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0
제09화 꺼져!
와옥 마당 한 가운데 흉포한 인상의 대머리 노인이 서 있었다.
나는 괴선에게 들었던 별호와 이름과 이력을 상기했다.
독두귀도(禿頭鬼刀) 오숭(吳崇).
오숭은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사십대 중반까지 그저 그런 칼잡이에 불과했던 오숭은 광세기연이라도 만났는지 어느 날 갑자기 절정 극상의 고수가 되어서는 성주 무림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연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단숨에 성주 팔대고수의 한 자리를 꿰찼다.
그렇게 무명(武名)을 날린 오숭은 추종자들을 규합해 방파를 창립했다. 그가 세운 백도방은 단기간에 세를 불리더니 급기야 성주 무림의 터줏대감인 창궁창파를 몰아내고 알짜배기 땅인 고양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그 이후에도 성장을 거듭한 백도방은 근간에 이르러서는 태극검문과 더불어 성주 무림의 쌍벽을 이루는 거대방파로 인정받고 있었다. 오숭의 무위도 꿈의 경지인 초절정에 들어섰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나보다 먼저 나갔던 노인은 오숭의 발 앞에 오체투지하고 있었다.
“이 아이를 놓아주시오, 방주. 부디 약조를 지켜…….”
“갈(喝)!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네, 홍 태사. 다시 한 번 함구령을 어기면 아예 저 아이의 멱을 따버릴 걸세.”
노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노인에게 재갈을 물린 오숭이 나에게 시선을 맞췄다.
“제법 손속이 매섭더구나. 하지만 손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치러야 할 게다. 넷은 턱이 깨졌고 나머지 하나는 가슴이 함몰되었더구나.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게 본방의 철칙인 바, 너도 내 수하들과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마. 아, 턱을 네 번 부수는 건 너무 가혹하니 세 번은 팔다리로 대신하자꾸나. 사지 중 하나는 남겨둘 테니 기어 다니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게다.”
나는 항변했다.
“그들이 나를 먼저 공격했소. 나는 정당한 방어…….”
오숭이 내 말허리를 잘랐다.
“공격했소? 혀가 짧구나. 불경의 죄를 추가해 남은 사지도 마저 부러뜨려야겠다. 몸뚱이로 굴러다녀야 할 테지만 네가 자초한 일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나와 오숭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인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부르짖었다.
“이럴 순 없소, 방주. 차라리 나를…….”
“호오, 이제 보니 저 아이를 죽일 심산이로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또 내 칼을 빌어…….”
“절대로 그런 뜻이…….”
“닥쳐라. 쓸모가 없어진지 오래여도 옛정을 생각해 대접해 주었더니 분수를 모르는군. 네 원대로 저 아이 목을 날린 연후 나를 능멸하고 거역한 죄를 물을 터이니…….”
오숭이 말을 뚝 멈췄다. 그러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나는 이죽거렸다.
“어라, 들었어? 귀도 밝군, 대머리. 입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뭐, 개 같은 놈이라고 했어. 아! 개보다는 쥐새끼가 어울리겠군. 벽 뒤에 숨어서 남의 얘기를 몰래 엿들었으니. 흠, 짹짹거리는 양은 참새하고 비슷하군. 참 이것저것 골고루 흉내 내는군, 대머리. 재주도 좋아.”
분기가 너무 심하게 뻗쳤는지 오숭이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제 보니 미친 놈…….”
“또 뭘 봐? 보는 건 그만하고 재롱이나 떨어 봐, 대머리.”
오숭은 말을 잘 듣는 위인이었다. 벼락 같이 발도해서는 나를 겨냥해 무시무시한 칼바람을 날린 것이었다.
나는 오숭이 날린 도기에 맞불을 놓지 않고 물러섰다.
퇴(退)에 섬(閃)을 실은 내 신형이 뒤로 튕겨나갔다. 칼바람이 내 잔영을 할퀴고 지나갔다.
도풍을 피해냈으나 나는 혼란스러웠다. 오숭이 도기(刀氣)를 날렸을 때 후퇴하는 대신 허를 찔러 기습했더라면 그를 끝장낼 수 있었다. 방심하고 있던 오숭은 속절없이 목을 내주어야 했을 것이었다.
내가 초전박살의 수순을 포기한 건 노인 때문이었다. 오숭 앞에 엎드려 있던 노인은 나와 오숭의 충돌에서 파생된 경기에 휩쓸려 즉사했을 터였다. 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전권을 옮겨야 했다.
나는 내 즉흥적인 결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째서 아버지의 원수를 보호하고자 했던가. 고통 없이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심산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내 본심을 들여다보기가 싫어 나는 오숭과의 대결에 집중했다. 기실 다른 생각을 하며 한 눈 팔 때가 아니었다. 오숭은 강기를 구사한다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내가 칼바람을 피해내자 오숭이 칼에 주입한 공력을 배가시켰다.
