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7)
제7화 초류향의 진법 만들기(2013.02.04.)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확실히 장로들의 변심은 눈에 띄게 커다란 변화였다.
흑월회의 덩치가 커지면서 이래저래 엄청난 이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객 집단이니 드러내고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을 따로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업 외에 여러 가지 보호 비용 등을 통해 막대한 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천문학적인 금액들은 야황 냉무기가 회주로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이 곧 법이었고, 그가 하는 모든 행위가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재능이 아들인 냉파천에게 있을 리 없었다.
냉파천이 회주직을 물려받자마자 그 단단해 보이던 흑월회의 조직력에 아주 조금씩이지만 균열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나랑 눈도 못 마주치던 노친네들이 어떻게 한순간에 그렇게 변할 수 있지? 세상 참 무서워.”소녀는 아버지의 투덜거림에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다르잖아요. 아버지.”소녀의 직설적인 말에 냉파천은 가슴 아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도 우리 아버지가 대단한 건 인정하지만 내 딸이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네. 슬퍼진다.”“현실을 말하는 거예요, 전.”냉파천의 아버지이자 소녀의 할아버지.
삼황의 한 명인 냉무기와 그의 아들인 냉파천은 그 크기가 짐작되지 않을 만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인격이면 인격, 무력이면 무력.
냉무기는 냉파천과 그릇이 다른 것이다.
“이제야 겨우 할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으니 장로들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고 싶어졌나 보죠. 그냥 포기하세요. 다른 사람에게 회주 자리 물려주고 우리도 그냥 편하게 좀 살아 봐요.”소녀.
삼황의 한 명인 냉무기의 손녀인 그녀의 이름은 냉하영(冷夏榮)이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이름 높아 천하의 재녀(才女)가 될 거라 입이 닳도록 칭찬받던 그녀는 솔직히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예상 못했겠지만 할아버지인 야황 냉무기라면 작금의 사태를 분명히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냥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다는 뜻.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솔직히 아버지였지만 냉파천은 초거대문파로 성장한 흑월회의 회주 자리를 맡기엔 그릇이 모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모자랐다. 무력이야 좋은 핏줄로 인해 절정고수 수준까지 올라갔기에 다소 아쉬운 점은 있더라도 그럭저럭 눈감아줄 만했다.
하지만 인격으로나 지도력을 봐서나 모두 회주 자리를 맡기엔 역량 부족이다.
그에게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능력과 인간적인 매력이 모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냉하영은 지금의 사태를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냉하영은 혼자 고민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천하에 냉무기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리 핏줄이라지만 그토록 무능력한 아들에게 흑월회를 맡겨 놓고, 아니, 방임해 놓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냉하영은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인 냉무기는 은퇴를 선언한 이후 그 행적이 모호했다.
처음에는 냉무기가 은퇴했어도 다들 냉파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 그건 그의 능력에 대한 대우라기보다는 뒤에 있는 냉무기의 그림자가 너무 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흑월회가 급격한 성장을 하며 덩치를 키울 때 사파에서 한가락 한다는 고수들이 봉공과 장로라는 이름으로 영입됐다. 그런 그들도 전관예우 차원에서 냉파천의 회주직을 선선히 인정해 주었다.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을 때 확실히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는데 그러기엔 냉파천의 지닌바 실력이 부족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냉파천의 부족한 실력이 드러나자 장로들은 그제야 억눌렸던 욕심을 꺼내기 시작했다.
흑월회는 앞서 말했다시피 초거대문파였다. 그것도 강호에서 무려 세 손가락에 꼽히는 삼패(三覇)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 정도면 욕심을 부릴 만하지 않은가?
비록 냉무기의 이름이 아직도 그들을 두렵게 했지만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더 이상 그는 이곳에 뜻을 두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걸 확신하면서도 장로들은 조심스러웠다. 냉무기의 거대한 존재감이 그들을 그렇게 겁먹게 한 것이다.
