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Shura RAW novel - Chapter (87)
제87화 뜻밖의 만남(2013.11.07.)
피곤한 하루였다.
초류향은 노곤해진 몸을 풀며 숙소에 들어와 침상에 누웠다.
털썩-!
운휘의 기척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신경이 쓰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의 존재를 느끼면 적잖게 안심이 되었다.
그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이다.
‘믿음이라…….’그랬다.
어느새 운휘에게 이런 감정이 생겨버린 것이다.
초류향은 볼을 긁적이며 침상에서 몸을 한번 뒹굴거렸다.
혼자 눕기엔 지나치게 넓은 침상.
그곳에 누워 초류향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달 토끼라…….’맨 처음 토끼가 절굿공이를 꺼내 드는 순간, 그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그런데 웃지 못한 것은 토끼가 뿜어내는 엄청난 기운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녀석 분명 즐기고 있었지.’운휘와 그렇게 살벌하게 싸우면서도 토끼는 시종일관 즐거워 보였다.
순수하게 싸움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
생긴 건 그렇게 귀엽게 생겼으면서 성격은 정반대로 엄청 호전적이었다.
그런데 그 토끼가 왜 자신에게 달려들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의문이었다.
잠시 토끼를 두고 이것저것 고민하던 초류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토끼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려나?’아마 지금쯤이면 토끼를 가둬놓은 현령천무대진이 후반부에 도달했을 것이고, 토끼는 이미 진 속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 그 무지막지한 토끼가 어찌어찌 버텨냈더라도 그것이 끝이었다.
초류향이 진법의 마지막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경해놓았기 때문이다.
‘진법과 함께 사라져라.’토끼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능력과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이제 관심 밖의 일이었다.
초류향이 보았을 때 토끼는 지극히 위험한 존재였다.
게다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위험 요소가 자신에게 죽자고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독하게 손을 쓰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삼십육 문의 두 번째…….’현령천무대진은 총 마흔 개의 문이 있었고, 그 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지옥 같은 난관이 진법 안의 생명체를 덮쳤다.
그중에서 후반부인 삼십육 문.
삼십육 문에서 두 번째에 이르는 곳에 약간의 수작을 부려놓았다.
감당 안 되는 힘이 폭주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원래 약속되어 있던 요소가 아닌 미묘하게 다른 요소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아마 진법이 감당하지 못하고 아예 통째로 터져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 역시 처음 해 보는 시도였지만 잘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순간 초류향은 멈칫했다.
‘나는 방금 왜 잘되었을 거라 확신한 거지?’초류향은 누워 있는 상태로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막연하게 잘되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느낌뿐인 것이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이런 느낌이나 육감같이 불확실한 것은 신용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이유가 없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확신했다.’초류향은 잠시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한번 그려보면 그것은 항상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이 되었다.
‘숫자로 세상이 보여서 그런 건가…….’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초류향은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감고 토끼와 운휘의 싸움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때의 격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그들의 싸움을 처음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구현할 수 있었다.
‘나 같으면 여기서 이렇게 했을 텐데…….’싸움을 계속 지켜보다가 초류향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불쑥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될까?’직접 이 싸움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을까?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그렇다면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머릿속에서의 상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초류향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자마자 정신을 집중해보았다.
그리고 눈을 반짝였다.
‘된다!’아주 잠깐씩 토끼의 입장에서 무공을 펼치다가, 어느새 운휘의 입장이 되었다.
그게 익숙해지자 초류향은 제삼자가 되어 둘의 협공을 받아내기도 해 보았다.
이건 실로 묘한 경험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수라환경과 월인도법의 화려하고 막강한 초식들이 도도(滔滔)하게 풀어져 나왔다.
아직 펼칠 힘을 감당할 만한 그릇을 완성하지 못해서 머릿속으로만 가지고 있어야 했던 어마어마한 무공들.
그것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엄청나다.’초류향은 감탄했다.
그렇게 초류향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머릿속으로 무공을 연마하는 최상승의 방법.
심상(心想:마음의 고련이나 깊은 생각)을 터득한 것이다.
* * *
[좀 자라, 이 새끼야…….]토끼는 멀찍이 떨어진 산속에 서서 초조한 눈으로 안경잡이 꼬마가 있는 집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토끼의 눈은 아주 특별했다.
화정금안(火正金眼).
일종의 천리안(千里眼:먼 곳에 있는 것을 보는 눈)과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금 초류향은 집 안에 있었지만 토끼의 눈은 거칠 것이 없었다.
초류향의 솜털까지 아주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건물의 벽 따위는 애초에 토끼의 눈앞에서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원하는 것을 말끔하게 투시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젠장…….]저놈은 아까부터 잘 듯 말 듯 누워서 뒹굴거리기만 하고 잠을 안 자고 있었다.저놈이 빨리 잠이 들어야 그래도 하나 생각해두었던 방법을 써볼 수 있을 텐데…….
토끼가 그렇게 끙끙 앓고 있을 때.
드디어 초류향이 고른 숨소리를 흘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토끼는 잠시 숨죽인 채 그 모습을 살펴보다가 특유의 커다란 앞니를 드러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들어가 볼까?]오랜만에 해보는 술법(術法)이라 제대로 먹힐지는 의문이지만 고작 인간 꼬마에게 펼치는 것이다.결코 실패할 리가 없었다.
호흡을 고르던 토끼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솔직히 즐거웠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를 이제부터 마음껏 괴롭힐 생각을 하니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웠다.
‘크흐흐, 진정해야지.’벌써부터 이렇게 흥분해서는 곤란하다.
앞으로 얼마나 즐거움이 많이 남았는데,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된다.
토끼는 그렇게 들뜨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귀를 최대한 쫑긋 세웠다.
