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01
제100화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나는 상림까지 독왕을 데려다주었다.
나와 헤어지며 뭔가 주저하는 기색이던 독왕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삼호, 즉 이모의 원력을 전부 내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호의를 마음으로만 받겠다고 응답함으로써 독왕을 놀라게 했다. 내가 기연이나 다름없는 행운을 취하지 않은 건 무왕과의 비무 때문이었다. 체내에 들어온 이모의 원력을 소화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터였다. 그 동안 원력의 운용과 신공들의 구사에도 아주 약간이나마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상의 상태로 무왕과 대면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깝지만 이모의 원력을 거절해야 했다.
내 고사의 이유를 곡해한 독왕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면서 자기가 눈을 감으면 원력을 다 가져가라고 제 딴에는 엄청난 선심을 베풀었다. 나는 빨라야 일백 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니 미리 말씀하실 것 없다는 흰소리로 또 한 번 그를 감동시켰다. 급기야 제 덩치보다 다섯 배나 큰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아낸 독왕은 내 바람과는 달리 절곡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독곡으로 가버렸다.
독왕이 뽕나무 숲으로 들어간 후 나는 북으로 몸을 날렸다. 내 행선지는 절곡이 아니라 원중이었다.
* * *
쌍십절을 하루 앞둔 천하제일도 원중은 벌써부터 축제분위기가 만연했다.
정월 초하루인 양 곳곳에서 폭죽이 올라왔고 거리마다 인파가 넘쳐흘렀다. 일백 만에 달한다는 인구가 모조리 밖으로 쏟아져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원중 마천루의 정점이라 할 칠성각 꼭대기에서 찬란한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삼십삼 층 높이의 고각(高閣)인지라 도시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괴선이 말한 대로 전망대로는 최고의 명당자리였다.
지상에서 올라오는 소음의 상당부분을 내 별호가 차지했다. 입 가진 이들마다 내일 정맹을 찾을 마웅, 혹은 전왕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직은 전왕보다는 마웅이라는 별호가 더 우세했다. 불만이었지만 아래로 내려가 일일이 변경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참았다.
내 별호를 듣기도 지겨워 소리를 차단하려던 찰나 나는 반대로 청력을 돋우었다. 얼핏 내 관심을 끄는 말들이 귓속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도마뱀처럼 칠성각 외벽을 타고 내려간 나는 이십칠팔 층 어림의 창가에서 멈췄다. 그러고는 창문 옆에 붙어 안에서 나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말 한 적 없소.”
“이거 왜 이래? 칠대(七隊)의 성민 형이 안평에 갔을 때 그곳 흑문의 첩인들로부터 직접 들었다던데. 설마 성민 형과 그자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할 셈이냐?”
“…….”
“왜 답이 없어? 나를 무시하는 게냐?”
“그때는 그가 그런 강자인지 몰라서 그랬던 거요.”
“호오, 이제야 인정하는군. 역시 너는 허풍선이였어. 하지만 뻥을 쳐도 정도껏 쳐야지 마웅하고 자웅을 겨루었다니. 복날에 개장수를 보고 정신 줄을 놓은 똥개도 그런 개소리는 못하겠다.”
“…….”
여기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자였다.
“그만해요, 황 공자.”
“무슨 소리요, 양 소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저치는 지금도 그런 사기를 치고 다니잖소? 양 소저에게 마치 마웅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면서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조 공자는 단지 그와 말을 섞은 적이 있다고 했을…….”
“저자를 두둔하지 마시오. 양 소저가 변방 무림의 떨거지와 이리 어울려 다니는 걸 세연방의 어른들이 아시면…….”
“황 공자가 참견할 일이 아니에요.”
“참견이라니? 나는 어디까지나 터무니없는 요설로 양 소저처럼 순진무구한 여인들을 농락하고 다니는 파렴치한 작자를 징치해 무고한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을 막고 강호의 법도를 세우고자 할 뿐이오.”
