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38)
제38화 마지막 가르침(2013.05.23.)
초류향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초류향은 작은 나비가 되어 있었다.
‘뭐야, 이건?’이상한 꿈이었다. 자색의 구슬을 만지고 정신을 잃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고작 이런 괴상한 꿈이나 꾸고 있다니. 초류향이 속으로 작게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장면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새하얀 날개를 가진 작은 나비. 초류향은 날개를 퍼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익숙한 얼굴들도 몇몇 보였다.
‘스승님!’공손천기. 천마신교의 교주인 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초류향. 하얀 날개의 작은 나비는 반가운 마음에 공손천기에게 날아가려다가 중간에서 멈칫했다.
‘스승님…….’그의 스승님은 지금 크게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 영감.”공손천기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뒤에 서 있던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진짜로 원하던 게 이런 거였냐?”단 한 번의 격돌. 그 부딪침으로 인해 단번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젊은 무인들의 피가 반야평에 흘러내렸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쉼 없는 악다구니가 이곳에 흐르는 소리의 전부였다. 공손천기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광경.
“대답해!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야!”백무량은 공손천기의 일갈에도 표정 변화 없이 진중한 얼굴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며 입을 열었다.
“악(惡)을 처단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피해는 불가피한 일이지. 게다가 저들 모두가 이미 각오한 일이다.”“뭐? 악?”“너희 마교는 독사같이 유해한 놈들이지. 네놈들을 처단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피해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공손천기는 웃었다. 입꼬리만 슬쩍 올라가는 웃음.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지금 우리더러 독사라고 했냐?”“물론. 너희 마교는 세상을 위해 없어져야 할 해로운 존재다. 알고 있지 않았나?”공손천기는 웃었다. 저놈은 지금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자꾸 웃음만 나왔다.
“크, 크큭. 크하하하!”한참 동안 하늘을 보며 웃던 공손천기는 돌연 웃음을 뚝 멈추고 입을 열었다.
“구제불능의 고집불통 영감탱이가 우리 사부 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다. 재밌었다.”말을 하는 공손천기의 전신에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핏빛의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우 난폭했으며 농도가 짙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진짜를 보여주지. 영광으로 알아라.”말을 하며 공손천기는 오른쪽 팔목에 차고 있던 검은색의 팔찌를 매만졌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풀어내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나도 나를 제대로 제어할 자신이 없으니까…… 살고 싶으면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그 말은 모욕적이군.”“충고다, 멍청아.”푸아악-
백무량은 갑자기 사나워진 상대방의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 정면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심상치 않았다. 공손천기의 반백의 머리가 점차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공손천기의 주름투성이 육체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점점 젊고 싱싱하게 변해갔다.
투드득-
근육들이 빠른 속도로 찢어졌다가 재생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뼈와 뼈들도 빠르게 맞춰져갔다. 엄청난 속도로 최전성기 때의 육체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저 광경은 전설로만 존재한다던 반로환동(返老還童:노인이 다시 어린아이로 변함.)이 아닌가?
“후흐…….”백무량이 넋을 놓고 있거나 말거나 공손천기는 입으로 깊은 숨을 토해내며 히죽 웃었다.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오랜만이었다. 그동안 힘을 억눌러 오느라 고생깨나 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이렇게 해방하고 나니 정말 살 것 같았다. 어느새 공손천기의 전신에서는 막강한 힘이 터질듯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악이라고 했었지? 좋아. 그럼 이제부터 진짜 악마가 뭔지 보여주마.”“…….”백무량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 보니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마교가 그토록 외부에서 수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멸문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힘. 종교라든가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실질적인 무력. 그 모든 힘의 정점에 서 있는 것.
‘수라환경!’저것은 분명 오로지 교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그 절대의 무공. 그것의 일부일 것이다.
“우선 한 방.”공손천기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후 주먹을 가볍게 쥐고 정면에 있는 백무량을 향해서 허공을 짧게 끊어 쳤다. 너무도 헐렁한 몸짓.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뻐엉-!
잔뜩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며 백무량을 덮쳐갔던 것이다.
‘이런!’백무량은 이를 악물고 덮쳐오는 기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백색의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나며 백무량의 전면을 완벽히 막아섰다. 무당파의 자랑이자 최강의 검법. 태극무결검법. 그것을 펼친 것이다. 덮쳐오던 기운과 백색의 검광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쿠콰콰쾅-!
땅거죽이 크게 일어나며 무언가가 빠르게 뒤로 튕겨져 나갔다. 넝마조각처럼 구겨져 날아가 버린 것. 그것은 놀랍게도 백무량이었다.
단 한 방. 단 한 방으로 백무량을 휴지조각처럼 날려버린 것이다. 실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악운이 강하군.”공손천기는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낸 채 기절해버린 백무량을 슬쩍 본 다음. 고개를 돌려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응시했다. 저쪽은 아직도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피를 보자 온몸이 흥분으로 차츰 떨리기 시작했다. 제어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힘. 그것 때문에 전신이 미칠 듯이 피를 갈구하는 것이다.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질 것 같으냐.’푸스스-
공손천기의 몸에서 핏빛 기운이 잦아들고 점차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그가 이성을 잃고 날뛰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게 될 테니까.