하지만 냉무기가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탐욕의 이빨을 내보이며 냉파천을 들들 볶아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여기까지일 거야.’냉하영이 짐작하기에 이번이야말로 최후의 통첩일 것이다. 장로들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부딪쳤을 테니까. 만약 이번 일도 제대로 못 해낸다면 냉파천의 생각만큼 단순히 혼나는 일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터.
냉하영은 그것이 염려되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를 뵙고 와야겠어요.”“아버지?”냉파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몸을 숨기고자 작정한 냉무기의 행방은 천하의 그 누구도 모른다.
그랬기에 아들인 냉파천도 그동안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딸, 아버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어?”“아뇨.”“그런데 어떻게 만나겠다는 거야?”“짐작되는 곳이 있어요.”냉하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하에 그 누구도 몸을 숨기려고 작정한 냉무기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냉하영은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떠나시기 전에 아버지에게 말했던 걸 잊었어요?”“어디 가신다는 말을 했었나?”아무리 머릿속을 더듬어 봐도 냉무기가 그런 언질을 해 준 기억이 없었다.
냉파천은 정말 심각한 얼굴로 계속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없었다.
“혹시 아버지가 딸한테 그런 말을 따로 해 주셨니?”“아뇨. 어디 가신다고 따로 하신 말은 없었죠.”냉하영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분명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저는 찾을 수 있어요.”냉무기는 떠나기 전 그의 아들인 냉파천에게 회주 자리를 물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쓸데없는 문제들에 치여서 나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이제 나도 할 만큼 했으니 맨 처음 무공을 시작했던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무공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니 웬만하면 귀찮게 하지 마라. 어차피 너는 찾지도 못하겠지만.]그때 냉무기는 말을 하면서 냉하영에게 넌지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냉하영은 그때 이미 냉무기의 말 속에서 숨겨진 다른 뜻을 찾아냈던 것이다.
“기련산(祁連山)에 잠깐 다녀올게요.”기련산.
냉무기가 최초로 기련검마(祁連劍魔)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무공을 배운 곳이었다. 그랬기에 냉하영은 확신했다.
분명히 할아버지는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 * *
하루 푹 쉬고 일어난 초류향은 뒷마당에 서서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쥔 채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스승님이 내준 숙제를 해결하려면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했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식은 이제 보니 여러모로 제한 사항이 많았다. 그랬기에 실행에 앞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때 불현듯 아버지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일을 해 보지 않고서는 그것에 대해 후회할 자격도 없다.’백 번 맞는 소리였다.
초류향은 결국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고 마음을 굳혔다.
제법 결연한 얼굴로 초류향은 바닥에 천천히 선을 긋기 시작했다.
신중한 얼굴.
지금 초류향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만물은 사라지고 오로지 바닥에 그려지는 한 줄기 굵은 선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처음이 제일 중요한 작업이다.’지금 하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즐거움도 있었다.
초류향은 지금 힘을 조절해 가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바닥에 제일 처음 한 줄기의 선을 그렸다. 초류향은 선의 굵기까지 세심하게 조절하여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균일하게 그 깊이를 맞췄다. 그렇게 완성된 선은 기껏해야 어린아이 하나가 누우면 딱 길이가 맞을 정도의 선이었다.
그것 하나를 긋는 데 무려 일다경(15분)이 소모되었다.
“후우…….”그런데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초류향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심혈을 기울여 처음의 선과 평행되는 또 하나의 선을 바닥에 그렸다. 그리고 둘의 대칭을 몇 번이고 확인해 가며 완벽에 가깝게 맞추었다. 그 작업을 시작으로 초류향은 총 여덟 개의 선을 바닥에 그렸다.
무려 반 시진에 걸친 지난한 작업.
하지만 초류향은 묵묵하게 선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선을 다 그리고 나자 초류향의 전신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 정도로 집중한 것이다. 코끝까지 내려온 안경을 다시 올려 쓴 초류향은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으며 자신이 그린 작품을 바라보았다.
“후후…….”바닥에 완성된 작품은 좌우 대칭이 놀랍도록 들어맞는 팔각형이었다. 이것이 바로 조기천 스승님이 수식으로 보여 주었던 그 이름도 모르는 진법. 그것을 직접 바닥에 그려 놓은 것이었다.
