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61)
제61화 정체불명의 노인(2013.08.12.)
공손천기는 턱을 쓰다듬으며 상대방을 훑어보았다. 새하얀 섭선을 들고 있는 노인. 오만하고 고고한 시선 속에서 그의 높은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얼굴이다.
“몽혈접(夢血蝶)을 부술 줄 아는 것을 보면 얼치기로 배운 것은 아닌 모양인데 대체 정체가 뭐야, 영감?”제갈량. 그는 섭선 끝을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어이없다는 웃음이다.
“우매한 놈. 고작 이런 알량한 재주를 부려놓고 감히 누구를 평가하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호오? 제법 자신만만하시네. 아주 좋은 자세야.”공손천기는 즐거운 듯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누굴까? 대체 누구기에 이토록 엉뚱한 장소에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묻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나중의 문제.
“정체가 뭐냐고 곱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겠지?”제갈량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알아가 보려무나.”공손천기는 웃었다. 원하던 대답이 상대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제압하고 난 다음에 궁금한 것을 물어보아도 늦지 않다.
“험한 꼴 보게 될 텐데 괜찮겠어?”제갈량은 공손천기의 협박에도 여유로운 얼굴로 섭선을 부치며 대답했다.
“얼마든지 오너라.”공손천기는 배시시 웃었다. 바라던 바였다. 말투에서부터 상대방의 오만한 자신감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가?
천하에 누가 있어 감히 그 앞에서 저런 자신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제법 신선한 기분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재밌겠군.’흥미가 동했다. 무공만큼은 아니었지만 술법은 공손천기가 정말로 자신 있어 하는 공부였다. 아니, 무공 다음으로 자신 있어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마신교에는 좋은 술법서들이 많았다. 그것도 아주 많았다. 심심해서 그런 것들을 읽다 보니 종국에는 안 읽은 술법서가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그런 공손천기의 술법에는 마땅한 스승이 없었다. 딱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쌓은 공부가 이미 일가를 이룰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일단은…….’무엇부터 보여주어야 될까? 언뜻 보아도 상대가 쌓은 재주가 제법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어설픈 것을 꺼내 보였다가는 되레 망신만 당할 터. 아주 강력하면서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공손천기는 속으로 흥얼거리며 고민하다가 불현듯 무얼 보았는지 얼굴을 와락 찡그리며 제갈량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영감탱이, 설마…….”“뭔가 보았느냐?”제갈량의 오만한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무엇을 본 것일까? 볼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공손천기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그저 한동안 말없이 눈앞의 노인을 응시했다. 그러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미소 지었다.
“재미있겠군. 설마 동류(同流)를 만나게 될 줄이야.”동류. 제갈량은 공손천기의 중얼거림에 맥 빠진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마라. 넌 아류(亞流)일 뿐이다. 겉포장은 훌륭했다만 불행히도 거기까지다.”탁―
섭선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치며 제갈량이 말했다.
“안 올 생각이냐? 그러면 이쪽이 먼저 가마.”“쯧, 영감. 내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그건 우리 사부도 못 한 거야.”공손천기가 히죽 웃으며 아무런 예고 없이 오른팔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손바닥을 펴서 마치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듯한 동작.
아주 단순하고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그곳에는 숨길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파츠츠츠―
공기가 파르르 떨리더니 앞으로 뻗은 공손천기의 오른손 부분만 돌연 허공에서 사라졌다. 오른손이 갑자기 안개에 빠진 것처럼 흐릿해진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갈량의 눈가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잔재주…….’그 순간 제갈량의 바로 앞에 지옥의 입구처럼 시커먼 공간이 쩌억 입을 벌렸다.
“우선 가볍게 견적부터 내볼까?”공손천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 구멍에서 거대한 푸른 손이 쑤욱 등장했다.
시체처럼 푸르뎅뎅한 거대한 손. 그것은 실로 거대해서 제갈량을 한 손에 움켜쥐고 터트리려고 했다.
하지만……. 제갈량이 섭선을 들어 가볍게 바람을 부치자 거대한 손은 산산이 터져나갔다.
끄어어엉―!
