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85)
제85화 봉인(2013.10.31.)
“네 죄를 이제 알겠냐?”피투성이가 된 백발의 사내.
사내는 절굿공이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겨우겨우 지탱하며 웃었다.
“……웃기는군. 과거 개망나니였던 네놈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퉤!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백발의 사내 앞.
그곳에는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검은 머리의 미남이 서 있었다.
흑발의 미남은 쓰러지기 직전인 백발의 사내를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슬며시 웃었다.
“그래도 나를 만났으니 너는 운이 좋은 편이다, 편목(便木).”흑발의 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백발 사내의 바로 앞에 작은 부적을 하나 떨구었다.
그 부적을 바라보던 백발 사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나에게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손오공?”손오공.
하늘에 있는 모든 신장들의 왕이자 현재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 불리는 그가 피식 웃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나도 예전에 말썽을 많이 부려 봐서 말이야, 지금 네 심정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다.”“……개소리하고 있네.”“뭐, 사실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 다음의 야차왕(夜叉王:모든 요괴들의 왕)이 고작 이런 곳에서 죽는 걸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겠더라고.”파아앗-!
부적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조금 전까지 백발 사내가 있던 곳에는 작고 귀여운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 이게 대체…….]“크크, 역시 태상노군이 만든 부적은 효과가 좋군. 그 영감탱이 잔소리만 좀 줄이면 더 좋겠는데.”손오공이 작게 중얼거릴 때, 토끼가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보였다.토끼는 양손을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만져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토끼를 내려다본 손오공이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그나저나 네 녀석, 본래의 모습은 제법 귀염성이 있구나? 그 모습으로 하계에서 숨죽이고 살아라. 스승님께서는 기억력이 나쁘시니까, 천 년 정도만 납작 엎드려 있어.”쿠궁- 쿠쿠쿠쿠궁-!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토끼가 서 있던 바닥이 사방으로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바닥 사이로 새하얀 구름들이 보였다.
솜털 같은 구름.
그 사이로 토끼는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래로 멀찍이 사라지는 토끼를 보며 손오공이 말했다.
“아, 맞다. 운이 좋아서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만한 녀석을 만난다면, 조금 일찍 봉인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희망을 가지라고, 귀염둥이.”귀염둥이라는 말에 토끼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손오공! 반드시 네놈을 찢어 죽여 버리겠다!]“푸흐흐, 고작 네놈 정도의 실력으로는 만 년은 이르지.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마.”* * *
토끼.
과거 천계에서 난동을 부리다 지상에 떨어져 봉인되어 있던 그는 지금 몹시 즐거웠다.
[하계도 재미있구나.]쩌엉-! 쩌어어엉-!“큭!”절굿공이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운휘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움찔 몸을 떨어야 했다.
‘타격점을 빗겨냈는데도 이 정도라니…….’정통으로 맞는 것도 아니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힘을 흘려내는데도 어깨가 뻐근해질 정도의 파괴력이 느껴졌다.
운휘가 난감해하는 것과 반대로 토끼는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전성기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힘이지만, 그 정도야 지금의 토끼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지금만큼의 힘만 있어도 화인(화경의 고수) 서너 명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부족해.]아쉬웠다.아무래도 봉인을 당해서 너무 오랜 시간 힘을 구속당한 영향이 컸다.
아직도 몸 안에 있는 신력(神力)이 그의 의도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도 토끼는 만족했다.
힘이야 시간이 지나면 차차 회복되기 마련이니까.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복면을 쓴 녀석이 뒤로 멀찍이 밀려나갔다.
토끼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일부러 정타로 맞았어?’이유가 뭘까?
그동안 열심히 힘을 옆으로 흘려대기에 모르는 척 정면으로만 때려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뭔가 노림수가 있겠구만.’그게 뭘까?
내심 크게 기대가 되었다.