‘아직 하나가 남았지.’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작업이 남아 있었다.
팔각형을 감싸는 둥근 원.
그것마저 다 그려 놓아야 비로소 진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초류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팔각형을 덮는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그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며 둥근 원을 완만하게 그려 갔다. 그러다 최후의 순간, 즉 한 번만 손을 대면 원이 완성되는 그 순간 초류향은 멈칫했다.
‘설마…….’수식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이 원이 완성되는 순간 진법이 발동된다. 그리고 한번 발동된 진법은 천하에 다시없을 장사라도 한 번 갇히면 뚫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단단했다.
허나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현실에서 고작 선 몇 개 그어 놓는다고 해서 그런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불신과 믿음.
두 개의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초류향은 갈등하고 있었다.
평소부터 스스로를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생각해 왔던 초류향이었기에 이런 모순적인 갈등은 너무도 생소했던 것이다.
‘정말 될까?’한참을 머뭇거리며 생각하던 초류향은 결국 진법의 바깥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불확실한 것에 도박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와 원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시켰다.
‘이제 된 건가.’초류향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완성된 진법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조기천 스승님이 단순히 수식으로 표현했던 진법은 지금 초류향의 손에서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수식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지금 저 안은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압력이 작용하고 있을 터. 비록 그 크기를 십분의 일로 줄여서 그렸기에 위력 역시 그만큼 줄어들었겠지만 그래도 저 안에는 사람이 감히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었다.
‘정말 그럴까?’진법을 바라보던 초류향의 자세가 조금 편안해졌다.
시간이 지나도 진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서 의심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정말 저 안에서 수식에 적혀 있던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수식대로라면 저 안에 들어가는 순간, 단순한 압력뿐만이 아니라 광폭한 태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환상이 쉼 없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다가 결국 실체가 되어 안에 들어간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믿기 어렵다.’불신감이 빳빳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묘한 것은 차마 저 안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끙…….”초류향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한동안 진법 주위를 빙빙 맴돌며 갈등했다.
처음에 진법을 이렇게 직접 그린 이유는 단순했다. 수식으로는 도저히 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직접 그려 보고 몸으로 부딪쳐 보면 해답이 나오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진법을 완성하고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건 직접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해결 방법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한참을 열병 걸린 환자처럼 끙끙 앓으며 고민하던 초류향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저 안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안전을 확실히 보장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윽고 초류향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숙소로 돌아갔다.
잠시 후 초류향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시 나왔다. 족히 삼 장(9미터)은 되어 보이는 굵은 밧줄. 그것을 뒷마당에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에 꽉 묶은 후 본인의 허리에도 단단히 동여맸다. 그러자 조금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서야.’실제로 진법이 제대로 발동할지조차 의문이었지만 만약을 대비한 것이었다. 진법이 발동하면 허리에 묶은 밧줄을 잡고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한 것이다. 애초에 과연 진법이 발동할지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로 철저히 대비책을 세우는 꼼꼼한 면모를 보인 초류향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발을 진법 안으로 밀어 넣었다.
탁-
발이 진법 안에 들어가 바닥을 내딛자 본능적으로 몸을 바짝 움츠린 초류향은 잠시 후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잔뜩 긴장했건만 막상 들어가 보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발을 어정쩡하게 진법 안으로 집어넣고 나머지 한 발은 깨금발로 선 채 진법을 살펴보았다.
‘……몸 전체가 들어가야 발동되는 거였던가?’초류향은 빠르게 머릿속에 저장된 수식을 되짚어 보았지만 거기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안도감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실망감이 전신에 내려앉았다. 내심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초류향은 복잡미묘한 얼굴로 나머지 한쪽 발을 들었다. 그리고 입맛을 다셨다.
‘정말 몸이 완전히 들어가면 진법이 발동할까?’하지만 이미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회의적인 기분에 빠진 것이다.
한 시진 정도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든 것이 아무런 효용도 없다고 생각하니, 허탈감이 전신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류향은 허리에 매여 있는 밧줄을 한 번 더 매만졌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까.’만사불여튼튼이라는 말이 있다.
