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46)
제46화 아빠의 마음(2013.06.20.)
“아빠.”“응.”“난 왜 엄마가 없어요?”딸을 무릎에 앉힌 상태로 정자에 앉아 함께 호수를 바라보던 공손천기는 아주 잠깐이지만 멈칫했다.
그리고 어린 딸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거두고 공손천기는 잠시 고민했다. 아이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핵심을 찌르곤 한다.
그러나 이럴 때에 절대 당황해선 안 된다. 더욱이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을 돌려서도 안 된다. 공손천기는 곧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슬쩍 웃었다.
“딸.”“네, 아빠.”“딸은 엄마가 없어서 불편해?”공손아리는 잠깐 고민했다. 불편하다? 어딘가가 남들과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불편한 것은 잘 모르겠다. 한참을 갸우뚱거리던 공손아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애초에 엄마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니 그것이 있고 없고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럼 친구들이 그걸로 뭐라고 해?”“…….”공손아리는 아빠의 별 뜻 없는 질문에 잠시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거렸다. 그 모습에 공손천기는 순간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부모로서 갖는 그런 종류의 예감. 공손천기는 재빨리 무릎에 앉혀놨던 딸을 번쩍 들어 올려 얼굴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딸의 아름다운 벽안(碧眼:푸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딸.”“네, 아빠.”“아빠가 거짓말은 어떤 거라고 했지?”공손아리는 금세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자리…….”어릴 때부터 공손아리는 잠자리를 유달리 무서워했다. 잠자리 특유의 복안(複眼:겹눈. 낱눈이 여러 개가 벌집모양으로 뭉쳐 있는 형태.)을 무서워했던 것이다.
“거짓말을 하면 꿈에 잠자리 백 마리가 나타난다고 했지?”“네…….”“그럼 이제부터 솔직하게 말해야 해.”어린 공손아리는 옅은 복숭앗빛 감도는 볼살이 살짝 출렁일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손천기는 그런 공손아리에게 직설적으로 질문을 날렸다.
“누가 우리 딸 괴롭혀?”공손천기의 질문에 공손아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천천히 마른침을 삼켰다가 공손천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쯤에야 입을 열었다.
“아빠.”“응, 말해봐.”“……나 도깨비예요?”“……뭐?”“우리 엄마가 도깨비였어요?”도깨비? 공손천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가장 우려하고 있던 일. 그것이 드디어 눈앞에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친구들이 그래?”공손아리는 다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천기의 얼굴이 차츰 딱딱하게 굳어가자 공손아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보모 아주머니가 아빠한테 이런 말씀 드리면 분명 마음 아파하실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거짓말하려고 했어요. 미안해요, 아빠.”공손천기는 자신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는 딸의 작고 보드라운 손길을 깨닫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목 끝까지 차올랐던 무언가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렇다. 이건 애당초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정직하다. 그리고 꾸밈없이 솔직하다. 그것은 비단 그의 딸인 공손아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눈으로 보기엔 공손아리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외모는 충분히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빌어먹을.’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마음으로는 아니다.
오랜 시간 수행하고 단련을 거듭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공손천기였지만 이런 것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인 모양이다.
“괜찮아요, 아빠?”딸의 걱정스러운 음성에도 공손천기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지금 입을 열면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던 머릿속은 금세 정리되었다.
‘차라리 잘되었다.’이건 기회였다. 한 방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 공손천기는 평소의 느슨한 표정으로 돌아가 피식 웃었다.
“흐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어쩌면 정말로 네 엄마는 인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네?”공손아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공손천기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나는 아직도 인간들 중에서 그렇게 예쁜 여자가 있다고 믿을 수가 없거든. 그러니 분명 인간이 아닐 거다, 네 엄마는.”공손천기의 얼굴을 보던 공손아리가 진지한 얼굴로 되물어보았다.
“그럼 정말 엄마는 예쁜 도깨비였어요?”딸의 심각한 얼굴을 바라보며 공손천기는 속으로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딸은 아빠 눈이 그렇게 낮아 보여?”공손아리를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아빠는 지상최강의 남자였다. 세상과도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당당하고 거침없는 사람.
공손아리가 그의 아버지를 잠시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공손천기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속삭였다.
“그 꼬맹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이건 비밀이지만 특별히 우리 딸에게만 말해주마.”“뭔데요?”공손아리도 덩달아 작게 목소리를 줄여서 묻자 공손천기는 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네 엄마는 선녀였단다.”“예?”공손아리가 큰 눈을 깜빡거릴 때 공손천기가 손가락을 하늘 위로 향하며 말했다.
