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44)
제44화 천마신교의 작은 주인(2013.06.13.)
남만이라는 곳은 사시사철 무척 더운 지역이었다. 사방에 파초선처럼 큰 잎을 지닌 남국의 나무들이 가득했으며 산에는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일 년 내내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풍요로운 땅.
하지만 이 땅은 사람의 발길을 완강히 거부했다. 곳곳에 온갖 사나운 맹수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녔고, 사방에 물리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독충들이 즐비했다.
신에게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은 이 땅에는 오직 그들만이 존재했다.
남만야수문. 이 땅은 오로지 신에게 선택받은 그들만을 위한 땅이었다.
“오랜만에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구나.”“그렇습니까?”남만야수문의 주인. 당대의 야수왕이라 칭해지는 남만의 신.
구마벽(九魔劈).
그는 제왕의 기세를 내뿜으며 그의 첫째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 외출이 상당히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너답지 않게 제법 들떠 있구나.”구휘.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공손천기와 백무량의 결전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남들은 보지 못했던 것을 구휘는 똑똑히 보고 왔다.
확실히 그때 그 장면 하나하나는 좋은 영양분이 되어 구휘의 영혼을 살찌웠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다.
“중원의 역량을 보았습니다.”앞으로의 일정을 짜는 데 있어 이번 경험은 실로 좋은 척도가 될 수 있었다.
남만야수문의 야망. 그것을 이루는 데에 이보다 도움이 되는 건 없었으니까.
“그래, 크기는 가늠이 되더냐?”구마벽이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묻자 구휘는 슬며시 웃었다.
“예. 보였습니다.”공손천기와 백무량. 천하의 패권을 놓고 싸웠던 두 명의 초인. 그들의 무력은 확실히 두 눈에 새겼다.
서로가 마주 보며 내뱉던 거친 숨결과 땀으로 번들거리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단 한 장면도 구휘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은 나왔느냐?”구마벽의 질문에 구휘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이자 남만의 영원히 지지 않는 태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과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망설임이 엿보였다.
“숨기려 할 필요 없다. 네가 본 그대로를 말해라.”구휘,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다 조금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시간을 저에게 양보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세대에서는 도저히 본 문의 꿈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그랬다. 백무량은 가능하겠지만 공손천기. 그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것이 구휘가 내린 결론.
헌데 구휘의 말을 들은 구마벽은 의외로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더냐?”“예. 백무량은 모르겠지만 공손천기는 확실히 어렵습니다.”어렵다. 그 말에 구마벽은 턱을 괴며 그의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별로 화는 나지 않았다. 그 역시 어느 정도 짐작했기 때문이다.
남만야수문은 그 환경의 특이함 때문인지 대대로 무시무시한 재능을 지닌 후계자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배출되어왔다.
그런 사납고 쟁쟁한 후계자들 사이에서도 구휘의 재능은 진정 각별했다. 그의 천재성은 전례가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가망이 없다는 건가.’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구마벽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공손천기의 이름은 이 험지인 남만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거리상 중원에 있는 정도맹보다는 천마신교가 남만에 조금은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남만은 천마신교의 힘을 잘 알았다. 그들이 내부에 꾹꾹 억눌러놓고 있는 그 거대한 힘을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아무리 천마신교에 고수들이 즐비하다지만 구마벽을 긴장시키는 것은 역시 단 한 명뿐이다.
교주.
아주 오래전에 한 번 스치듯이 보았을 뿐이지만 교주가 뿜어내던 이질적인 분위기는 구마벽의 기억 속에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탁―
구마벽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에 비스듬히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 걸어 봐도 되겠느냐? 본 문의 미래를.”남만야수문의 미래. 그들의 오래 꿈. 그것은 바로 중원 진출이다. 구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버지의 형형한 눈빛을 맞이하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직 저만이 본문의 오랜 비원(悲願: 비장한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담담한 음성. 구휘는 자신 있었다. 적어도 그의 세대에서는 자신을 넘어설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구마벽 역시 확실히 자신의 아들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들은 분명 괴물이었으니까.