괴수의 신음소리가 시커먼 구멍에서 들려오고 망신창이가 된 팔이 허공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제법인데?”공손천기는 아쉬워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어떻게든 대응할 것이라 여기긴 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쉽게 흩어버리지 않는가?
이것으로는 상대방의 내력을 알아낼 수가 없다. 그때 제갈량이 섭선을 만지며 말했다.
“이런 잔재주 말고 진짜배기를 보여 보아라.”“진짜배기?”“안 그러면 이번에는 크게 다칠 게다.”갑자기 제갈량의 몸에서 숨길 수 없는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허나 공손천기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충고는 고마운데 과연 그쪽에서 감당이 될까?”“그건 내가 할 말이다.”“좋아.”공손천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는 진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영광으로 생각해.”두 손을 들어 올린 공손천기는 스스로의 눈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자 일순 세상이 밝아져 보였다.
“마륜안(魔輪眼)이라…….”제갈량이 작게 중얼거릴 때. 공손천기의 머리 위로 일순 붉은색 거대한 눈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제법…….”제갈량은 더 이상 뒷말을 잇지 못하고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거대한 것이 발아래에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늦었어.”드드득―!
갑자기 바닥이 세로로 쭈욱 갈라지며 갈라진 곳에서부터 날카로운 이빨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양쪽으로 넓게 벌어졌다.
“끝이다.”공손천기의 눈가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바닥에 생긴 거대한 입이 벌어지더니 곧장 제갈량을 집어삼켰다.
빠드득― 우드득―
뼈 조각이 어긋나고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심연의 어둠 속 저 너머에서 들렸다.
하지만 바닥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공손천기의 얼굴은 오히려 점점 일그러졌다. 그러다 결국 입맛을 다셨다.
“젠장, 당했군.”공손천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옆의 공간이 일렁거리며 사라졌던 제갈량이 다시 나타났다.
“역시 봉추(방통)의 술법을 익히고 있었군. 근데 오히려 봉추보다 두 배는 낫다.”제갈량의 진심 어린 칭찬에 공손천기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목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칭찬해봐야 소용없어. 이곳에서는 어차피 영감을 못 이긴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히 알아버렸으니까.”맨 처음 공손천기는 이곳이 초류향의 꿈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아니었다. 이곳은 눈앞에 있는 저 노인. 즉, 제갈량이 만들어 놓은 꿈속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주도권은 애초에 저쪽에서 쥐고 있었다. 같은 힘이라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뭐 하는 영감이지? 그리고 내 제자는 대체 어떻게 할 속셈이야? 대답에 따라서 대응 방식을 결정하겠다.”공손천기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후 마륜안을 완전히 풀어버렸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바닥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 모습에 제갈량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무모한 녀석이군.”공손천기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공간에서 그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실제로 바깥에서 만났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잠시 동안 제갈량은 공손천기를 바라보았다.
공손천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갈량을 응시했다. 과거와 현재의 전설적인 괴물. 두 명의 시선이 복잡하게 엉키며 서로의 속내를 빠르게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후 공손천기가 씨익 웃으며 불쑥 입을 열었다.
“그쪽 제법 굉장한 영감탱이였군. 비밀도 많고. 점점 더 정체가 궁금해지는데?”제갈량은 피식 웃었다.
“세상에는 굳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비밀도 있는 법인 게다.”공손천기는 제갈량의 대답에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생기지만 참아보도록 하지.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거야. 그러니 내가 알고 싶은 것에는 꼭 대답해줘야겠어.”공손천기가 알고 싶은 것. 그것은 말해줘도 그다지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그랬기에 제갈량은 순순히 말해주었다.
“네 제자는 지금 단계를 넘어서려고 하고 있다.”“단계를 넘어선다?”“그래. 강제로 껍질을 깨고 있는 중이라 조금 위험하지만 그 꼬마라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겠지.”제갈량은 섭선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서둘렀다는 건 인정한다. 네가 계획하고 있던 다른 것도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었다.”공손천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수상한 노인네가 초류향에 대한 악의(惡意)가 없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일단은 그것으로 안심이 되었다.
“그쪽, 육체가 없군그래.”제갈량은 미소 지었다. 역시 이 녀석은 만만하게 볼 놈이 아니었다. 단번에 그것을 간파할 줄이야.