“저쪽 하늘궁전에서 사는 선녀 몰라?”공손아리는 아빠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다. 헌데 그러기도 전에 공손천기가 먼저 그녀의 머리를 헝클며 말했다.
“사람들은 말이다. 자신과 다른 걸 본능적으로 무서워해. 그리고 특별한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깎아내리려고만 하지. 참 속이 좁은 놈들이지?”“…….”“하지만 걱정 마, 딸. 세상엔 아빠처럼 눈이 높은 놈들이 가끔 있어. 그런 놈을 만나면 너도 저절로 알게 될 거다. 진짜배기가 뭔지…… 쭉정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마. 알겠지?”공손아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아버지의 손을 꼬옥 쥐었다.
* * *
초류향은 공손아리를 바라보았다. 공손아리도 초류향을 바라보았다. 둘은 그렇게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잠시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본 것이다. 고개를 먼저 돌린 것은 의외로 공손아리였다.
‘기분이 이상해.’그녀는 아버지인 공손천기를 제외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누군가와 눈을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전부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면 눈을 피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들이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자 상대방에게 속마음이 읽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이름이 뭐예요?”공손아리는 다소 차분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재차 물었다. 시선이 엇갈리자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이다.
“…….”초류향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상태로 공손아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초류향.”엄승도에게 분명 천마신교의 그 누구에게도 존대할 필요가 없다고 들었지만 상대방은 스승님의 딸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저도 모르게 말이 짧아졌다. 다행히 공손아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류향, 류향이라…… 예쁜 이름이네요.”공손아리는 연신 초류향의 이름을 입 안에서 되새김질하며 배시시 웃었다. 초류향은 그 모습에 고개를 홱 돌렸다.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조금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짝-!
웃고 있던 공손아리가 갑자기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 그쪽이 아빠 제자가 되시는 분? 맞죠?”초류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손아리가 감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공손아리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인 공손천기가 그동안 제자를 받으려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눈이 너무 높으셨지.’공손천기는 사람 보는 눈이 높았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런 아버지가 선택한 소년이 눈앞에 있었다. 공손아리는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초류향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에 초류향도 흥미가 동했다. 호흡을 고르고 정관법을 사용한 것이다.
* * *
“그 할망구가 여길 찾아왔다고?”“예, 교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영락전에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공손천기.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사람들을 한번 쓸어 보았다.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그 할멈을 꼭 만나야 하나?”“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교주님.”팔대호법 중 한 명인 주상산이 곧장 대답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주의 편. 공손천기의 말 속에 이미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 다분했기에 주상산 역시 그의 말을 거든 것이다.
하지만 보고를 올리고 있는 내총관 강창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빠르게 말했다.
“본 교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신녀(神女)님이십니다. 노구를 이끌고 몸소 찾아오셨으니 한번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교주님 앞에서 신녀라니? 고작해야 무녀(巫女) 따위겠지. 착각하지 마라, 강창.”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규호 호법. 우 호법이 엄하게 말을 내뱉자 강창은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예예. 제가 실수했습니다. 본 교에 남아 있는 최후의 무녀이십니다. 교주님,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만나주셨으면 합니다.”공손천기는 강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사업 수완이 좋고 이래저래 뛰어난 녀석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관례나 관습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단점이 있었다.
허나 아무리 강창이 고지식한 면이 있어도 그렇지 이 정도까지 상관의 기분을 언짢게 할 녀석이 아니다.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또 예언인가 뭔가를 한 건가, 그 요사스러운 할망구가?”“…….”강창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 곤란해하는 모습에 공손천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할망구가 이번에는 내 목숨 가지고 예언이라도 한 모양이구만. 네가 이러는 걸 보니까.”정곡을 찌른 것일까. 강창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은 그저 교주님의 안위를 염려할 따름입니다. 신…… 아니, 무녀의 예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교주는 심드렁한 얼굴을 해 보였다.
“여태껏 운이 좋았던 모양이군.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내 목숨을 가지고 왈가왈부했다면 말도 안 되는 도박을 한 셈이지. 차라리 잘되었다. 멍청한 할망구.”허나 교주의 말과는 다르게 이 대전 안에 모여 있는 모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무녀의 신탁이 그동안 얼마나 높은 적중률을 보였는지. 그녀의 힘이나 위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 예언만큼은 인정해왔던 터였다.
이윽고 그들의 얼굴에 한결같이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여기 모여 있는 인물들 모두가 교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다.