만에 하나라는 확률로 진법이 발동된다면 지금으로선 이 밧줄이 가장 확실한 생명줄이 될 것이다.
‘간다!’초류향은 속으로 기합을 내지르며 남은 한쪽 발마저 진법 안에 집어넣은 다음 눈을 부릅떴다.
“……!”역시, 씁쓸한 일이지만 진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허리에 매여 있는 밧줄.
그것을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는 두 손이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초류향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면 민망함에 자결이라도 했어야 할 기분이었다.
‘참담하군.’초류향은 한참을 진법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곧 어색하게 웃으며 바닥에 그려져 있던 선을 발로 슥슥 지웠다. 누군가가 볼지도 모르는 흔적조차 이제는 남겨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승님이 농담도 하실 줄 아는 거였나.’그렇게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로 농담을 하고 있는 조기천 스승님을 떠올리니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님이 적어 준 수식에는 진법 안에 들어가면 정말 경천동지할 엄청난 광경이 펼쳐진다고 적혀 있었다.
한데 막상 실제로 뚜껑을 열어 보니 이건 너무도 허무맹랑한 결과가 아닌가?
이게 단순히 농담이라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참담한 결과였다.
‘질 나쁜 농담을 하셨습니다.’속으로 그렇게 스승님을 원망하며 진법의 흔적을 지워 가던 초류향은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바닥을 지우던 발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변수!’생각해 보니 수식에서 어렵게 찾아낸 여덟 개의 변수를 이 진법에는 그려 넣지 않았다. 아니, 그려 넣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변수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변수라 불린다.
그것을 대체 어떻게 진법 안에 그려 넣어야 한다는 말인가?
의문이 떠오르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초류향은 밧줄을 손에 쥔 채로 어정쩡하게 서서 그렇게 한참을 궁리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작은 실마리에 다시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내부에서 변화하는 수 중 하나가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와야 하는 수였다면?”할 수 있는 모든 계산을 다 해 봐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초류향은 허리에 묶인 밧줄을 허둥지둥 풀고 뒷마당을 미친 망아지처럼 한참 동안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초류향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여덟 개의 제각기 다른 모양의 돌멩이들. 그것들을 손에 든 초류향은 환하게 웃었다. 마치 금덩어리라도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이게 바로 변수였던 거야. 똑같지만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수!”돌멩이들은 그 모양이 제각각 다르다.
아니, 처음부터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형태의 돌멩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그렇게 만들려 해도 절대 만들 수 없다. 아무리 돌멩이들이 같은 성분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도 그 크기나 모양, 무게는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물체라 해도 그 모든 것의 형체와 내용을 다르게 만드는 게 자연이다.’게다가 초류향은 사물의 근원적인 가치를 볼 수 있는 정관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가져온 이 돌멩이들은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변수가 되어 진법을 완성시켜 줄 게 틀림없었다.
초류향은 나뭇가지를 다시 주워 와 바닥에 진법을 그렸다.
처음처럼 엄청 신중하지도 세심하지도 않았지만 거침없이 훼손된 진법을 완성시켜 나갔다. 그렇게 처음과는 미묘하게 다른, 약간 헐거워 보이는 형태의 진법이 완성되었다. 초류향은 그 진법 안에 서서 돌멩이들을 팔각형의 꼭짓점 부분에 하나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깨달음이 찾아온 것일까?
돌멩이를 하나씩 내려놓는 초류향의 손길은 거침없었고 흥분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진법 역시 처음부터 세심하게 맞춰 가면서 그릴 필요가 없었다. 기운이 의도한 대로 흐를 수 있게만 그려 놓아도 알아서 발동할 터.’만약 모자라게 그려진 부분이 있다면 기운이 모여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울 것이다. 과하게 그려져 있다면 기운이 알아서 그곳에서 빠져나올 터. 그렇게 하나를 깨달으니 다른 깨달음이 연속적으로 찾아왔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깨달음으로 인해 초류향은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 버렸다.
마지막 돌을 팔각형의 꼭짓점에 올려놓은 바로 그 순간.
“어?”초류향의 몸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