토끼는 흐뭇한 표정으로 바로 공격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저 복면 쓴 녀석이 대체 무얼 노리는 걸까?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전혀 의외의 공격이 들어왔다.
복면 쓴 녀석의 등에 업혀 있던 꼬마가 갑자기 바닥에 내려서며 피곤한 얼굴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이것마저 파괴하면 네 뜻대로 해라.”그리고 품 안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어 땅에 힘차게 박았다.
토끼는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로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릿속에서 위험을 경고하는 소리가 울렸다.
‘저 꼬마 놈은 아무래도 위험하지.’굉장히 드문, 강력한 결계를 쓰는 놈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나무와 바닥에 보석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우웅-!
좋지 않은 느낌과 불길한 진동.
토끼는 재빨리 움직였다.
파지지직-!
[크윽!]요란한 소리와 함께 토끼가 허공에 부딪히고 물러났다.결계가 완전히 발동되기 전에 빠져나가려 했는데 어떤 강력한 힘이 토끼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젠장! 대체 언제?]범위가 엄청나게 넓었다.이 정도로 거대한 진법이라면 어쩌면 정말로 위험할지도 모른다.
토끼가 다시 한 번 힘을 쓰려고 기운을 모을 때, 꼬마가 얼굴에 쓴 유리(안경)를 쓸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이제 그만 네가 살던 월궁으로 돌아가라, 광묘(狂卯:미친 토끼).”[웃기지 마라, 꼬맹아.]토끼는 이를 갈며 더욱 빠르게 기운을 모았다.
‘한 방에 부숴야 한다.’결계가 완전히 발동되기 직전인 지금이라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웅웅웅-!
토끼가 절굿공이에 모아놓은 힘을 막 뿜어내기 위해 집중하는 순간, 꼬마가 복면을 쓴 녀석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복면 쓴 녀석이 무심하게 단검을 휘둘렀다.
퍼엉-!
단검 끝에 모여 있던 붉은색 기운이 토끼의 안면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켁!]모았던 기운이 빠르게 흩어지고, 토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복면을 쓴 놈을 노려보았다.그러자 꼬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설마 순순히 힘을 쓰도록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했나?”[…….]토끼는 벙찐 얼굴을 했다가 곧 툴툴 웃었다.
그랬다.
기다려줄 리가 없는 것이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랬나? 감각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 순간.
파앗-!
사방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며 토끼의 신형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
털썩-
토끼가 완전히 진법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을 확인한 초류향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엄청난 정신력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해냈다.’토끼와 싸우며 불규칙적으로 이동하는 운휘의 등에 업힌 채, 초류향은 그때그때 가지고 있던 보석들을 사방에 흩어 놓았다.
이동 경로가 워낙 일정하지 않아서 좀처럼 진법을 완성할 결정적인 기회가 없었는데, 토끼 녀석이 여유 부리다가 그 틈을 만들어주었다.
너무 복잡한 계산식이었다.
고려 대상도 많았고, 배제해야 될 변수도 많았지만 결국은 완성한 것이다.
‘이것도 부술 수 있을까?’초류향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진법은 초류향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진법 중 하나인 현령천무대진(顯靈天武大陳)을 기본으로 삼아서 상황에 맞게 약간 변형한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게 단점이지만 일단 발동만 되면 내부에서는 절대 힘으로 부술 수가 없다.
이것은 과거 조기천 스승님이 말해주었던, 현재 황실에 펼쳐져 있는 초거대, 초강력 진법이니까.
‘그래도…….’무언가가 찜찜했다.
워낙에 상대가 측정되지 않는 변수 그 자체라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지친 얼굴로 진법을 바라보고 있는데 운휘가 다가왔다.
“아무래도 몸을 피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초류향이 고개를 끄덕일 때, 운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좌측을 응시했다.
‘누군가 온다?’운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단검을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재빨리 감각을 넓혀서 다가오는 기척을 세어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도합 열두 명.
게다가 이동하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무림인들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미파의 비구니들인 것 같습니다.”그랬다.
