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69)
제69화 황궁에서 온 사내(2013.09.09.)
그날은 비가 왔다.여름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를 맞으며 마차에서 누군가가 내려섰다.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사내. 그는 지극히 슬픈 얼굴로 잠시 앞을 응시했다.
그의 눈앞에는 초상집이 있었는데, 사내는 그곳을 바라보다 이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가 조기천 선생님 댁입니까?”“그렇습니다.”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초상집을 지켜보던 사내가 다시 말했다.
“저 혼자 들어가 보겠습니다.”“……알겠습니다.”호위무사가 고민하다가 허락하자 사내는 침중한 얼굴로 집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을 맞고 있는 중년 사내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말했다.
“조민규 씨지요?”“예에. 그렇습니다만…….”“많이 힘드셨지요? 이제 제가 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예?”상주로 보이는 사내.
조기천의 맏아들인 조민규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앞의 젊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기보다 족히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사내가 갑자기 측은해하는 얼굴로 손을 잡더니 걱정 말라고 한다.
황당했지만 상갓집에서는 온갖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니 일단은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조기천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셨습니다.”“예에…….”조민규는 젊은 사내의 말에 잠깐 복잡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버지가 밖에서야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조기천은 집안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돈을 벌어오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물질적으로는 그다지 부족하지 않았다. 빠듯하긴 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집에 들러 얼굴을 비추었을 뿐.
그 대신 매달 보내오는 돈 봉투를 보며 조민규는 복잡한 마음뿐이었다.
돈 봉투가 마치 아버지 대신이라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조기천. 즉, 그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놈의 산법…….’그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렸다.
아버지. 조기천은 그런 하찮은 산법이라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족들은 잘 지내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칭찬하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면 몹시도 거북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증오스러운 아버지였던가?
며칠 전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별로 슬프지 않았다. 아니, 슬프지 않은 줄 알았다.
하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관 속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시신을 마주하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거리며 올라왔다.
관 속에 자는 것처럼 누워 있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울었던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서도 그렇게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머니 역시 자신과 비슷한 마음이었나 보다.
그렇게 가족들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들에게 시신을 건네준 검은 무복의 사내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본 교에서 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보이는 작은 성의입니다. 부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아버지의 시신을 가져온 강직한 인상의 무인. 그가 내미는 것은 작은 봉투였다.
척 보기에도 돈 봉투 같았다. 하지만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 무사가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고 돌아갈 때까지 그것을 열어보지 않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황금 일천 냥.’ 무려 황금 일천 냥짜리 전표가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사 인 가족이 황금 한 냥이면 일 년을 넉넉하게 먹고살 수 있다. 그런데 일천 냥이다. 단순히 주는 돈치곤 이건 지나치게 많지 않은가?
아버지는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것일까? 단순한 산학자(算學者)가 아니셨던가? 복잡한 마음뿐이었다.
그때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젊은 사내가 손을 풀며 천천히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인을 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향로에 꽂아놓고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훌쩍거렸다.
“산법에 있어서 선생님께서는 제 스승님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과 함께했던 황궁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였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셨으면 제 손으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걸 보셨을 텐데…… 그것을 못 보고 이렇게 가시다니…….”말을 하던 사내의 훌쩍거림은 점점 커지더니 곧 커다란 울음으로 바뀌었다.
“크흐흐흑, 흐어어엉!”젊은 사내는 곧 바닥을 치며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조기천의 맏아들. 조민규는 그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약간 태도가 이상하긴 했지만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던 사내가 갑자기 서럽게 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을 하신 걸까?’가족들도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이렇게 알게 되는 것 같아 장남 조민규의 표정은 점점 복잡하게 변해갔다.
* * *
한참을 땅을 치며 울던 젊은 사내. 그는 얼굴을 들어 올려 퉁퉁 부은 눈으로 조민규를 바라보았다.
처음의 멀끔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그 안쓰러운 모습에 조민규는 가슴 깊이 반성했다.
가족인 자신보다 더 슬퍼하는 사내의 모습에 크게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누굽니까?”사내는 너무 울어서인지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예?”조민규가 곧장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젊은 사내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을 저렇게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십니까?”“그, 글쎄요.”생각해보니 그때 시신을 건네준 무인이 언뜻 하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다. 근데 정확하게 생각나질 않았다.
당시 조민규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도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비록 집안에서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조민규에게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모양이다.
“무림인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무림이이인!”젊은 사내는 퉁퉁 부은 눈을 번뜩이며 빽 소리쳤다. 그리고 낮게 이를 갈았다. 사내는 다시금 바닥을 치며 애통해했다.
“제가 그렇게 그런 무뢰배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했었건만…….”힘만 쓰는 무뢰배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잃었다. 젊은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바닥에 엎드려 질질 짜던 사내가 눈물 콧물 범벅인 상태로 벌떡 일어나 조민규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걱정 마세요!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아…… 예.”사내는 조민규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가 문득 잊고 있던 걸 떠올렸는지 허둥지둥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며 말했다.
