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00
제99화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진소월과 나의 의견이 갈렸다.
사벌에서의 일을 들은 후 진소월은 내 정맹 행을 만류하고 나섰다. 반면 처음엔 정맹의 초대에 시큰둥했던 나는 가겠다고 우겼다.
“이 초대는 오대세가가 취한 유화책의 결정판이라고 하지 않았소? 사벌과 마련을 무너뜨릴 때까지는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 사람도 소월이오. 그러니 그들이 내민 손을 거부할 이유가 없소.”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지금쯤 독왕 어르신이 전 가가와 함께 서경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정맹에 전해졌을 거예요. 오대세가는 환영의 자리를 덫으로 만들어 놓고 기다릴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가서는 안 돼요.”
“어떤 덫도 나를 잡을 수 없소. 설령 오대세가의 최고수들이 총 출동한다고 해도 나를 어쩌지 못할 거요.”
진소월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무왕 어르신을 동원하면요? 대책이 있나요? 그렇다고 독왕 어르신을 모시고 갈 수도 없잖아요.”
“그 어른이 나를 제압해달라는 그들의 청에 응할 거라는 보장은 없잖소?”
“그분이 독인이라면 치를 떠는 골수 정파인임을 잊지 마세요. 더욱이 오대세가가 전부 달려들어 압박을 가하면 뿌리치기 어려우실 거예요. 정파 무림의 지존이시지만 그분의 처지는 사마의 제왕들과는 사뭇 달라요. 외람된 말이지만 그들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게 아니라고요. 그분이 십오 년 넘게 정맹의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한 건 단지 무공 수련에 집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실권을 쥔 원로들과 사사건건 부딪쳐야 하는 상황이 거북스러워 스스로 뒤로 물러나신 거라고요.”
“소월의 추측일 뿐이오. 그리고 사왕은 몰라도 마왕과는 비슷하잖소? 그도 일절 통치에 개입하지 않고 마공 수련에만 열을 올린다고 들었소. 그렇다고 그가 마련의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거요. 무왕 어르신도 마찬가지일 거요. 나는 오대세가의 늙은이들이 그 어른을 압박해 뜻대로 부리는 광경을 상상조차 할 수 없소. 마음만 먹으면 그들 전부를 몰살시키기도 남을 강자에게 어찌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있겠소?”
진소월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경우가 완전히 달라요. 마뇌가 마련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건 마왕이 그를 대리할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이에요. 마왕은 원하기만 하면 하시라도 마뇌의 머리에 씌운 관을 빼앗을 수 있어요. 반면 무왕 어르신이 원로원에 정맹의 대사에 관한 최종 결정권을 위임한 건 그분의 의사가 아닐뿐더러 박탈하거나 나눠가질 수단도 없어요. 그분을 맹주로 추대할 때부터 그 부분에 관해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에요.
전 가가 말마따나 무왕 어르신은 ‘마음만 먹으면’ 오대세가의 원로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문 전체를 멸할 무력이 있지만 그럴 마음을 낼 가능성 자체가 없어요. 더욱이 그들이 독왕의 후예를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아우성을 치면 결국은 나서실 수밖에 없을 테고요.”
내 완패였다. 입씨름으로는 진소월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정맹 행의 뜻을 고수했다. 내 눈빛을 보고 내가 양보할 생각이 없음을 간파한 진소월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분홍빛 입술에서 튀어나온 음성엔 분기가 묻어났다.
“기어이 갈 작정이군요. 내 애간장을 다 녹여야 속이 후련할 텐가요?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죠? 사벌 행보다 열 배는 더 위험한데.”
나는 주황색 첩지를 들어 펼쳐보였다.
“여길 보오. 무왕 어르신의 이름으로 나를 초대했잖소? 그러니 어찌 거부할 수 있겠소? 그 어른의 위신에 누를 끼칠 순 없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잖아요.”
“…….”