역대 최강의 교주. 거기에 더해 공손천기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뭐야? 다들 그 할망구의 헛소리를 믿는 거야?”“……한번 만나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주님.”주상산조차도 조심스럽게 태도를 바꾸자 공손천기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쓸데없는 예언 따위 믿지 마. 나 안 죽는다. 이렇게 건강한 거 안 보여?”교주가 직접 팔뚝을 걷어서 젊은이의 그것처럼 울끈불끈한 근육을 보여주자 우호법과 주상산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교주님. 저희 진지합니다. 그 할망구가 정말로 그런 예언을 했다면 이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쯧, 너희는 걱정이 너무 많아. 재미없군.”공손천기는 소매를 내리며 심드렁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대전을 나가려는 것이다. 그 모습에 강창이 서둘러 말했다.
“교주님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다지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무녀를 한번 만나주십시오. 해결 방도가 있다고 합니다.”강창이 애끓는 마음으로 읍소하자 공손천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걸 싫어하고 번거로운 일을 병적으로 멀리하는 공손천기였지만 수하들을 진심으로 걱정시키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는 그였다.
그리고 이제 와 문득 생각해보니 슬슬 그 할망구와 담판을 짓긴 지어야 했다. 번거롭다고 일을 너무 뒤로 미뤄둔 것이다.
“좋아. 한번 만나주지.”“감사합니다, 교주님.”“하지만 그 예언 따위를 믿어서가 아니야. 나는 그런 말은 믿지 않거든. 이번에 만나려는 것은 그 할망구가 다시는 이런 사특한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알겠습니다.”강찬은 이유야 어찌 되었든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맨 처음 무녀의 예언을 듣자마자 그 해결 방법을 알아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무녀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교주가 직접 찾아와야만 그 방법을 알려준다고 고집을 피웠던 것이다. 그랬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교주님을 만나 간청드린 것이다.
“우 호법.”“예, 교주님.”“주 호법과 함께 내 제자 녀석 즉위식 준비나 제대로 해줘. 이번 년의 제일 중요한 행사니까. 차질 없도록 하고. 내총관은 강호 정세에 대한 보고서를 짜오도록 해.”“알겠습니다.”공손천기는 그렇게 명령을 내린 후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영락전을 향해 걸어갔다. 천마신교는 앞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집단이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신(神)이라는 불명확한 존재를 믿어왔다.
태양과 달. 천마라는 걸출한 교주가 등장하기 전까지 천마신교의 정식 명칭은 일월신교(日月神敎)였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달을 믿는 종교였던 것이다.
허나 천마가 등장한 이후로 모든 교리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그들을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한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일월신교에는 커다란 모순이 생겼다.
일월신교는 오래전부터 신의 대리자라는 교주가 존재했었다. 허나 그와 마찬가지의 막대한 권력을 가지는 존재가 있었다.
절대적인 힘의 상징인 태양에 해당하는 것이 교주였고, 신의 목소리를 전파하는 달의 상징, 그것이 바로 신녀(神女)라는 존재였다.
그녀는 매우 특별했다. 매해 신녀는 신탁(神託)을 받아 중요한 예언을 하고 해마다 두 번씩 커다란 제사를 지내왔다.
그랬기에 교주와 비견되는 절대 권력을 가지는 게 신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마가 교주가 되면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천마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태양과 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믿는 종교로 신교를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본인 자체가 살아있는 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수십 배의 적들을 몰아냈고, 낙원이라 불리는 십만대산을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월신교는 그때부터 천마신교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덕분에 신녀라는 존재가 공중에 붕 떠버리게 된 것이다. 허나 이것에 대해 지난 몇 백 년 동안은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공손천기가 교주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손천기가 교주가 되면서부터 이 상식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신은 나 하나로 족해. 두 명은 필요 없지.”교주의 즉위식. 교주가 되던 그때 공손천기는 수많은 교도들 앞에서 저렇게 첫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그 수많은 교도들 앞에서 멍청하게 굳어 있는 신녀의 지팡이를 빼앗아 가루로 만들며 말했다.
“신녀라는 건 이제 필요 없다. 존재 자체가 무용지물이지.”그 후 연이어 신녀의 상징이었던 커다란 왕관을 벗겨내며 말했다.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너는 앞으로 후계자를 거둘 수 없다. 네 대에서 신녀라는 존재는 끝이다.”그렇게 선포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신녀는 한낱 무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손천기는 영락전의 대문 앞에 서서 턱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이후로 처음이군.’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사건 이후로 몇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외부 행사에 나오지 않았던 할멈이다.
알아서 숨죽이고 잘 살고 있었다고 여겼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뭐, 만나보면 알겠지.”공손천기가 손짓하자 영락전의 거대한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주름투성이 노파가 공손한 태도로 일어서 있었다.
“오셨소이까, 교주.”“오랜만이야, 할멈.”공손천기와 신녀. 오랜 앙숙으로 알려진 둘의 만남은 그렇게 생각보다 평온하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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