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48)
제48화 세 번째 내기(2013.06.27.)
소년은 피로 얼룩진 손등을 혀로 핥았다. 비릿한 쇠붙이맛과 함께 아릿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그러고 보니 소년은 전신에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소년은 웃었다. 피 칠갑을 한 채로 실성한 것처럼 웃어댔다. 기뻤다. 어쨌든 살아남았다.
이 지옥 속에서. 동료들의 시체들을 짓밟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그르릉―
갑자기 석벽의 한쪽 면을 막아놓았던 거대한 돌이 움직이며 빛이 새어 들어왔다. 소년은 손을 들어 그 빛을 막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서서히 빛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놈인가?”“예. 어르신.”“과연, 제법 쓸 만하구먼.”“이 생사옥(生死獄)을 최단 기간에 돌파한 놈입니다. 근골도 약제당에서 보증했을 정도로 최상급이지요.”“호오?”소년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아니, 사실 소년이 알 필요도 없었다.
“이름이 뭐지? 꼬마.”소년은 질겅거리며 씹고 있던 내장 조각을 바닥에 뱉어내며 대답했다.
“일천구백팔십사 호.”이름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름이나 추억 따위는 제일 먼저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으니까.
“클, 눈빛이 아주 마음에 드는군. 좋아. 이놈으로 하지. 교주님께서도 좋아하셨으면 좋겠구만.”“이놈이 안 된다면 저로서도 이제 보여드릴 녀석이 없습니다, 어르신.”“걱정 마라. 이번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테니까.”노인은 흡족한 얼굴로 거의 헐벗은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순간 움찔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본능적으로 휘둘렀지만 노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땅―
“큭!”소년의 검은 정통으로 노인의 목을 베었지만 낭패를 본 것은 오히려 소년이었다. 손아귀가 찢어진 듯 피를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서는 소년에게 노인이 말했다.
“쯧, 교주님께 데려가기 전에 먼저 예의를 가르쳐야겠구나. 이건 원, 숫제 짐승과 다름이 없지 않느냐?”“교정하겠습니다.”노인 뒤에 서 있던 사내. 그는 음침한 표정으로 허리에 매어져 있던 채찍을 꺼내 들며 말했다.
“사흘 뒤에 와주시면 되겠습니다. 어르신.”“알겠네. 자네만 믿지.”
* * *
사흘 뒤 노인이 찾아왔을 때. 소년의 모습은 처음 봤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백색의 깔끔한 무복을 차려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그를 향해 인사해왔기 때문이다.
“지검당(地劍黨) 소속 백인대장 운휘(雲輝). 주상산 호법님께 인사드립니다.”지검당 소속 백인대장. 이것이 소년의 새로운 신분이었다.
“호오? 멀끔하니 제법 보기 좋은 모습이구나. 헌데 운휘? 그것은 본명이냐?”“……예.”“성은 기억나지 않느냐?”“……그렇습니다.”너무 오래전에 불렸던 까닭에 이름도 간신히 기억하는 것이다.
“뭐, 좋다. 그거야 상관없겠지. 일단 나를 따라오너라. 교주님을 뵈러 가야 하니.”운휘는 등을 보이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주 호법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얼마 전처럼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눈앞에 있는 노인을 비롯하여 그가 있는 이곳에는 괴물 같은 고수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그가 익힌 잔재주로 난리 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었다.
“이곳에 교주님이 계신다. 예의를 갖춰라.”“알겠습니다.”운휘는 심호흡을 하고 기다렸다. 성심전(聖心殿)이라 적힌 거대한 현판만큼이나 문 역시 거대했다.
쿠그그긍―
잠시 기다리자 문이 좌우로 열리고 그 안에 앉아 있는 교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천마신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었으며 천마 이후로 역대 최강의 무력을 지닌 교주라 일컬어지는 사내.
“이 아이냐?”공손천기.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예. 생사옥을 최단기간에 돌파한 녀석입니다. 나이는 열여덟 살입니다.”“흐음. 더 어려 보이는데? 생사옥을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석 달입니다.”“석 달? 과연 제법이네.”허나 말과는 달리 공손천기에게선 별다른 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주상산. 주 호법이었다.
“자세히 한번 봐주십시오, 교주님. 약제당이 보증한 근골을 가진 녀석입니다. 기본기를 철저히 다졌고, 재능도 있으니 교주님의 후계자로 들이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구만.”공손천기는 흐리멍덩한 눈을 들어 운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운휘는 움찔거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운휘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순간 뒤로 물러서서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뭐였지?’운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그때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던 공손천기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제법 괜찮은 걸 가져왔군.”저 멀리 있었던 공손천기가 갑자기 운휘 바로 앞에서 불쑥 솟아났다. 운휘가 그 귀신같은 움직임에 헛바람을 집어삼키고 있을 때.