“말이 너무 심하군요. 더 이상 황 공자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나가요, 조 공자.”
“누구 맘대로. 다시는 지저분한 혀를 놀려 순수한 여인들을 희롱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기 전까지는 내보낼 수 없소. 아니, 나중에 딴소리를 할 게 빤하니 아예 서약서를 받아놓는 게 낫겠군. 어이, 가서 지필묵 좀 가져와.”
“제발 그만 둬요. 부탁할 게요.”
“비키시오. 어이, 조가야. 계속 양 소저 뒤에 숨어서 꼬리만 말고 있을 거냐? 어럽쇼? 너, 설마 지금 날 노려본 거냐?”
“…….”
“원한다면 사내답게 풀 기회를 주마. 얼마 전 백두검파의 장선을 꺾었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이던데 어디 솜씨 좀 보자. 나한테 오십 초를 버티면 이번 일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마. 어때? 오십 초는 너무 많아? 간곡히 빌면 삼십 초로 깎아 줄 의향도 있다.”
“…….”
“꿀 쳐 먹었어? 왜 말이 없어? 설마 천하의 마웅과 대등하게 겨룬 성주 무림의 기린아께서 고작 황가의 후지지수에게 겁을 먹은 건 아닐 테지? 아무렴, 그럴 리가 없지. 자, 나가자. 서약서 따위로는 도저히 성에 안 차니 시원하게 붙어보자고.”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소.”
“아니, 너는 나와 싸워야 돼. 그렇지 않으면 태극검문이…….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갈등했다.
괴선의 흉내를 낼 것인가. 아니면 다시 칠성각 꼭대기로 올라가 진소월의 ‘간청’을 곱씹으며 계속 고민해야 할 것인가.
내 선택은 전자였다. 진소월에겐 미안하지만 차마 그녀의 청을 들어줄 순 없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할 참이었다.
오지랖을 떨기로 마음을 정한 나는 불문곡직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이십 평 남짓했다. 탁자며 의자며 다구며 벽에 걸린 산수화며 어느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고 왼편의 벽엔 용봉이 수놓아진 화려한 이불을 얹은 참상까지 놓여있었다. 실내엔 두 무리가 있었는데 한 쪽은 내가 들어선 창가에 섰던 이남일녀였고 다른 한 쪽은 문을 막고 선 삼인의 무사였다. 그들 모두 나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경악성인지 비명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괴성들을 토해냈다. 나는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시끄러워.”
여섯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오체투지 했다. 흠, 기특한데? 왕을 알현하는 자세가 됐군. 흐뭇한 감상과는 달리 나는 짐짓 화를 냈다.
“뭔 짓들이야. 누가 너희들 뒤통수나 등짝 구경하고 싶대? 얼른 안 일어나?”
여섯 개의 머리가 튕기듯 솟구쳤다. 하지만 아무도 나와 시선을 맞추려들지 않고 양손을 공손히 배꼽 위에 포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니들은 나가.”
문가의 무사들을 내보낸 나는 내 앞의 삼인에게 걸어갔다. 세 사람 모두 동태처럼 굳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신기한 재주였다. 나는 얄따란 입술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청년의 팔을 툭 치며 알은 체를 했다.
“오랜만이다. 그러지 않아도 소식이 궁금했는데 현무단에 들었구나? 축하한다.”
허리에 보검을 차고 무복 목깃에 뱀을 칭칭 감은 거북 문양을 새긴 청년검사는 일 년 전 안평 무림대회에서 내 본선 첫 판 상대로 나섰던 태극검문의 후예 조우성이었다.
조우성을 몰아세우던 자는 넙데데한 낯짝의 사내였다.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니 조우성과는 동년배일 터였다. 가슴에는 오대세가의 일원인 오중 황가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을 박고 있었다.
그의 횡포에 소극적으로 저항했던 여인은 아담한 체구에 진소월 못지않게 하얀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이 여자도 해를 보지 못하는 병에 걸렸나? 궁금했지만 초면에 민감한 질문을 던지는 건 실례인지라 나는 자중했다. 대신 황가의 사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화, 화, 화, 황우민입니다.”