‘나는 공손천기다.’공손천기는 속으로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걸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마치 계단을 오르듯이 빈 허공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허, 허공답보(虛空踏步)!”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몇몇의 무인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공손천기는 앞을 막고 있던 수많은 무인들을 그렇게 단숨에 뛰어넘어 격돌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바로 위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수많은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근-
공손천기는 이를 악물고 웃었다. 사방에 가득한 비릿한 피 냄새가 향긋하게 느껴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적들의 표정 역시 보기 좋았다. 서서히 흥분으로 머릿속이 미쳐가는 게 느껴지자 공손천기는 서둘렀다.
“백무량은 나에게 졌다. 저쪽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나뒹굴고 있지. 너희들도 죽고 싶지 않으면 사라져라.”좋게, 좋게 해결하고 싶었다. 되도록 이성이라는 게 남아 있을 때.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항상 생각한 대로만 풀리진 않는 법이다.
“우리가 왜 마두 따위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거냐!”“맞소!”정도맹 놈들 중에 상황파악 못하는 놈들이 주변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겁을 집어먹고 있으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멍청한 놈들…….’공손천기가 눈살을 찌푸릴 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월인도법이 저곳에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마교 놈들이 이렇게 못 가게 하려고 필사적이지.”이것이 결정타였다. 월인도법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은 굉장했으니까. 그때까지 공손천기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모습에 주눅 들어 있던 정도맹의 무인들 전체가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바보 같은 놈들이다.”이제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쓰는 수밖에는. 가장 확실한 공포. 공손천기는 그것을 지금 저놈들에게 심어줄 심산이었다.
“난 분명 경고했다. 이 멍청이들아.”숨을 골랐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역한 피 냄새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아니, 사실은 미치도록 기분이 좋아지려고 했다.
‘젠장!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시간이 없었다. 공손천기는 아예 호흡을 멈추고 오른쪽 손바닥을 펼쳐 하늘을 보게 하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둥근 구체가 그곳에 맺혔다.
핏방울처럼 둥근 구체. 밑에 있던 무인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 공손천기가 다시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피의 비가 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라환경 제3초식.’폭마혈우(瀑魔血雨). 파괴의 붉은 비가 지상으로 사정없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광경이 초류향이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파아아앗-!
“어……?”“깨어났느냐?”“……예.”“다행이다. 너무 늦지 않게 깨어났구나.”이게 무슨 뜻일까? 초류향은 누운 상태로 두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때 갑자기 머리가 띵해왔다.
그러고 보니 온몸이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뜨거웠다. 초류향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단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헐떡거렸다.
‘그런데 좀 전에 그건 뭐였지?’뭐였을까? 조금 전에 본 것은 단순히 꿈? 그런데 그것을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사실적이지 않았던가?
‘나중에 공손천기 스승님을 만나게 되면 여쭈어봐야겠다.’열이 올라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초류향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어날 수 있겠느냐?”“예.”“그럼 미안하지만 잠깐 일어나 보겠느냐? 너에게 꼭 보여줘야 할 것이 있구나.”초류향은 스승님의 말소리가 왠지 먼 곳에서 들려서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초류향은 이내 제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스, 스승님 이건…….”조기천. 그는 지금 은색의 나무넝쿨에 온몸을 칭칭 감싸인 채 얼굴만 내놓은 상태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대체…….”어떻게 된 것일까? 왜 스승님의 몸에서 진법에서만 드러나는 특징적인 모습이 보이는 것일까?
“이곳은 내가 만든 진법의 안이다.”말을 끊고 잠시 뜸을 들이던 조기천은 특유의 담담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진법의 핵이 되었다.”진법의 핵? 초류향은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대체 왜 이런 결정을 하신 겁니까, 스승님?”보통 진법의 핵은 주변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응집되는 곳이라 제일 예민하고 위험한 부분이다. 때문에 응집력이 강한 보석을 집어넣어서 그 힘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생명체. 그것도 인간이 그 보석의 역할을 대신하다니? 이건 너무 위험한 발상이었다. 계산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진법의 압력에 의해서 온몸이 터져나가서 즉사하기 때문이다.
목숨이 몇 개가 있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시도. 설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심각했다. 인간의 육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진법의 힘을 버텨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보석으로 진법을 만들고, 그것을 조절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조기천은 특유의 담담한 시선으로 화난 얼굴의 제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이제 이곳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구나.”조기천의 말에 초류향은 순간 머리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진법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스승님이셨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진법을 만들어야 했다? 이건 무턱대고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적이 오고 있구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버텨낼 자신이 없다.”초류향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적이라니? 그리고 버틴다니? 그게 다 무슨 말인가?
“거의 다 왔구나.”쿠르릉-
갑자기 지면이 크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조기천이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잘 보아두거라. 너에게 내리는 내 마지막 가르침이다.”쿠콰콰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벽 너머로 악귀 같은 얼굴을 한 무당파의 고수들이 사납게 들이닥쳤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