“이건 제 성의입니다. 부디 힘내십시오!”“……예에.”조민규가 그것을 받아 들자 젊은 사내는 옆에 있던 조민규의 어머니에게도 힘내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자제들에게도 연달아 응원을 하더니 다시금 울컥하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훌쩍거리다가 밖으로 나갔다.
사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기천 선생의 가족들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봉투에는 전표가 들어 있었고, 그것은 무려 황금 백 냥짜리 전표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나도 잘 모르겠구나…….”가족들도 몰랐다. 조기천이 대체 바깥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조기천이 산법을 좋아하고 그것에 평생을 바쳤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 * *
“끝나셨습니까?”“예. 다 끝났습니다.”바깥에서 마차를 지키며 대기하고 있던 호위무사는 젊은 사내를 마차 안으로 인도한 후 자신도 그곳에 탔다. 이윽고 마차는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황궁이었다.
“아무래도 대장군님을 만나 뵈어야겠습니다.”젊은 사내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자 호위무사의 눈가가 번뜩였다.
“드디어 결심하신 겁니까?”젊은 사내는 소매로 눈가를 연신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만 제가 너무 늦게 마음을 정해서 대장군님과 다른 분들께 미안할 따름입니다.”“아닙니다. 대장군님께서는 충분히 기뻐하실 겁니다. 대인께서 합류함으로써 모든 것이 완전해졌습니다.”호위무사.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마부에게 시켜 서둘러 대장군부로 마차를 돌리게 지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기뻐하십시오! 드디어 대장군님께서 생각하셨던 모든 패가 갖추어졌습니다.’젊은 사내.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는 그만큼 거대했던 것이다.
* * *
“드디어 자네가 마음을 정해준 겐가!”대장군. 척계광(戚繼光)은 불같은 안광을 빛내며 맨발로 뛰어나와 젊은 사내를 맞이했다.
젊은 사내. 그는 척계광의 이런 적극적인 환대에 몹시도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장군의 부름을 받고도 오랜 시간 망설인 점 죄송합니다.”“아닐세. 이제라도 자네가 마음을 잡아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군.”척계광은 껄껄 웃었다. 오랜 기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짜낸 계획을 실행할 날이 드디어 눈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젊은 사내는 대장군 척계광이 생각했던 최고의 패였다.
세상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이 젊은 사내의 혜지(慧智)는 재상으로 있는 장거정(張居正)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나다.’그저 산법이라는 별난 학문에 파묻혀 있기에 이 사내의 진실된 모습을 세상이 모를 뿐이다.
척계광. 그는 그래서 오히려 이 사내가 더욱 좋았다.
세상에서 주목하든 하지 않든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해나가는 모습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성 또한 순후하니 얼마나 흡족한가?
지닌 바 재능과 지혜를 남에게 과시하듯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악용하지도 않으며,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이런 험난한 시대에 실로 힘든 일이었다.
‘주호유(周虎柳).’ 그것이 이 젊은 사내의 이름이었다.
천하제일산법가. 그것이 이 사내를 부르는 별호였다.
“황상의 은혜를 모르는 불학무식한 무림인들을 이 기회에 완전히 쓸어버려야 하네.”맨 처음 척계광에게 이 제의를 받았을 때 주호유는 망설였다. 대장군 척계광의 기세가 너무도 위험하고 살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호유도 무림인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척계광은 웃었다.
이 사내를 얻은 것은 과거 유비가 재야에 은둔해 있던 제갈량을 얻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내 직접 황제폐하의 윤허를 얻어올 테니 기다리시게나.”“예.”척계광이 의복을 갖춰 입으러 들어간 사이 주호유는 손으로 자신의 퉁퉁 부은 눈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주호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것은 별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호유는 곧 고개를 저었다.
‘무림인들은 전부 다 없어져야 해.’그랬다. 그들은 자신이 지닌 육체적인 힘만 믿고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뢰배들일 뿐이었다.
나라의 법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폭력을 행사하는 흉폭한 무리들. 그들은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사라져야 마땅했다.
‘부디 저에게 힘을 주세요. 선생님.’주호유는 저 하늘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조기천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그에게 처음으로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가르쳐주었던 것이 조기천이었다.
자신 말고도 산법을 그렇게까지 깊이 있게 공부한, 그리고 그것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주호유 일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엄청난 기쁨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허망하게 죽어버렸다. 언제고 다시 만나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주호유의 눈이 다시금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그의 산법을 유일하게 인정하고 이해해주던 조기천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엄청난 상실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근래에 제가 깨달은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주호유는 조기천의 무덤덤한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산법 이야기가 떠올라서 서글퍼졌기 때문이다.
‘당신의 복수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전 무림을 상대로…….
그렇게 천하제일산법가와 함께 황궁의 무력이 강호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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