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34)
제34화 승천하는 용(2013.05.09.)
백무량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무당파에서부터 그와 함께 해온 검. 단 한 번의 패배도 모르는 그의 무적검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왔다.
백아(白牙).
검을 뽑자 그의 주변의 공기가 가늘게 요동쳤다. 기세가 한층 더 사납게 변한 것이다.
“자네는 내가 이 검을 뽑게 할 자격이 있지.”“고마워해야 되나?”공손천기가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백무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되지. 그나저나 나는 이 아이를 쓸 텐데 그대는 빈손으로 할 텐가?”공손천기는 편안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거면 충분해.”“과연…….”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듯했지만 공손천기의 전신에는 지금 바늘 하나 들어갈 만한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오랜만에 피가 끓어올랐던 것이다.
‘게다가…….’이놈은 무언가 달랐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그 어떤 상대들과도 전혀 다른,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백무량은 거기에서 생각을 멈췄다. 눈앞에 있는 놈은 잡생각을 하면서 상대해도 될 정도로 만만한 놈이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관객들도 많으니 실망시키면 안 되겠지?”웅웅웅―
백무량의 검이 가늘게 진동하더니 갑자기 살아 있는 잉어처럼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공손천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은 가볍게…….”백무량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점점 밝은 광채를 뿜어내다가 돌연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손천기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것은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피윳-!
공손천기의 귓불을 스치며 새하얗게 불타오르는 검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무림인들 사이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기어검술(以氣御劍術)!”검술을 한계까지 수련하게 되면 한 자루 검 속에 담긴 힘을 극한까지 뽑아 쓸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검술.
이기어검술은 그런 어검술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는 초상승의 경지였다. 그런 엄청난 것을 실제로 보게 된 무림인들은 벌써부터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이거 시작부터 사람 잡으려 드네.”공손천기는 피식 웃으며 말하다가 갑자기 몸을 뒤로 훌쩍 뒤집었다. 그러자 좀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백열하는 검이 스쳐 지나갔다.
백무량은 그 이상 공격하지 않고 검을 회수한 후 빙그레 웃었다.
“어떤가?”“뭐가?”“이 정도면 관객들 앞에서 볼거리로 제법 괜찮지 않은가? 저들에겐 교주가 도망 다니는 모습이 꽤나 통쾌하게 보이겠지.”“도망이라…… 하긴 동태 눈깔을 가진 놈들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공손천기는 흐트러진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며 씨익 웃었다.
“설마 그쪽도 그렇게 생각해?”백무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았다. 이번의 기습은 공손천기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간단한 견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화려했던 볼거리보다 소득이 적었다.
하지만 그 약간의 소득은 백무량을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심안(心眼)이 뜨였다?’이기어검술은 바로 지척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만큼이나 빠르다. 그것을 단순히 눈으로 보고 피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오로지 감각만으로 피해야 하는데 상대방은 그것보다도 오히려 반 박자 더 빠르게 반응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백무량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괴물이 아닌가?
“젠장,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삭신이 다 쑤신다.”공손천기는 팔다리를 가볍게 주물럭거리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다 작게 구시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건 이제 나도 뭔가 하나를 보여줘야겠지?”“기대하겠네.”백무량은 검을 움켜잡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몸 안의 탁기를 뽑아내며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럼 어느 걸로 보여줘야 할까나…….”공손천기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곧 악동처럼 웃었다.
“최소한 내가 움직인 만큼은 움직여줘야 공평하겠지?”그 말이 시작이었다.
백무량은 갑자기 쥐고 있던 검을 정면에 곧추세웠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검끝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닿았다.
펑-!
뒤로 주르륵 밀려나며 백무량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막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위력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장풍인가?’그런데 단순한 장풍으로 보기엔 담겨 있는 힘이 예사롭지가 않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공손천기가 뒷짐을 지고 그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백무량의 눈가에 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조금 전 상대방의 공격에는 예비동작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벌써 놀라면 섭하지. 나는 이제 시작인데.”뒷짐을 지고 있던 공손천기가 검지손가락을 몇 번 까딱거렸다. 그러자 예의 그 흉악스러운 기운이 사방에서 조여오기 시작했다.
‘흠!’백무량은 속으로 헛기침을 한 후 검끝에 기운을 모았다. 그는 같은 기술에 두 번이나 당하고 있을 바보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검끝에 모인 기운을 주변에 가볍게 뿌렸다.
퍼퍼퍼펑―!
공중에서 그가 쏘아낸 기운이 무언가와 부딪치며 몸이 크게 흔들거릴 정도의 충격이 전해져 왔다. 발을 디디고 있던 바닥이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졌다.
