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54)
제54화 초혜정주의 맹세(2013.07.18)
“바쁜 모양이군.”“아닙니다.”이화궁주 백소천. 그녀는 다소곳한 태도로 갑작스러운 방문객을 상석으로 안내했다. 방문객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상석에 가서 앉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시간이 나서 들렀어. 아리는 잘 있지?”“네. 교주님.”공손천기. 그는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 보고 싶다고 밤마다 떼쓰지는 않고?”“……다행히 그럴 나이는 지난 모양입니다.”“아쉽구만.”백소천은 차와 다과를 가져와 공손천기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얼마 전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사고?”“아리가 허락 없이 궁전을 빠져나가 초혜정에 놀러 간 모양입니다. 갑갑해서 그런 모양인데 다행히도 별다른 사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백소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의 불찰로 인해 자칫 교주님의 소중한 아이가 불미스러운 일을 겪을 뻔했습니다. 죄송합니다.”“흐음…….”공손천기의 눈가가 뱁새의 그것처럼 가늘어졌다. 그 시선에 백소천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별다른 일은 없었고?”“네. 그나마 호위로 붙여놓았던 아이들이 제때 찾아 다행이었습니다. 단지…….”“단지?”“초혜정에서 소교주님을 만났던 모양입니다. 서로 대화도 나누었는데 우려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공손천기는 팔걸이를 집게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거기서 그 아이를 만났다고? 아리가?”“네.”“호기심이 생기는구만. 아리를 불러봐.”“알겠습니다.”백소천이 전음으로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아리를 불러오라고 시키자 얼마 후에 공손아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빠!”“오호! 우리 딸! 꽤 많이 컸네?”공손천기는 의자에서 일어나 뛰어오고 있는 공손아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동안 왜 안 오셨어요? 많이 바빴어요?”“이 아빠는 늘 바쁘지. 근데 우리 딸 못 본 사이에 키만 큰 게 아니라 몸무게도 많이 늘었구나.”공손아리가 얼굴을 붉히며 공손천기를 살짝 밀어냈다.
“클클,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지금은 많이 먹고 쑥쑥 커야 할 때거든.”끄덕끄덕. 공손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해 보였다.
“사실 그동안 일이 좀 있어서 바깥에 나갔다 왔다. 그래서 못 온 거야.”“바깥이면…… 중원에 다녀오셨어요?”“응. 중원에 다녀왔지.”딸의 얼굴에 동경과 호기심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공손천기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딸은 중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고 있는 바쁜 일들이 다 정리되면 중원으로 유람이나 한번 가자. 재미있는 것들을 구경시켜주마.”“와아!”기대하고 있던 대답인지 공손아리가 박수를 치며 즐거워할 때, 공손천기는 그런 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딸.”“네, 아빠.”“사실은 아빠가 조금 궁금한 게 생겼거든?”“뭔데요?”“아까 초혜정에 갔다 왔다고 했지?”“……!”공손아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옆에 있던 이화궁주 백소천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공손천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혼내려고 물어보는 게 아니니까. 초혜정에 갔었지?”공손아리가 백소천을 응시하다가 그녀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자 곧 체념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다녀왔어요.”“오히려 잘됐다. 어떻더냐, 그 녀석? 안 그래도 이번에 한번 데려오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데려오긴 좀 애매해서 말이다.”이화궁은 금남의 구역이다. 정식적인 허가 없이 이곳에 남자가 발을 들였다가는 즉결처분을 당해도 별수 없었다. 물론 교주는 예외다.
“누구……요?”공손아리가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려고 했지만 공손천기 앞에서는 허망한 몸짓일 뿐이다.
“……어? 수상한데?”“예? 뭐가요? 아, 아니에요!”공손아리는 공손천기의 눈이 가늘어지면 가늘어질수록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그 시선을 회피했다.
그래도 공손천기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자 공손아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아빠를 완전히 외면해버렸다.
“……좋다.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으마. 서로가 너무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네.”공손천기는 그답지 않게 다 죽어가는 기색으로 깊은 한숨을 한 차례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더냐? 그냥 솔직한 감상을 한번 말해 보거라.”무얼 말하라는 걸까? 아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공손아리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공손천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았느냐, 나빴느냐?”이번 질문도 몹시 애매했다. 좋다고 말하기엔 지금 상황이 좀 그랬고, 그렇다고 나빴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 공손아리는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해서 대답했다.
“……나쁘진 않았어요.”“흐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왜 이런 것을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손아리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눈이…… 예뻤어요.”공손천기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드, 들켰나?’찔리는 것이 있어서 공손아리가 움찔할 때. 공손천기가 다시 물었다.
“눈이 어떻게 예뻤는데?”어떻게 말해야 할까? 공손아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느꼈던 그대로를 말하기로 했다.
“나, 난생 처음 보는 눈이었어요. 뭔가 빛이 반짝반짝하고 편안해지는 눈이라고 해야 될까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어요.”공손천기는 딸의 대답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내 짐작이 맞았다.”공손아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해 보일 때 공손천기는 그녀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딸도 너희 엄마와 같은 종류의 눈을 가졌나 보다.”“……엄마랑 같은 종류의 눈이요?”“그래. 진안(眞眼: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건데. 본래 이걸 얻으려면 엄청나게 수련을 해야 하는 거거든? 근데 매우 드물게 태어날 때부터 이걸 타고나는 축복받은 사람들이 있지. 딸도 그렇고. 너희 엄마도 그랬고.”“…….”“그동안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확실해졌군. 다행이다, 딸.”딸의 머리를 기분 좋게 쓰다듬으며 공손천기는 히죽 웃었다.