“내가 말해 볼까요? 무왕 어르신에게 전 가가의 원력에 관련된 내력을 말씀드리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던 거죠? 그래서 직접 뵙고 해명하려고 부득부득 가려는 거죠? 위험을 무릅쓰고 왔음을 그분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그것으로 진정성을 증명하고자 하면서. 아닌가요?”
나는 백기를 들었다.
“소월의 말이 다 맞소. 그러나 소월이 간과하는 점이 있소.”
“뭔가요?”
“무왕 어르신과 나 사이에 형성된 신뢰감이오. 설사 그 어른이 오대세가 원로들의 떼에 못 이겨 나를 잡으러 나오신다고 해도 내 명줄을 자르시지는 않을 게요. 내 명예를 걸고 장담할 수 있소.”
진소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괴선 어르신에게 일어난 일을 잊었나요? 단언하건데 무왕 어르신이 전 가가를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자마자 오대세가 원로들이 체면불구하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나는 진소월의 손을 잡아끌며 뒷말을 막았다.
“나를 믿어주오, 소월. 그들은 나를 물어뜯지 못할 거요. 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어떻게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내 안전을 확신하오.”
“그건 답이 아니에요.”
“…….”
고맙게도 진소월은 구체적인 방책을 제시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예감을 수용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눈물을 흘렸을 뿐이었다. 그걸로 내 쇠심줄 같은 내 고집을 녹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 * *
시월 십일까지는 보름 이상 남아있었기에 나는 수련에 매진했다.
무왕과의 비무에 대비해 특히 새롭게 일군 절기들을 가다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내심 독왕이 내 수련을 도와주길 바랐으나 그는 숲에 틀어박혀 도통 나오려들지 않았다. 그러다 쌍십절을 사흘 앞둔 날 절곡 어귀에 나타나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따라 진종일 독무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금지로 갔다.
독왕은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뒷짐을 지며 거만한 자세를 취하지 않고 빈약한 어깨를 웅크린 자세로 내 절을 받았다. 그는 사왕과의 격돌 이후 내내 저렇듯 의기소침했다.
바위 아래 바닥에 엎드린 나를 내려다보며 독왕이 말했다.
“곡으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으면 진소월은 몹시 당황스러워 할 터였다. 독왕은 그녀가 구상하는 대역전극의 주역이었다. 그가 빠지면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했다.
진소월은 독왕을 이용해 사왕과 마왕을 처치하고자 했다. 그들만 제거하면 사벌에든 마련에든 나에게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은 없었다.
사왕을 일차 목표물로 삼은 건 그를 유인하기가 마왕보다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독의를 미끼로 나를 낚으려는 그들의 의도를 역이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를 사벌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사왕은 그를 보고서 달아나는 나를 잡겠다며 쫓아올 게 뻔했다. 독왕이 봉산에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그 작전이 성공했다면 대번에 주도권을 틀어쥘 수 있었다. 단순히 강적 하나를 지운 것을 넘어 강력한 원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소월이 반드시 포섭해야 한다고 했던 그 인물과 연대하게 된다면 마련과 마왕을 압도할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대담하고도 멋진 작전이었으나 한 가지 계산 착오로 인해 모든 게 틀어졌다. 다름 아닌 사왕의 무력이었다.
진소월도 나도 독왕이 그보다 상위의 강자일 거라 확신했다. 독왕은 십왕의 상위권에 위치한다고 평가받는 반면 사왕은 천랑성의 낭왕(狼王)과 더불어 말석을 다툰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사왕을 봉산까지 끌어내 독왕과 합공한다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 여겼다.
이점에서는 나도 내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사왕의 경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출중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오류는 독왕과 사왕의 무위에 관한 오판이었다.