“정확하게 봤다.”“념(念)으로만 존재하는 괴물이 있을 줄이야…… 오늘 크게 안목을 넓혔군.”공손천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체 생전에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저런 것이 가능할까?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좋지 않으니 이만 나가보거라.”“잠깐만…… 영감 혹시 내가 알고 있는 과거의 사람인가?”공손천기의 질문에 제갈량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섭선을 흔들었다.
“여기까지다. 공손천기.”퍼엉―
공손천기는 섭선에 실린 기운을 맞고 날아가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 확인해볼 것이 남았는데 강제로 쫓겨나 버린 것이다.
* * *
“허억!”“깨어나셨습니까, 교주님?”“……그래.”공손천기는 선우조덕이 가져다주는 꿀물을 사발째 벌컥벌컥 마신 다음 낮게 이를 갈았다.
“젠장, 설마 그런 영감이 있을 줄이야…….”져버렸다. 비록 상대방의 영역 안이었다지만 찝찝한 기분이 가득했다. 공손천기는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불쑥 오른 손바닥을 펴보았다.
그러자.
투투툭―!
오른손바닥의 피부에 갑자기 미세한 균열들이 생기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선우조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둘러 금창약을 바르며 지혈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장난이십니까, 교주님?”“나도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빌어먹을 부채영감탱이.”“부채영감이 누굽니까?”“있어. 건방진 영감탱이가.”정말로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최초의 일격을 날렸을 때. 부채를 든 영감의 일격에 오른손이 완전히 아작 난 것이다.
정신체에 입었던 상처는 그 크기에 따라 어느 정도 육체에 표시가 나기 마련이다.
마륜안이라는 정신체를 극도로 사용할 수 있는 술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에 이 정도의 상처를 남긴 힘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술법이었다.
공손천기는 아직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오른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초류향을 응시했다.
“이봐, 약쟁이 영감.”“하명하십시오, 교주님.”“당분간 저 녀석 저렇게 그냥 두도록 해. 괜히 건드리면 긁어 부스럼 내는 꼴이니까.”“……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선우조덕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공손천기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굳이 이야기해줄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초류향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밖에서 한판 붙어보자, 부채영감.”여러모로 손해 본 듯한 기분이 드는 공손천기였다.
* * *
제갈량은 스스로가 만든 공간에 서서 바깥에 있는 공손천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흐릿하게 웃었다.
“오래 살아서 좋은 것도 있군.”섭선 끝을 만지며 제갈량은 기분 좋게 웃었다. 기뻤다. 단순히 저런 뛰어난 재능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단한 녀석이었다. 과거 수많은 영웅들이 불꽃처럼 사그라졌던 그의 시대에도 저 정도의 재능은 정말이지 보기 힘들었으니까.
‘재미있었다.’오랜만에 즐거웠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가볍게 생각했던 유희였다. 그런 것이 이런 즐거움들을 주게 될지는 과거의 제갈량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초류향이라는 꼬마를 지켜보는 것도 한없이 즐거웠지만 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만한 공손천기라는 아이도 제법 재미있지 않은가?
제갈량이 그렇게 웃을 때 갑자기 무언가 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특이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던 제갈량은 섭선을 만지고 있던 손을 멈칫했다.
“……설마?”바닥의 한구석이 완전히 찢어져 있었다. 그 흔적을 가만히 살펴보던 제갈량은 잠시 어이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에게 이런 표정은 정말로 아주 드문, 최대한의 감정 표현이었다.
“……이 시대도 제법 재미있어지겠군.”공손천기가 마지막에 그를 삼켰던 그 공격. 그것은 제갈량이 만들었던 꿈속 공간 자체를 집어삼켰던 것이다.
“허세만 있던 게 아니었군. 그 녀석.”제갈량은 입술 끝을 슬며시 말아 올렸다.
공손천기, 그 녀석이 만약 작정을 하고 덤벼들었다면 이 공간의 주인이었던 제갈량조차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했어야 했을 것이다.
녀석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얕봐도 한참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갈량은 그렇게 찢긴 바닥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