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67)
제67화 악연의 시작(2013.09.02.)
초류향은 눈앞에 놓인 찻물이 식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와 마주하고 있는 초무령. 그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마주한 채로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버지 초무령이었다.
“우선 축하……해야겠구나.”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음성 속에 담겨 있는 미세한 떨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초류향은 어색한 얼굴을 해 보였다.
즉위식이 끝나고 곧장 와서였을까? 걸치고 있는 옷들이 지금 이 순간 몹시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숨이 막힐 만큼 갑갑했던 것이다.
‘곤란하다.’아버지가 얼마만큼 사도(邪道:올바르지 않은 길)를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상황이 몹시도 초류향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내 길은 틀리지 않았다.’아버지의 기준에서는 분명 천마신교가 올바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해했다. 강호에서의 소문이 그러했으니까.
천마신교의 고수들은 모두 음행(淫行:음란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즐기고 살인을 취미처럼 행하는 악당들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천마신교는 그들만의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떳떳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교주인 공손천기만 보아도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우두머리가 그러한데 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초류향은 아버지에게 그것들을 가르쳐드리고 싶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려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에 가득했던 그 정당성들은 결국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분노나 질책이 아닌 연민과 안타까움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초류향은 준비해놓았던 수많은 말들이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겨우내 얼었던 눈이 봄 햇살에 녹는 것처럼 마음속에 가득했던 생각들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그렇게 녹아내린 마음 사이로 아버지의 음성이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힘들었겠구나.”“…….”아버지는 다만 아들을 걱정하고 계셨다.
복잡하게 주변의 정세와 스스로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아들인 초류향을 걱정하고 그 입장을 이해하고 계셨던 것이다.
초류향은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 생각을 읽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만 생겼다.
“네 덕분에 천마신교라는 곳도 와보고…… 좋은 경험이 되는구나.”초무령은 아들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애써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의 아들이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다고 여겼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또래들에 비해서다. 그의 아들은 아직 어리다.
그랬기에 이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 얼마나 추잡한 것들이 그 이면(裏面)에 숨어 있는지 아직 모르는 것이다. 물론 천마신교가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사실 지금 초무령은 천마신교에게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단순히 어린아이의 결정만을 믿고, 그 부모에게 뜻을 묻지 않은 천마신교에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허나…….
‘너무 늦었다.’초무령은 마음속에 들끓는 이 모든 감정을 일단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런 것을 따지기도, 상황을 돌이키기도 이젠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뿐더러 여기에서 그 혼자 이런 이야기들을 해봐야 상황이 오히려 악화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무령은 결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걱정하고 계신다. 한 번쯤은 집으로 돌아와 안부를 전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아무래도 힘들어 보이는구나.”마차로 오는 동안 엄승도라는 마인에게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소교주라는 자리는 상징적인 자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라고 했다. 그 때문에 함부로 외부에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무공을 완성해서 스스로의 몸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는.
만에 하나 소교주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그거야말로 큰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상인으로 성공하기를 바랐다.”초무령은 아들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아들은 어렸을 적부터 계산에 밝았다. 또 금전(金錢:돈)의 흐름을 읽어내는 감각이 탁월했다.
복잡한 숫자나 수식에도 강했기 때문에 상인으로서 그 성공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림인이 될 줄이야…….”세상일은 역시 뜻한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재능이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다만 말할 수 없을 만큼 진한 아쉬움이 초무령의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교주는 어떤 사람이더냐? 한번 만나보았으면 한다만 너무 바쁜 듯하구나.”“……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오신다고 했습니다.”즉위식의 뒷마무리를 죄다 공손천기가 하고 있었다. 주인공도 없는 그 자리를 공손천기가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초류향과 그의 아버지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네가 보는 그는 어떤 사람인 것 같으냐?”초류향은 안경을 매만졌다. 이것은 얼마 전에 스승님에게 들었던 질문과 비슷했다. 그랬기에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제가 닮고 싶은 사람입니다.”“…….”초무령은 아들의 표정에 담겨 있는 감정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존경과 확신이었다.
“기대가 되는구나.”“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자신만만한 아들의 대답에 초무령은 살짝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그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너무 계산적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이것저것 따지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가 저런 대단한 신뢰감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면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소문을 믿을 수 있으려나…….’초무령은 안경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들은 교주를 반쯤 ‘신’적인 존재로 포장하고 있었다. 물론 좋지 않은 느낌의 신적인 존재였지만.
그 소문들을 최대한 거르고 걸러서 정말 쓸모 있어 보이는 것만 취합해 가지런히 늘어놓아도 믿기 힘든 사실투성이였다.