그 후 마치 쓰러지듯이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토끼의 몸이 갑자기 하얀 안개처럼 변하며 초류향이 머물고 있는 거대한 장원으로 기척도 없이 스며들었다.
하얀 안개는 망설이지 않고 초류향의 거처에 들이닥쳤다.
허나…….
‘엇?’토끼는 당황했다.
초류향이 분명 정면 앞에 있는데 다가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주변을 맴돌던 토끼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을 내뱉을 뻔했다.
‘망할! 결계다.’이 꼬맹이 자식은 잠을 자면서도 그냥 자지 않았다.
침상 주변에 결계를 펼쳐두었던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신변 안전에 신경 쓰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놈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던 토끼가 눈을 빛냈다.
‘구멍이 있다?’단 한 곳.
천장에 구멍이 있었다.
딱 사람 한 명이 들락거릴 수 있는 작은 빈틈.
‘푸흐흐, 그럼 그렇지. 네놈들이 이 어르신의 눈을 속일 수 있겠느냐?’토끼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올 뻔한 웃음을 겨우 참았다.
토끼의 눈인 화정금안은 진리를 꿰뚫어 보는 눈이다.
설령 아주 작은 틈일지라도 빈틈이 있다면 놓칠 리가 없었다.
금세 희희낙락하며 그곳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꼬맹이가 이곳에 구멍을 뚫어놓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크크, 이 복면을 뒤집어쓴 놈을 믿었군.’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
천장에 위치한 바로 그 자리에 운휘가 정좌한 채로 앉아 있었다.
토끼는 운휘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지금 그가 펼치고 있는 술법.
운둔술(雲遁術)은 신체를 구름으로 바꾸는 매우 고도의 술법이었다.
초감각을 열었다고는 하지만 운휘는 인간.
인간은 결코 알아볼 수 없는 최상승의 술법이었다.
토끼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 명상에 잠겨 있는 운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그렇게 실컷 운휘를 놀려주고 난 뒤, 토끼는 곧장 진법 안으로 들어섰다.
‘크흐흐, 어떻게 괴롭혀줄까?’잠이 들어 있는 초류향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던 토끼는 곧 좋은 생각이 들었는지 음충맞게 웃으며 초류향을 향해 달려들었다.
슈우우욱-!
“으음…….”초류향은 콧속으로 스며드는 안개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결국 깨어나진 못하고 다시 평안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뭐야, 여기는?]기껏 정신세계에 들어왔더니 맨 처음 마주한 것은 온통 새까만 공간이었다.이토록 어두운 정신세계라니.
토끼는 안경잡이 꼬마 놈의 타락한 정신세계에 감탄하며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마 열 걸음 남짓 걸었을 때.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런데 넌 뭐하는 놈이냐?]토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의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부채를 들고 있는 노인이 나타났다.제갈량.
그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토끼를 잠시 측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쯧, 네 녀석이 이리로 올 줄 알았다. 편목.”토끼의 눈이 일순 동그랗게 떠졌다.
[어? 네놈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제갈량은 섭선 끝을 매만지며 흐릿하게 웃었다.“네 이마에 그렇게 쓰여 있지 않느냐?”토끼는 제갈량의 태연한 대답에 당황한 얼굴로 한걸음 물러서며 스스로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토끼가 서 있던 바닥이 크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발동한 것이다.
[너, 이 자식…….]그제야 함정에 빠진 것을 알게 된 토끼였다.동시에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알게 된 토끼는 다급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곧 무언가를 깨닫고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네놈 술법사였더냐? 헌데 고작 인간이 펼치는 술법 따위로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제갈량은 그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물론 술법으로는 네놈을 상하게 할 수 없겠지. 꼴은 그래도 선인(仙人)이니까.”토끼의 눈꼬리가 작게 움찔거렸다.
이놈은 대체 무엇인데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게다가 남의 정신세계에 이런 괴상한 공간을 만들어 놓은 놈이라니?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토끼를 덮쳐왔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 너한테 펼친 것은 술법이 아니다. 네놈 전에 왔던 어떤 고약한 손님 덕분에 특별히 신경 써서 손을 봐 놓은 물건이지. 그러니 아마 그렇게 실망스럽진 않을 게다.”쿠드드득-!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회오리치는 시커먼 구멍.
토끼는 잠시 몸을 띄웠다가 구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엄청난 흡인력(吸引力:끌어당기는 힘)에 낮게 혀를 찼다.
그리고 제갈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술법 따위로는 절대 내 몸을 상하게 할 수 없다. 이건 쓸데없는 짓이다, 인간아.]“글쎄……. 그건 겪어보면 알겠지.”토끼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그러자 토끼를 집어삼킨 구멍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원래의 평평한 공간으로 돌아갔다.
제갈량은 그 장소에 서서 구멍이 있던 곳을 바라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인간을 너무 우습게보지 말아라, 요괴 선인(妖怪仙人:요괴 신선). 이것은 내가 너에게 주는 작은 교훈이다.”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살펴보던 제갈량은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급적 녀석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거늘…….”그가 초류향의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반칙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건 너무 엄청난 편법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되도록이면 외부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처럼 특이한 경우에는 정말 어쩔 수가 없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문제 덩어리들을 끌고 오면 별수 없지.”그나저나 저 토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섭선을 가볍게 부치며 잠시 고민하던 제갈량은 이내 마음을 정했다.
저 토끼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온 녀석이었다.
겸사겸사 이번 기회에 험한 꼴을 당하게 해서 그 높은 콧대를 꺾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게 이 꼬마 녀석에게도 도움이 되겠지.”그러고 보니 이런 특이한 녀석이 꼬마 곁에 있다면 제법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제갈량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 지옥 밑 구덩이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토끼를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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