주알을 굴리고 있던 검버섯 가득한 손. 그 손이 갑자기 멈칫하며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스승님?”소림사. 이 결전의 장소에는 그들도 와 있었다. 그것도 삼황오제칠군. 구주십오객 중 불제(佛帝). 신승(神僧) 공야(空夜). 그는 지금 어두운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싸움이 벌어지겠구나.”대기 전체를 뒤덮고 있는 이 진득한 살기(殺氣). 그것이 지금 피부를 따끔거리게 할 만큼 천지사방에 가득했다. 바야흐로 무림 역사에 길이 남을 결전이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여기 모두가 이미 싸움을 각오하고 있지요.”공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한 목소리로 아미타불을 연발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무호야.”“예. 스승님.”“만약의 경우 본사의 제자들을 데리고 빠져나가 줄 수 있겠느냐?”무호는 잠깐 멈칫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떤 만약의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이온지…….”공야는 자신의 짓무른 눈을 들어 그가 마지막으로 거둔, 막내제자를 바라보았다. 총명함이 대단하고, 불심 또한 바다처럼 깊은 아이였다. 저 아이의 그릇에는 소림사 전체를 담아도 모자랄, 그런 재능이 있는 아이다. 그랬기에 이런 곳에서 헛되이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무호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한 걸음 물러섰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온다.’저 멀리, 아주 먼 곳에서부터 거대한 검은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교…….’무호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교. 강호인들에게는 단순히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고,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심어주는 이름이었다.
‘겁먹지 말자.’저쪽보다 이쪽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모두가 각파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아닌가? 각자의 속마음이야 어떨지 몰라도 어찌 되었건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마교를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태극검황이 있었고 소림의 희망. 신승 공야 스승님께서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력이었다. 마교라는 이름에 지레 겁먹고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에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은 왜일까?
‘과하다.’무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자 또렷하게 보였다. 흑색의 무복을 차려입은, 오천 명의 무인들이. 그 검은 파도가 천천히 다가올수록 다시금 심장을 죄어드는 답답함에 숨이 막혀올 정도였다. 그때 무호의 눈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파도. 그 한가운데의 정점에 서 있는 자.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사방으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숨길 수 없는 강대한 존재감.
‘설마…….’무호의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무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정면에 서 있는 단 한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숨길 수 없는 막강한 힘.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암흑마왕 공손천기!’무호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쩌면 이곳에 암흑마황 공손천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긴 했었다. 철저한 어둠에 쌓여 단 한 번도 그 실체를 외부에 보여준 적이 없는 신비의 절대고수.
전부 과대포장이라 생각했다. 그를 향한 강호의 수식어들이 너무도 화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공손천기는 여태껏 강호에 떠들어지던 소문들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무호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이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 정도까지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교주가 보이느냐?”“……예. 스승님.”무호가 덜덜 떨며 이야기하자 공야가 그 앞을 살짝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직은 네 적이 아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공야 스승님이 앞을 가로막아 주고 나서야 무호는 가까스로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한순간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공손천기의 신형이 태산처럼 거대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
그때. 정도맹 측 진영에서도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동시에 정면에서 압박해오던 압력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태극검황!”누군가가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랬다. 저쪽에 암흑마황이 있다면 이쪽에는 태극검황이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가는 태극검황. 그를 바라보는 정도맹의 인원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설마? 설마?’꿈속에서나 혹은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했던 일. 삼황의 두 명. 태극검황과 암흑마황.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둘의 싸움을 실제로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태양은 하나.’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을 즈음. 멀리 있던 검은 물결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왔다. 무림인들의 안력(眼力)이라면 이제 서로 간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가장 앞에 서 있던, 암흑마황으로 짐작되는 자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쿵-!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한 발로 바닥을 크게 구르며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일순 지진이라도 난 듯 지면이 짧게 요동쳤다. 동시에 찾아온 숨 막히는 고요.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마교의 무인들과 마주하고 있는 정도맹의 정예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각자의 무기들을 매만지고 있었다.
태극검황은 가타부타 별다른 지시 없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인들의 싸움에서는 기세가 상당히 중요했다. 지금 같은 상황. 서로 상대방의 수장을 꺾는다면 그 기세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완벽한 승리로 귀결될 게 분명했다.
마교 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태극검황의 전신에서 이미 숨길 수 없는 막강한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거대한 구름처럼 일어나 반야평 전체를 아우르기 시작했다.
‘난 태어나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무당파에 입문하여 검을 배우고 단 한 번도 꺾여본 적이 없었다. 천하제일검, 천하제일인. 그것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천하의 그 누구도 그의 일검을 받아낼 수 없었으니까. 헌데 그런 그와 늘 비견되던 두 사람이 존재했었다. 그들 중에 하나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드디어…….’삼황의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얼마나 학수고대해왔던가?
‘아쉽군.’지금 단 한 가지. 태극검황을 아쉽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육체가 이미 전성기의 그때만큼 움직여 주지 못할 것 같다는 점.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육체는 빠르게 시들어간다. 강철처럼 강하게 단련했던 육체도 어느 한계점을 지나면 결국 무너져가고 마는 것이다.
암흑마황 공손천기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 태극검황은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강자를 만나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 최선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고수는 상대방의 그림자만 보고도 그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곤 하지.”태극검황의 작은 중얼거림. 그것은 조금 떨어져 있던 공손천기의 귓가에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자네는 어떠한가? 나와 마주하고 있는 지금 승리가 눈에 보이는가?”암흑마황 공손천기. 그 역시 태극검황을 향해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러다 그 특유의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겉멋만 잔뜩 든 영감한테는 지지 않아. 그쪽한테 지면 무덤에서부터 뛰쳐나올 영감이 있거든.”아주 오래전. 공손천기는 죽은 사부가 신신당부한 것을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
-무당파의 검에는 귀(鬼)가 붙어 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된다.
그 오만방자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기로 유명한 사부였다. 그런 사부의 입에서 조심하라는 말을 무려 두 번이나 들었었다. 확실히 무언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드득―
공손천기는 뒷골목 주먹패들처럼 손가락 관절들을 거칠게 풀어냈다. 확실히 태극검황 백무량은 그 명성만큼이나 대단한 기도를 자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려서 무릎 꿇게 되고 말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공손천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날 만나게 된 게 그쪽에겐 불행이겠지. 난 이제 진심으로 할 거거든. 안 봐줄 거니까 각오해.”공손천기는 말을 한 후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하얗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제1차 정마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