한층 거세진 도풍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섬이 가미된 회(回)와 절(折)로 섬뜩하고 살벌한 도기를 흘려낸 나는 철봉과 옥소를 빼들었다. 전력을 다할 작정이었다. 백도방의 칼잡이들이 달려오기 전에 오숭을 잡아야 했다.
옥소로 펼친 기(氣)의 그물로 오숭을 묶은 나는 철봉으로 뇌전을 퍼부었다. 내 공격에 놀란 오숭이 허둥댔다. 하지만 역시 이름값을 하는 자였다. 평정심이 흐트러진 와중에도 현란하게 칼을 부려 뇌전들을 쳐내더니 내가 그에게 덮어씌웠던 도망(刀網)도 끊어냈다.
그를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나는 주도권을 틀어쥐었다. 내 공세에 밀린 오숭은 대나무 숲까지 쭉 밀렸다. 그러나 그에게도 전세 역전을 가져다 줄 수단이 있었다. 강기였다.
우우웅.
도강(刀剛)을 두른 오숭의 보도(寶刀)가 맹수의 포효 같은 도명(刀鳴)을 일으켰다. 나는 퇴를 발하지 않고 과감하게 철봉을 들어 오숭의 칼을 막아냈다. 강기의 위력을 맛보고 싶어서였다. 칼과 부딪친 순간 전신의 뼈마디가 울렸다. 짜릿했다.
오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멀쩡해서 만이 아니라 강기를 머금은 보도에 직격당하고도 철봉이 잘리거나 뭉개지지 않아서 놀란 것이었다. 기실 털보 아저씨가 물려준 철봉은 투박한 모양과 달리 운철(隕鐵)과 한철(寒鐵)로 제조된 절대병기였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옥소 또한 철봉 못지않은 강도를 지닌 기물(奇物)이었다.
나는 오숭이 동요한 찰나의 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가 날린 뇌전은 그의 복부에 꽂히지 않고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까웠다. 세 치만 더 갔어도 외상을 입혔을 텐데. 그랬으면 단숨에 승기를 잡았을 텐데.
강기를 뽑아내고도 우위를 점하기는커녕 내 암습으로 낭패를 볼 뻔했던 오숭은 방어에 치중했다. 나는 그가 발을 뺄 심산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승리는 내 것이었다. 무력과 무관하게 전의를 잃은 자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오숭을 몰아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떨어져야 했다. 대나무 숲에서 여러 줄기의 그림자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수하들이 가세하자 사기가 오른 오숭은 기세를 되찾았다.
나는 재빨리 형세판단을 했다. 오숭과 일곱 도객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전망하더라도 공멸이 최선의 결과였다. 그들을 처치하자고 내 목숨을 내주는 건 손해였다.
그렇지만 나는 등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강호에 나와서 처음으로 치르는 전투에서 퇴각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무모한 오기는 아니었다. 내게는 백도방 패거리를 제압할 비력이 있었다.
나는 그 힘을 사용해 오숭과 칼잡이들을 쓸어버릴 참이었다. 그런 연후 후유증이 나타나기 전에 야산으로 이동해 지난 며칠 간 신세를 졌던 동굴에 은신할 작정이었다.
마음을 굳힌 내가 골수에서 원력을 끌어내려는 찰나 허공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린 화염은 나와 오숭을 갈라놓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끼어들어 격전을 중단시킨 이는 괴선이었다.
“다들 멈춰라!”
나는 훼방꾼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오?”
“무슨 짓이긴, 이놈아. 파국을 막으려는 게지.”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노인장 일에나 신경 쓰시지.”
“나도 그러고 싶다, 이놈아. 하지만 네놈 하는 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안 될 성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나선 게다. 이만 일에 죽자 사자 달려들 게 무어냐? 말로 풀어도 될 걸…….”
“흥, 처음엔 나도 그러려고 했소. 그런데 저 대머리가 내 팔다리를 자르네, 어쩌네, 죽이네 마네, 하며 개소리를 늘어놓더니 대뜸 칼바람을 날렸소. 제길, 말하고 보니 열 받네. 비키쇼, 노인장. 저 대머리하고 끝장을 봐야겠소.”
“안다, 알아. 그렇더라도 좀 참아라, 이놈아. 참을 인(忍)이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더냐?”
“됐소. 저 대머리가 그럽디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게 자기들 철칙이라고. 나를 죽이겠다고 겁박한 걸로 모자라 실행에 옮기려 했으니 나도 돌려줘야겠소.”
내가 다시 오숭에게 달려들 기색이자 신묘한 이형환위를 발한 괴선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오숭에게 소리쳤다.
“왜 그랬나, 독두?”