그제야 비로소 백무량은 이것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격공장(隔空掌)!”이것 역시 초상승의 무학이었다. 무림인들이 다시금 탄성을 지를 때. 백무량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리의 성난 호랑이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풍들 사이를 유령처럼 헤집고 들어가 공손천기를 향해 막 검을 찔러갈 때였다.
갑자기 뒤통수가 따끔거려왔다. 백무량의 안색이 변했다.
‘위험?’눈앞에 공손천기가 제자리에서 피하지 않고 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는 그 상태로…….
백무량은 이를 악물었다. 오래전부터 수없이 많은 고수들과 싸워오며 얻었던 그 감각이 계속해서 그에게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백무량은 앞으로 찔러가던 검을 그대로 옆으로 내리그었다.
치이이익―
빈 허공에 하얗게 이글거리는 검이 스쳐가자 공기 타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시에 검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콰아앙-!
바닥에 깊은 홈을 만들며 백무량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밀려나는 와중에도 백무량은 이를 악물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충격으로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던 것이다.
“어라? 그걸 막았어? 분명 안 보였을 텐데?”공손천기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곧 흥미진진한 얼굴을 해 보였다. 백무량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스멀스멀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도 분명한 색깔의 분노였다.
‘얕잡혀 보이고 있었다? 이 내가?’그랬다.
공손천기의 눈빛에는 그를 동등하게 보는 게 아니라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감정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항상 백무량이 적에게 보였던 시선이 아닌가?
뿌드득―
낮게 이를 갈던 백무량의 얼굴에 그동안의 여유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악귀처럼 변한 얼굴로 공손천기를 쏘아보며 말했다.
“미안했다. 교주. 상대를 몰라보고 내가 너무 건방을 떨었구만. 이제부터는 진지하게 해주지.”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유형화된 백색의 기운이 이글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공손천기는 백무량의 그 사나운 기세에 잠시 마뜩잖은 얼굴을 해 보였다.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결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받아줘야 했다. 그것이 상대방을 위한 배려였기 때문이다. 공손천기는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럼 나 역시 최선을 다해주지.”백무량의 굳어 있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방이 이제야 비로소 진지하게 받아주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늘 꿈꿔왔던 것 아니었나?’강자에게 죽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쁨이었다. 아쉬울 것이 없다.
늙어버린 심장이 옛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백무량이 그렇게 진심으로 검에 전신의 내력을 불어넣고 있을 때.
문득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뭐지?’백무량은 공손천기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돌려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맞는 건지 확인했다.
확인이 끝난 후 백무량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공손천기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뭐야? 뒤에 뭐가 있어?”천천히 뒤를 돌아보던 공손천기. 그 역시 조금 전 백무량과 같은 행동을 해 보였다.
아니, 그는 더 심했다. 입을 헤 하고 벌린 상태로 어버버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 용? 저거 용이야?”백무량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무림인들 정도나 되어야 간신히 보일 정도로 먼 곳에 있는 산 정상. 거기에서부터 빛의 기둥이 지상에서부터 하늘로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그 빛기둥의 중심. 그곳에서 무언가가 똬리를 틀며 느릿하게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쿠오오오―!
구름과 벼락. 그것들을 천천히 헤집고 올라가는 저것은 누가 봐도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용의 모습이 아닌가?
일순간 반야평에 있는 무인들 모두의 시선이 공손천기와 백무량이 아닌 저곳으로 향했다. 그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넋 빠진 얼굴을 한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승천하는 용이라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때 반야평에 모여 있던 무인들의 모습에 변화가 찾아왔다. 몇 명의 정도맹에 속한 고수들이 용이 승천했던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공손천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가슴에 찬바람이 일었다. 저곳은 그가 잘 알고 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악중패의 무덤이 있는 흑치골. 그곳에서 용이 승천한 것이다.
‘대체 거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제자야.’초류향의 얼굴을 떠올리자 공손천기는 일순 마음이 급해졌다. 때문에 평정심을 잃고 자신도 모르게 지시를 내렸다.
“저놈들을 못 가게 막아라.”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자마자 공손천기는 아차 했다.
그때까지 멍청하게 굳어 있던 다른 녀석들이 일제히 정신을 차리고 마치 서로 짠 것처럼 흑치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정도맹의 인원들이 일제히 저곳을 향해 몰리고 있었다.
공손천기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상황이 차츰 그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젠장! 한 놈도 저곳으로 보내지 마라! 길목을 막아!”“명(命)!”확실히 천마신교의 무인들은 정예였다.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길목을 단단히 틀어막고 버텨 섰던 것이다.
이곳 반야평의 특성상 흑치골에서 내려오는 길과 넓은 공터가 이어지는 좁은 입구를 막아버리면 지나가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 말은 반대로 서로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망할!’공손천기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는 그 순간 정도맹의 고수들과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고 비명이 난무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공손천기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