하늘을 걸었다느니(虛空踏步), 격공장(隔空掌:먼 거리를 둔 채 쓰는 장풍)을 썼다느니 하는 것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 부분에 대한 소문들은 제법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로환동(노인이 다시 아이로 변함. 육체가 젊어짐)을 했다든가 하는 부분은 영 미덥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교주는 대체 몇 살쯤 된 것일까?’고수들은 그 무공의 경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신체 나이를 대단히 늦게 먹는 편이다. 초무령의 머릿속이 갑자기 여러 가지 궁금증들로 가득해졌다.
일단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마음먹자 호기심이라는 것이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빨리 교주가 보고 싶군.’반면에 초류향은 초무령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그의 스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이 곤란한 상황과 난감한 설명들은 그의 스승이 오면 한 방에 해결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공손천기의 실체를 알고 그의 대단함과 그가 가지고 있는 깊은 생각들을 접하면 초류향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아버지가 순순히 이해해주실 것이라 여긴 것이다.
‘스승님을 믿습니다.’그렇게 마음먹고 속으로 생각하고 보니 문득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초류향은 순간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했다.
공손천기 특유의 장난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몹시도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무령과 초류향 부자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공손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소교주의 즉위식은 천마신교의 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성대한 행사였다. 모두가 행복하고 좋아해야 할 이때에 지극히 냉정한 눈으로 즉위식을 지켜보는 두 쌍의 눈이 있었다.
“어떻게 보았느냐?”“뭘요?”“모르는 척하지 말거라. 오늘 네가 죽여야 할 대상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말이다.”소년.
아니, 이제 막 소년티를 벗고 청년이라 불려야 될 사내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런 꼬마가 제 적이라니 그냥 슬프네요. 귀엽게 생겼는데.”“얕보지 마라. 교주가 선택한 아이다.”“예. 얕보지는 않죠. 저 대단한 교주님께서 선택했으니까.”청년.
그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흐릿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뭐냐?”“전 할아버지의 추잡한 뒷거래에 이용되기 싫어요.”단리세가의 가주. 단리무한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손자이자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
단리후(段里后). 그는 붉으락푸르락해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전 저기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꼬맹이처럼 누군가의 장난감이 아니에요. 쉽게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다면 그거야말로 큰 착각이죠.”“…….”“저희가 비록 혈족(血族)관계라고는 하지만 할아버지는 저희 아버지를 장애가 있다고 뒷방에 밀어 넣고 솔직히 신경 쓰지도 않으셨잖아요? 그러다 제가 가진 재능 때문에 갑자기 아버지에게 신경 써주시는 척하시는데…… 진심으로 많이 역겨워요, 할아버지.”“네, 네 이놈…….”단리무한이 전신을 가늘게 떨며 분노했지만 감히 이곳에서 그것을 터트리진 못했다.
이곳. 일원대전에서 지금 성질대로 발작한다면 그의 체통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단리후였기에 아까부터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고 있었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으니 일단 이번 일은 할아버지 뜻에 따를게요. 하지만 저에게 그 이상을 바라진 마세요.”단리후는 그 특유의 웃음을 얼굴에 그리며 그의 할아버지를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사실은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단리무한은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그리고 차분한 얼굴로 그의 손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막말을 할 정도면 자신은 있는 거겠지?”낮게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단리후는 웃었다. 환하게. 감히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능력이 어떤 건 줄 잘 아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나요.”단리무한은 비릿하게 웃었다.
“좋다. 네 녀석이 나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많이 있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게 내 실책이겠지. 그러니 네 뜻대로 하자. 이건 계약이다. 가족이니 뭐니를 떠나서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겠지?”“예. 그게 서로가 편하죠. 감정 쌓일 일도 없고.”단리후는 팔짱을 끼며 생글거렸다. 사실은 속이 뒤틀렸지만 웃었다. 이제는 웃는 걸 제외하면 다른 감정 표현은 하기 어려웠으니까.
지금 그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근방에 있는 사대세가의 가주들의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더러운 음모가 꿈틀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역시 이 추잡한 진흙탕에 이미 발을 담가 버렸으니까. 아무리 이들을 욕하고 미워하더라도 자신도 한통속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디 성년이 되는 그날까지 안전하게 무럭무럭 자라세요, 소교주님.’단리후는 천마신교 역사상 가장 화려한 즉위식을 하고 있는 소교주 초류향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다렸다.
그의 특별한 능력으로 저 꼬마가 최대한의 꽃을 피웠을 무렵. 그 꽃을 꺾어버릴 것이다.
그것이 단리후. 그의 숙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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