이곳은 아미파의 영역.
그들이 움직여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곳이었다.
아미파의 고수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초류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은 아미파와 부딪칠 때가 아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물러서야 하는 것이다.
“물러서야 되겠습니다.”운휘는 초류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초류향과 같은 생각이었다.
굳이 먼저 이쪽에서 저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운휘가 초류향에게 물었다.
“구지난약화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구지난약화요?”“예, 희대의 영초(靈草)입니다. 전설로만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던 물건입니다.”초류향은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아까 전에 봤었던 그 꽃은 척 보기에도 특이하긴 했다.
너무도 선명하고 짙은 푸른색이 아니던가?
정관법으로 바라보았던 물건 중에 그렇게 선명한 푸른색 숫자를 지닌 물건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회수하도록 하죠.”“알겠습니다.”운휘는 초류향을 업자마자 빠르게 이동해서 구지난약화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 순간 초류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갔으면 후회할 뻔했군요.”“예.”아까는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근처에 가기만 해도 선향(仙香)이 진동했다.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다.
초류향은 운휘에게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는데 구지난약화의 꽃잎이 갑자기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떨면서 꽃이 스스로 초류향의 손길을 피하는 것이다.
“어?”그 신기한 모습에 초류향이 잠시 멈칫거릴 때.
뒤에서 운휘가 말했다.
“구지난약화는 따로 기사회생, 혹은 활생초(活生草)라는 별명이 있는 영초입니다. 사람처럼 감정과 의식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게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습니다.”가만히 운휘의 설명을 듣고 있던 초류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약초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운휘는 초류향의 물음에 약간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쪽에 관심이 있어서 조금 공부를 했습니다.”사실 조금 공부한 수준이 아니었다.
약제당의 선우조덕이 탐을 냈을 정도로 운휘는 의학 방면에서 나이에 비해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었으니까.
굳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운휘였다.
“죽이지 않고 가져갈 수는 없는 것입니까?”꽃을 꺾는 것은 쉬워 보였다.
하지만 왠지 생명체를 죽이는 것 같은 느낌에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 마음을 짐작한 것인지 운휘는 잠깐 생각하다가 불쑥 질문했다.
“이 주변에만 나무가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초류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듣고 보니 그랬다.
왜 이 주변에만 나무가 없을까?
진법의 영향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구지난약화의 뿌리가 그만큼 넓게 퍼져 있다는 소리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주변 땅의 기운을 모조리 빨아먹었기 때문이죠.”“음…….”초류향의 마음을 생각해서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구지난약화를 가져가려면 꽃을 꺾어야 된다는 소리다.
초류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네요.”그리고 주변에 있는 돌멩이들을 줍더니 가볍게 공터 이곳저곳으로 던졌다.
“이쪽으로 오세요.”초류향이 손짓하자 운휘가 재빨리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소교주가 진법을 펼치리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운휘가 바깥으로 나오자 초류향은 돌멩이 하나를 만지작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힘껏 던졌다.
진법을 펼치던 공터가 아니라 옆에 나무숲이 있는 곳으로 집어 던진 것이다.
운휘가 의아한 얼굴을 할 때.
초류향은 바닥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발로 툭 차서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눈앞에 있는 빈 공터에 갑자기 빽빽한 나무숲이 생겨났다.
“허?”운휘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헛바람을 내뱉자 초류향이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처음 해 본 건데 다행히 잘 되었네요. 이제 가시면 됩니다.”이런 요술 같은 것을 처음 해 본다고?
운휘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을 툭툭 털며 말하는 초류향을 잠시 괴물 보듯이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업었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이동하는 도중에 운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소교주는 더욱 엄청난 경지에 이르러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등에 업혀 있는 가벼운 무게를 느끼며 운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다짐했다.
‘평생을 지키겠습니다.’이 아이가 과연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 꼭 보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낼 것이다.
설사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결심하는 운휘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