오숭의 백미가 꿈틀했다. 괴선의 호칭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숭은 노기를 드러내지 못했다. 그를 그렇게 부른 이가 괴선이기 때문이었다.
“나, 나는 몰랐소, 괴선.”
오숭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백도방의 도객들은 일제히 괴선의 우수(右手)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오므리고 있는 탓에 길쭉한 검지는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도객들은 방주의 태도를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상대가 괴선이라면 방주가 아니라 방주 할아비라도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괴선이 짓궂게 다시 물었다.
“뭘 몰라?”
오숭은 답변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꼴을 보며 괴선이 혀를 찼다.
“쯧쯧, 답답하긴. 여하간 그게 뭐든 이제 알았을 테니, 어쩌려는가?”
“무슨 말이오?”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게 아닌가?”
“어떻게 말이오?”
“이런 제길,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똥을 싼 사람이 치워야지.”
행여나 괴선이 나하고 일대일로 싸우라고 할까 봐 겁이 났는지 오숭은 전전긍긍했다. 괴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아직도 와옥 앞에 엎드려 있는 노인을 돌아보았다.
“칼질만 할 줄 알고 도통 머리는 쓸 줄 모르는 자네가 어떻게 탄탄한 방파를 일구고 유지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서야 의문이 풀렸네. 다 저치의 공적이었구먼. 그런데 쓸모가 없어졌다고 버리려고 했어? 그렇게 심보가 고약해서야, 원.”
“오해요, 괴선. 나는 홍 태사를 지키려고…….”
“하아, 참으로 멍청한지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이놈도 알고 나도 아는데 어디서 씨도 먹히지 않을 개소리야.”
수하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지만 오숭은 분기를 분출하지 못했다. 상대가 괴선이라서 만이 아니라 그가 구명줄을 쥐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괴선은 그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린 그만 나불거리고 이놈에게 사과나 하게. 알았건 몰랐건 자네가 이놈에게 과한 언사를 뱉어낸 건 사실 아닌가? 먼저 칼을 뽑은 것도 자네고.”
오숭은 싹싹하게 괴선의 권유에 응했다.
“미안하네. 자네가 누군지 몰라 실수했네. 오늘의 일은…….”
나는 오숭의 말을 잘랐다.
“내가 누군데?”
오숭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
“내가 누구냐고?”
“자네는, 자네는, 그러니까…….”
괴선이 벅벅거리는 오숭을 구제해주었다.
“누구긴 누구야. 성질 머리 더러운 쌈닭이지. 아니, 덩치가 있으니 쌈곰이라고 불러야 하나.”
“노인장은 참견하지 마쇼.”
“이놈아, 너도 그만 풀어라. 저래 뵈도 저이는 악당과는 거리가 먼 위인이다. 나름 선행도 많이 하고 덕성도 있단 말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나서지도 않았을 게다. 꼭 시비를 걸고 드잡이 질을 하고 싶거든 대륙의 북녘이나 서천으로 가거라. 거기엔 너를 상대해 줄 사마의 쓰레기들이 득시글대니까.”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소?”
“말꼬투리 잡지 마라, 이놈아. 그리고 네 진짜 상대는 따로 있지 않으냐?”
괴선이 턱으로 와옥 앞의 노인을 가리켰다. 노인은 얼이 빠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제길.”
욕설을 내뱉은 나는 오숭에게 소리쳤다.
“꺼져!”
객이 주인을 쫓아내는 격이었으나 오숭은 군소리 없이 죽림으로 몸을 날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도객들이 나와 괴선을 흘긋 쳐다본 후 황급히 그를 쫓았다.
나는 노인에게 걸어갔다.
마비가 풀린 듯 노인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오숭이 그랬듯 더듬거리며 감상을 밝혔다.
“꾸, 꾸,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으이. 아우님은 천룡을 키웠구먼.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 자네를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아우님이 얼마나 만족한 삶을 살았는지 알겠네. 다행일세, 정말 다행일세.”
손을 뻗어 노인의 목을 틀어쥔 나는 그를 들어올렸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노인은 눈빛으로 처형을 촉구했다. 평온할뿐더러 기쁨마저 깃든 노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나를 따라왔던 괴선이 물었다.
“어쩔 참이더냐?”
“…….”
“내 조언을 구한다면…….”
“됐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노인장은 갈 길이나 가쇼.”
“그러지 말고 들어봐라, 이놈아. 네 애비도 그냥 저치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아보라고만 했다며? 그게 무슨 뜻인지 정녕 모르겠더냐?”
괴선의 말을 들은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강물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노인을 매몰차게 던져버렸다. 땅바닥에 쓰러진 노인이 오열했다.
“제길.”
나는 노인을 두고 돌아섰다. 취선이 죽림으로 향하는 나를 쫓아왔다.
“같이 가자. 이놈아!”
홀로 남은 노인의 울음소리가 내 등에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