거두절미하고 사왕은 독왕보다 강했다. 내 광환과 광폭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일장의 격돌에서 사왕은 독왕에게 우위를 점했다. 누구보다 독왕 자신이 이 사실을 잘 알았을 터였다. 그래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독왕은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나는 이였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이 같은 내용을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사왕은 왜 도망쳤을까? 그도 자신의 무력이 독왕을 능가함을 알았을 텐데. 부상 때문에? 그것도 고려했겠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사왕은 나를 의식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독왕과 혈투를 벌이는 동안 나에게 암습당할 것이 두려워 달아난 것이었다. 내가 전투불능 상태였음을 모르고. 혹은 알았더라도 자신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만에 하나 잘못 판단한 거라면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터이기에 그로서는 모험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지난 행적을 보건대 사왕은 도박사나 승부사와는 거리가 먼 위인이었다.
나는 독왕이 안쓰러웠다. 자기가 누군가에게 밀린다는 건 상상도 못했을 터이니 단 한 번의 약세를 경험하고는 주눅이 든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침묵했다.
한편 나는 궁금했다. 독왕이 약해진 걸까. 아니면 사왕이 강해진 걸까. 둘 중 하나일 테지만 둘 다 일수도 있었다. 일백 세를 훌쩍 넘겼으니 독왕의 무력은 쇠퇴기를 맞이했을 반면 이제 칠십 줄에 들어선 사왕은 절정기에 진입했다고 보아야 했다. 그들이 각각 하강곡선과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에 교차점을 지나 만났다면 강호의 일반적인 평가와는 다른 결과를 보였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철마의 예에서 보듯 세인들이 정한 무인들의 서열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팔마 중 최약체로 알려졌지만 내가 확인한 바, 철마는 공식 서열 삼위였던 검마보다 확실히 윗길의 강자였다. 둘이 붙었다면 철마가 압승했을 정도의 차이였다.
이쯤 되니 십왕 간의 진짜 서열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 가운데 다섯 명을 만났다. 두 명과는 생사투를 치렀고 다른 두 명과는 비무를 해보았다. 나머지 한 명은 압기만 경험했을 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기감으로는 그들 간의 우열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느낌 상 나는 검왕이 그들 다섯 명 중 최강자일 것 같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느낌일 뿐 근거는 없었다. 무림의 오랜 격언처럼 ‘누가 더 센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실제로 붙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독왕을 붙잡기로 했다.
진소월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독왕을 믿고서 나는 마음 놓고 절곡을 나갈 수 있었다. 그가 떠나면 안전판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었다.
“저와 함께 대륙을 재패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한 달 전의 합의를 상기시키자 독왕이 허둥지둥 댔다.
“그러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낫겠다. 한 달이 넘게 곡을 비웠으니 나라꼴이 엉망일 게야. 그리고 요즘 들어 욕심을 부리는 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더구나. 이미 광대한 영토와 수백만의 백성을 다스리고 있는데 구태여 중원까지 먹어치울 게 무어야.”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놓던 독왕이 역공을 취했다.
“이참에 너도 나와 같이 가자꾸나. 모든 걸 물려주마. 거대한 땅덩어리와 충성스러운 신민이 다 네 것이 될 게야.”
나는 독왕을 잡는 걸 포기했다.
“죄송합니다, 사조님.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그 일을 이룬 후 사조님을 찾아뵙겠습니다.”
한 달 전이었다면 강제로 나를 끌고 갔을 독왕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 그렇다면 뜻대로 하려무나. 가기 전에 몇 마디만 하마. 너는 나날이 강해지고 있지만 사왕 같은 자와 맞서려면 아직…….”
말끝을 흐리더니 독왕이 돌연 도리질을 했다.
“아니다. 알아서 잘 할 테지. 부디 몸조심하거라.”
“사조님께서도 다시 뵐 날까지 옥체 보존하십시오. 그런데 가는 길은 아시는지요?”
“파양의 상림(桑林)이라고 아느냐? 거기까지만 배웅해다오.”
“저는 모릅니다만 제 친인은 알 겁니다. 그녀에게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아, 그럴 게 아니라 같이 가시지요. 모두에게 사조님께서…….”
“됐다. 수선스럽게 만들 것 없다. 어서 다녀오너라.”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독왕은 검총 인근의 야산에서 재회한지 정확히 한 달하고 이레 만에 나와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