‘허나 세상에는 괴물이 많지.’그랬다. 세상은 지나치게 넓었다. 그 점이 조금 우려스러운 구마벽이었다.
* * *
‘차력이라니…….’초류향은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많은 기대를 하고 있어서였는지 그만큼 반발력 역시 컸다.
“괜찮냐?”공손천기는 빙글거리며 웃은 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초류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초류향은 가까스로 참았다. 그저 달리는 마차 밖을 응시하며 공허한 눈빛을 해 보일 뿐이었다.
공손천기 스승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비급서를 자신에게 준 것일까? 초류향은 오래전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차력사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에 그것은 분명 새로운 세계이긴 했다. 기합 한 번에 사람 머리통보다 큰 바위를 손으로 부수고, 불덩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엄청난 사람들.
어린아이의 눈에는 정말이지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것으로는 절대 무당파를 상대할 수 없었다.
초류향이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마차 벽에 기대어 손가락으로 문 틈새만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 음울한 모습에 공손천기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핫! 우리 제자가 실망이 아주 큰 모양이구나.”“…….”실망을 안 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저렇게 웃으니 결국 초류향도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허탈한 얼굴로 힘없이 웃은 것이다. 그 기괴한 모습에 공손천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다시 한 번 숨넘어갈 듯 배를 부여잡고 끅끅 웃었다.
그렇게 얼마를 웃고 있었을까? 공손천기는 가까스로 진정한 얼굴로 그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에게는 맹수와 같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없지.”“…….”“그랬기에 사람들은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도구들은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무기’가 되었으며, 그 무기는 점차 살상에 유리해지도록 발전되어왔다.”“……?”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초류향이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자 공손천기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차력사가 되는 방법’ 이후로 월인도법을 읽지 않았던 모양이구나.”“……예.”그랬다. 그 이후로 전혀 읽지 않았다. 실망감에 몸서리치며 그것을 상자에 넣어 고이 모셔두었을 뿐이다.
“월인도법의 실체는 진정 경이롭다. 그건 내가 보증하마. 네가 실망했던 그 다음부터 놈의 진짜 모습이 나타나지. 그러니 너무 실망만 하고 있지 말거라.”초류향은 고개를 숙였다. 스승의 자상한 음성에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야.”“예, 스승님.”“조기천, 그 친구가 죽은 이후 넌 너무 조급해하고 있다. 허나 네가 원하는 것은 성급하게 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조금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지. 그렇지 않느냐?”이번에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초류향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를 반성할 따름이었다.
“곧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오늘은 일단 푹 쉬거라.”“……알겠습니다.”조금 부끄러워졌다. 초류향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마차 문 틈새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 * *
사락―
초류향은 월인도법을 다시 펼쳐 들었다. 이제 내일이면 십만대산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천하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인 십만대산. 천마신교가 있는 땅이다.
그 내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디에 주요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지 알려진 게 거의 없는 곳.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는 곳이 바로 천마신교다.
하지만 지금의 초류향에게는 그러한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전신의 모든 신경이 월인도법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스승님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덮었던 다음 장부터 나왔다.
‘인간의 몸 자체를 무기로 만든다라…….’이건 제법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몸뚱이 자체가 무기가 된다.
그 무엇에도 부러지지 않고, 다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는 절대의 병기. 육체를 한계 저 너머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련(練).’총 서른 자(字:글자)에 이르는 구결로 이루어진 월인도법의 제일 첫 부분은 련. 련에서부터 차력은 시작되는 것이다. 초류향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월인도법에 빠져들어 갔다.
* * *
“도착했다. 내려보거라.”“…….”초류향은 피곤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그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얼어버렸다.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산. 그것을 보는 순간 이곳이 십만대산인 것을 바로 알았다.
“여기가 내 집이다. 좋아 보이지?”초류향은 입을 열어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거렸다.