공손천기가 지척까지 다가와 운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그의 턱을 잡아당겨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럴싸한 가능성이 보이는 놈이다. 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느끼는 건 할 줄 아는 놈이라니…… 괴상한 놈이로구만. 하지만 재미는 있어.”“그, 그 말씀은….”주 호법이 떨리는 얼굴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을 할 때, 공손천기가 무언가를 보더니 혓바닥을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많이 부족해. 게다가 잔가지를 너무 쳐냈잖아? 가지가 너무 굵어져서 쓸모없게 되었다. 아쉽게 되었구만, 주 호법.”“크억! 그럴 수가!”주호법이 절망적인 얼굴을 할 때.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운휘가 입을 열었다.
“제 어디가 교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부족한 것입니까?”“응?”제법 당돌한 말투. 주상산이 얼굴을 찌푸리며 무어라 지적하려 할 때 공손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주 조금 모자라다. 그건 너 같은 애송이는 눈치 채지도 못할 만큼 아주 미묘한 것이지. 하지만 그 차이는 절대적이야.”“고치겠습니다.”“고치기 힘든 문제야.”“고칠 수 있습니다.”운휘는 대답을 하며 교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타오를 듯 강렬한 안광. 그 안은 알 수 없는 강한 열기로 가득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이었다.
“감히! 불경하다!”주상산이 화난 얼굴로 그런 운휘를 향해 손을 쓰려 할 때 교주가 그 앞을 막은 후 말했다.
“아아! 너무 열 내지마, 주 호법. 그러다 쓰러져. 안 그래도 오늘내일하면서 왜 그래?”“허, 허나 저놈이 감히 지금 교주님 앞에서…….”“좀 기다려봐. 어른스럽지 못하게 우리 이러지 말자.”공손천기는 씩씩거리는 주 호법을 옆으로 쭈욱 밀쳐놓은 후 운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고칠 수 있다고 했느냐?”“그렇습니다.”교주는 웃었다.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느껴지는 웃음.
“제법이다. 사내라면 응당 그런 배짱이 있어야지. 좋아, 그럼 기회를 주마.”공손천기는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나와 내기를 하자, 애송아.”“무엇이 걸린 내기입니까?”운휘의 질문에 공손천기는 집게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마신교, 니가 이기면 이걸 너에게 주마.”“교주님!”주 호법이 빽 하고 소리칠 때. 공손천기가 그런 주 호법을 다시금 뒤로 멀찍이 밀어내며 말했다.
“나는 아주 통이 큰 사람이거든. 꼬마야. 내기를 하려거든 이 정도 판돈은 걸어야지. 안 그러냐?”운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공손천기의 눈을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가득해 보이는 눈이었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자부심과 함께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을 강대한 힘이 전해져왔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좋다. 기백이 살아 있구나. 그래야 사내지! 크하핫!”공손천기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나의 밑천을 꺼내어 보여주었으니 네 것도 보여줘야겠지? 너는 이 내기에 무얼 걸겠느냐?”운휘는 잠시 생각했다. 무엇을 걸어야 할까? 자신에게 과연 천마신교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 있던가?
잠시 자신을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는 교주를 응시하던 운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하나 있다.’운휘는 공손천기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 저를 걸겠습니다.”“너를 걸겠다?”“예. 제 남은 인생을 여기에 걸겠습니다.”운휘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팍 하고 치며 당당하게 말했다. 공손천기는 그런 운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직하게 웃었다.
“넌 너의 가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구나. 천마신교는 그렇게 저렴한 곳이 아니다.”“…….”“허나 제법이다. 지금으로서 네가 걸 수 있는 건 그게 전부겠지. 정답에 가까운 것을 찾았으니 조금 손해 보는 셈 치고 받아주마.”공손천기는 말을 끝내고 운휘의 바로 앞에 말없이 주먹을 내밀었다. 운휘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공손천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남아일언(男兒一言:남자의 말 한마디)!”운휘가 눈을 빛내며 공손천기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중천금(重千金:천금의 무게가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주상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을 때. 공손천기가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내기 내용을 말 안 했네?”운휘도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하자. 어떠냐?”“알겠습니다.”“기한은…… 음, 십 년 정도가 좋겠군. 그 정도의 가치가 있겠지.”그렇게 해서 교주와 운휘의 십 년의 내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내기의 결말은 운휘. 현 초혜정주의 패배였다.