“살아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건.”분명 딸은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살아갈 것이다. 공손천기가 끝까지 살아서 뒷바라지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큰 장점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딸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공손천기였다.
“이제 제자 녀석을 만나러 가봐야겠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놨어.”낯선 환경에 너무 오래 방치해두는 것도 좋지 않았다.
아무리 또래들보다 똑똑하고 침착한 녀석이라 하더라도 그 녀석은 이제 고작해야 열한 살이다. 아직은 어른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인 것이다.
게다가 그 녀석은 얼마 전에 어버이처럼 믿고 따르던 스승을 잃지 않았던가? 여러모로 신경을 써줘야 하는 시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다음에 또 찾아오마. 그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알겠지?”“네, 아빠.”딸을 다시금 꼬옥 안아준 공손천기는 백소천에게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잘 부탁할게. 그럼.”“걱정 마십시오, 교주님.”“자네만 믿어.”백소천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예의를 표하는 것을 보며 공손천기는 신형을 날렸다. 바람보다 더 빠르게 제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 * *
‘만나러 온 것까지는 좋은데…… 이건 대체 무슨 일이지?’초혜정은 엉망진창이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지길래 기척을 숨기고 접근해보니까 이건 정말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혈하멸천검진이라…….’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로지 초혜정을 수호하기 위해 있는 수호멸천대(守護滅天隊)가 초류향을 포위한 채 살벌하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황당하게도 초혜정주는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막 움직이려 하다가 공손천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예 나뭇가지에 엉덩이를 붙이고 걸터앉아 버렸다.
‘재밌겠군.’초류향이 가지고 있는 신안의 종류가 유별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길을 보고 있는 건가?’공손천기는 턱을 괴고 흥미로운 얼굴을 한 채 긴박감 넘치는 전장을 지켜보았다.
수호멸천대의 아이들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손을 쓸 때 어느 정도 여유는 두고 있었다. 그랬기에 걱정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지만…….
아무리 손속에 인정을 두었다고 해도 무공의 격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런데도 초류향의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게 저 아이의 신안인가? 특이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구만.’제법 좋은 것을 배웠다.
공손천기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초류향을 관찰하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진법이 서서히 깨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법…….’병영진법은 결국 사람이 펼치는 것이다. 진법을 이루고 있는 개개인이 흔들리게 되면 진법 전체에 그 균열이 미치게 된다.
초류향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사람 하나하나를 흔들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흔들림은 충실하게 전체로 퍼져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진법이 무너지겠군.’공손천기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초혜정주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그래도 방법이 있다. 헌데 과연 저 아이가 그것을 눈치 챘을까?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 초혜정주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호오?’과연 초혜정주. 얕볼 수 없는 녀석이었다. 공손천기는 상체를 아예 앞으로 쭈욱 내놓은 상태로 나뭇가지에 앉아서 흥미진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상황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이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이런 재미있는 구경을 한다는 말인가?
조금 전까지 제자를 걱정하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호기심과 즐거움만이 가득했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돌파할 테냐, 제자야?’진법의 형태가 갑작스럽게 바뀌고 초류향에게 위기가 닥쳤다. 과연 저 아이가 이것을 돌파할 수 있을까? 저것은 길이 보인다고 해서 통과할 수 있는 형태의 진법이 아니었다.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초류향이 제자리에서 멈춰 선 채 서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오?’공손천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전, 일순간이지만 초류향의 호흡에 맞춰서 주변의 대기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녀석,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느냐?’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초류향이 슬쩍 자신이 있는 곳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저 녀석의 정체가 대체 뭘까? 어떤 기예(技藝)를 저 작은 몸 안에 가둬두고 있는 것일까?
공손천기. 그의 눈조차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기예라니……. 얼마나 그 깊이가 깊은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제 시작이군.’방금 전에 주변의 기운을 움직였던 그 기술.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곧 펼쳐질 것이다.
‘운휘야. 안타깝지만 이번에는 니가 졌다.’둘 사이에 뭔가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공손천기가 보기엔 초류향이 이길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순식간에 초류향은 앞을 가로막은 녀석들을 제압하고 진법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공손천기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때 초류향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모르는 척해주라.’공손천기가 눈짓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을 즈음.
초혜정주. 운휘가 넋 나간 얼굴로 초류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공손천기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어렸을 때. 운휘가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초혜정주 운휘. 앞으로 남아 있는 제 모든 시간을 소교주님께 드리겠습니다.”“……!”지켜보고 있던 공손천기가 입을 헤 벌리더니 이내 뻐끔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운휘는 자존심이 대단히 센 녀석이었다.
심지어 교주인 그에게조차 당돌하게 덤벼댈 정도로 깡이 좋은 놈이 아닌가?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데리고 있었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너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어둠 속에서 지켜보던 공손천기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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