십만대산. 그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요새였다. 눈으로는 그 크기가 짐작도 되지 않는 산 전체를 높은 성벽들이 둘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있었다. 초류향의 전면. 그곳에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엄청난 크기의 붉은 대문.
‘혈뢰문(血雷門).’이것이 그 유명한 혈뢰문이다. 천마신교를 습격해왔던 수많은 적들의 피가 그대로 말라붙어서 붉게 변해버렸다는 그 문. 천마신교 피의 역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는 증표였다.
그 혈뢰문의 제일 꼭대기. 그곳에는 굵고 힘 있는 필체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천마신교(天魔神敎) 총본타(總本他)』
공손천기는 아직까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제자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며 말했다.
“여기가 바로 강호에서 십만대산이라 부르는 곳이다. 그리고 앞으로 네가 머물게 될 곳이기도 하지. 어떠하냐?”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데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초류향이 대답할 말을 찾고 있을 때. 눈앞에서 거대한 혈뢰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긍―
뻑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쿠우웅―!
완전히 문이 열리자 그 안의 정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초류향은 다시금 얼어붙었다. 십만대산이 강호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진짜 이유. 그 실체가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혈뢰문 안쪽.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번거로운 일을 했군.”공손천기는 웃으며 천천히 혈뢰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문 안에 들어서자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천마앙복(天魔仰伏)!”산 전체가 떨어 울리는 음성. 하지만 그것에 화답하는 목소리는 앞의 것보다 더욱 컸다.
“신교천하(新敎天下)!”천지가 뒤집어질 듯 우렁찬 소리들.
쿵―!
동시에 대지를 떨어 울리는 거대한 발 구름에 초류향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길 양옆으로 끝도 없이 도열해 있는 무인들이 일제히 예를 갖춰 공손천기와 초류향을 맞이하고 있던 것이다.
“이거 오랜만이라고 영감들이 신경을 좀 써준 모양이네.”공손천기는 히죽 웃으며 태연하게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환대는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허나 초류향은 아니었다. 이미 비슷한 것을 한 번 경험해보았지만 이번 것은 그 규모부터가 달랐다. 천마신교의 십대무력단체 중, 외부에 나가 있는 세 개의 단체를 제외한 전부가 나온 것이다.
오로지 교주와, 그 후계자를 위해서. 전장에서 뒹굴던 이들이 내뿜는 패기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의 박력. 머리가 하얗게 비워져갔다.
[쫄지 마라. 이들은 네 편이다.]공손천기의 장난스러운 전음을 듣자 초류향은 겨우 정신을 추슬렀다. 그리고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평소의 덤덤한 표정을 해 보였다.‘그래. 이들은 나의 적이 아니다.’적은 무당파였다. 이들은 그의 아군이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 초류향은 그렇게 되새김질하며 앞서 가고 있는 공손천기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걷던 공손천기가 어느 지점쯤에 이르러 우뚝 멈춰 섰다. 그들을 정면에서부터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인원. 그들 중에 제일 선두에 있던 자가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교주님.”“그래. 나 없는 동안 내총관이 수고가 많았겠어.”“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내총관이라 불리는 굵은 눈썹에 빡빡머리의 덩치 큰 중년인. 그를 시작으로 뒤에 서 있던 모두가 교주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모두의 시선이 초류향을 향했다. 하나 같이 이글거리는 시선들이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공손천기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어버렸다.
“나 원, 참. 늙은이들하고는…… 소개가 늦었다. 이 녀석이 내 제자다.”공손천기가 말을 하며 초류향을 앞세우자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총관 강창이 소공자님을 뵙습니다!”“외총관 우길이 소공자님을 뵙니다!”“호교원주 장각이 소공자님을 뵈오!”전부 우렁우렁한 목소리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사람들이 인사를 해왔지만 그들의 음성에는 한결같이 하나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기쁨.