* * *
‘다 왔었다.’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천마신교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초류향을 바라보는 초혜정주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저긴 본래 내 자리여야 했다.’초혜정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교주의 자리. 어쩌면 그가 저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교주 공손천기와 초혜정주 운휘는 총 세 번의 내기를 했다. 앞의 두 가지는 초혜정주가 이겼다.
하지만…….
―제법이다. 만약 십 년이 다 되는 그날까지 마땅한 제자를 구하지 못한다면 운휘, 너를 내 후계자로 삼겠다.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두 번째 내기를 이겼을 때. 공손천기가 그를 보며 했던 말, 즉 마지막 내기의 내용이 바로 저거였다.
초혜정주 운휘. 그는 심장이 뛰었다. 교주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 내기는 무조건 자신이 이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아니었다. 입안을 타고 쓴맛이 감돌았다. 교주와 약속했던 십 년이 불과 일 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덜컥 제자랍시고 교주가 외부에서 데려온 이 꼬마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본의 아니게 내기에서 이기게 되었다. 너에게는 미안하구나.]교주가 그를 보자마자 전음으로 저렇게 말을 하니 내심 울컥했다. 내기에서 진 것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더 서운했던 것이다.‘헌데 이런 꼬마가 정말 나보다 낫다는 건가?’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 꼬마는 근골도 별로였고 선천적인 힘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 도대체 무엇을 보고 후계자로 덥석 결정했다는 말인가?
교주가 단순히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는 교주는 절대 그런 소인배가 아닌 것이다.
‘그럼 내가 못 보는 무언가가 이 꼬마에게 있다는 건가?’이게 결론이었다. 운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진실을 파헤쳐내야 했다. 그래서 교주에게 당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가서 따져야 했다.
‘반드시 찾아내겠다.’천마신교의 교주 자리는 과거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운휘에게는 사실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마음속으로 이미 스승님이라 생각했던 교주와 멀어지는 게 두려울 뿐이었다.
운휘는 자신을 부른 초류향을 응시하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바닥으로 내려와 부복했다. 이 꼬마는 정말 놀랍게도 그의 은신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초혜정주라 합니다, 소공자님. 인사가 늦었습니다.”“고개를 들어도 됩니다.”초혜정주는 고개를 들어 초류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여러 감정이 엉켜 있던 초혜정주의 눈빛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심을 겉으로 드러낼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하명하십시오. 소공자님”확실히 이 꼬마는 무언가 있긴 있는 놈인가 보다. 그의 은신을 이렇게 쉽게 간파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만만히 볼 놈이 아니란 증거니까.
‘그래도 인정하지 못한다.’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기척을 흘렸을 수도 있다. 초혜정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초류향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쪽 사람들이 펼치고 있는 이 진법의 이름은 대체 뭡니까? 상당히 독특한 모양인데.”순간 초혜정주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진법? 설마 이 꼬마가 혈하멸천검진(血河滅天劍陣)까지 알아봤다는 말인가? 외부에 단 한 번도 노출된 적 없었던 검진을?
‘그걸 알아볼 정도의 안목이 있다고? 이런 꼬맹이에게?’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초혜정주의 눈이 다시금 복잡하게 변하든 말든 초류향은 주변에 은신해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평상시에는 다섯 곳. 변형 시에는 일곱 군데 정도인가? 아니다. 더 되겠다.’초류향은 눈을 반짝였다. 대략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곳에 은신해 있었고, 이들은 적과 맞닥뜨리게 되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폭풍처럼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법칙의 변화를 좌우하는 변수들. 그 변수들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았다.
‘이건 굉장하다.’초류향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와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병영 진법과 일반적인 진법은 근본적으로 그 요체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바닥에 이 병영 진법의 완성된 형태를 그려보며 그 움직임을 파악하려 한 것이다.
‘무슨 짓을…….’처음에는 꼬맹이가 뭘 하는지 잘 몰랐다. 그러다 잠시 후 초혜정주는 눈을 부릅떴다.
꼬맹이가 지금 바닥에 천천히 그리고 있는 것은 혈하멸천검진의 완벽한 파훼법이었기 때문이다.
파악―!
초혜정주는 초류향이 바닥에 그리고 있던 것을 발로 밟아 흩어놓았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초류향을 쏘아보며 생각했다.
‘네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