초류향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과 음성에는 온통 그것만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 정도였던가?’천마신교의 후계자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피부로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의 기대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변한 모양이었다.
“초류향이라 합니다.”“오오!”그냥 대답만 했을 뿐인데도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동안 천마신교의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 이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해왔는지 초류향은 몰랐다.
이들의 이런 극적인 반응은 그간의 노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쯧, 호들갑스럽기는…… 다들 일이나 하러 가. 나와 이 아이는 좀 쉬어야겠으니까. 여기 나와 있는 아이들도 다 쉬게 해주고.”“알겠습니다.”내총관이 지휘해서 사람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을 보며 공손천기는 입을 열었다.
“처음 봐서 넌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전부 유능한 녀석들이다. 난 운이 좋은 편이지.”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도 유능해 보입니다.”저 많은 인원들을 특별한 소란 없이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는 능력 하며, 신속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들은 저들이 가진 능력을 단편적이나마 잘 보여주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공손천기는 초류향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부터 이곳에서 너를 도울 사람들은 네가 직접 거둬라.”“무슨 말씀이십니까?”“앞으로 너의 목숨을 책임지고 지켜줄 호위무사를 구하란 말이다. 내 말은.”“…….”호위무사?
“내가 골라줄 수도 있지만 그건 내 사람이지 네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네 사람을 골라보거라. 그리고 그놈에게 목숨을 맡겨보아라.”목숨을 맡긴다? 무슨 뜻일까? 초류향이 안경을 매만지며 진지한 얼굴을 해 보였다.
“너도 알겠지만 강호란 곳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다. 이런 험한 곳에서 너의 등을 지켜주는 놈의 존재는 엄청 중요하지. 특히 지금처럼 약할 때는.”맞는 말이었다. 헌데 어떻게 사람을 고르지? 초류향의 얼굴에 신중한 기색이 어리자 공손천기가 입을 열었다.
“뭐, 그건 차차 알아서 하도록 하고…… 월인도법은 좀 보았느냐?”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더냐?”“……어렵습니다.”“그렇겠지.”공손천기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조언을 좀 해줄까?”바라던 바였다. 초류향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스승을 응시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공손천기는 턱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때로는 모든 것을 쉽게 바라볼 필요가 있지. 진리라는 것은 의외로 단순한 놈이거든.”쉽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대체 어떻게? 하지만 조언은 거기까지였다. 공손천기는 묘한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일단 네가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마. 거기 가서 생각해보거라.”공손천기의 교육방식. 그것은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던 조기천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초류향은 머릿속으로 공손천기의 조언을 곱씹으며 서둘러 그를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은 굉장히 높은 곳에 있어서 계단을 오르다 지칠 때쯤에야 나타났다.
잘 꾸며진 정원에 작은 규모의 인공 연못도 있는 후원이었다. 인공 연못 중앙에는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단조롭지도 않은 느낌. 하지만 그래서인지 이 정원에서는 주인 된 사람의 높은 품격이 더욱 잘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저기 보이는 곳이 앞으로 네가 묵을 곳이다.”와룡각. 조그마한 서재가 딸려 있는 별채였다. 초류향이 문을 열고 와룡각 안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방에 기품 있는 가구들이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공손천기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잠시 영감쟁이들 좀 보고 오마. 다녀와서 밥이나 같이 먹자.”“알겠습니다.”“뭐 필요한 게 있으면 저 줄을 당겨 보거라. 도움을 줄 아이들이 올 게다.”“예.”공손천기가 밖으로 사라지고 난 후 초류향은 다시 후원으로 나왔다. 처음 오는 곳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천천히 후원을 둘러보며 월인도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지?’초류향이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을 본 순간 초류향은 얼어붙었다.
화려한 차림의 소녀. 옅은 금발에 취옥(翠玉:에메랄드)빛 신비한 눈동자. 소녀는 초류향을 똑바로 응시하며 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누구세요?”이게 그녀와 초류향의 첫 만남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