“내가 참견해서 불만이야?”
“아, 아, 아, 아닙니다.”
“왜 이렇게 더듬어? 좀 전엔 청산유수더구먼. 혹시 내가 변방 무림 출신이라고 놀리는 거야?”
사내가 부르짖었다.
“아, 아, 아, 아닙니다, 전왕. 제, 제, 제, 제가 감히 어떻게…….”
“그만. 귀청 떨어지겠네. 그건 그렇고 지나가다 우연히 들었는데 그냥 가려다 아무래도 들여다보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들어온 거니까 너무 욕하지는 마.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나는 원래 괴선 노인네처럼 남의 일에 무턱대고 끼어드는 사람이 아냐. 근데 여기 이 친구는 남이 아니거든. 나하고는 제법 인연이 깊은 친구란 말이지. 그러니 내가 끼어들었다고 비난해서는 안 돼. 뭐, 이의가 있으면 말하던가.”
“아, 아, 아, 아닙니다. 제, 제…….”
“됐어. 너는 그냥 입 다물고 있어. 나는 이 친구하고 볼 일이 있어 들어온 거니까. 근데 이상하군. 딱 봐도 너는 내 친구의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 뭘 믿고 덤빈 거야? 내 안목이 틀린 건가?”
“그, 그, 그, 그건…….”
“입 다물고 있으라니까.”
나는 조우성에게 눈을 돌렸다.
“어때, 친구? 모처럼 만났는데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나하고 하자는 건 아니고 이치하고 붙어봐. 내가 심판 봐 줄게. 누구라도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면 나한테 오라고 해.”
조우성이 용감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직시했다. 마음에 들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이이와 겨루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술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내의 넙데데한 낯짝에 안도한 기색이 떠올랐다. 나는 조우성의 처지를 이해했다.
“그래? 아쉽군. 오랜만에 나를 잠시나마 아찔하게 했던 예리한 검공을 보고 싶었는데. 뭐, 자고로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이라고 했지만 친구 사이에 싫다는 걸 억지로 청할 수는 없지. 근데 이치는 너하고 별로 술을 마시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사내가 다시 부르짖었다.
“아, 아, 아, 아닙니다. 저, 저, 저…….”
“그만. 한 번만 더 입을 째면 입술을 찢어버릴 테다.”
사내에게 엄포를 놓고 있는데 방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좀 전에 내보냈던 무사들이 정맹의 인사들을 불러온 것이었다. 내가 바란 대로.
난리가 났다.
정맹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칠성각까지 몰려와 안내를 자청했다. 집법전주 소웅성이나 부용아씨의 부군인 진천수 현상인처럼 낯익은 이들도 몇몇 보였다.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내가 탄 마차가 지나가는 거리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은 마웅이 아니라 전왕을 연호하며 열렬하게 나를 환영했다.
어리둥절했다. 내가 이렇게나 인기가 많았던가? 환호성이 커질수록 마차 주위에서 나를 호위하듯 따르던 오대세가의 명숙들은 떫은 감을 씹은 표정들이 되었다. 그러다 창문을 연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른 억지미소를 그렸다. 그들의 태도에서 나는 진소월이 우려하는 바가 현실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어쩌면 지금 나는 사지로 들어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온 도시를 울리며 떠들썩하게 입맹한 후에도 소요는 지속되었다.
무인들은 물론이고 문사들이나 집사들, 심지어는 하인-하녀들까지도 나를 보겠다며 몰려나와 법석을 떨었다. 정맹의 수뇌부는 몰라도 그들만큼은 원중의 백성들처럼 나를 사마의 무리와 홀로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과를 거둔 일대영웅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간혹 창을 열고 손을 흔들며 그들의 환대에 화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을 의심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혹시 잘못 본 건지 몰라 마차 밖으로 몸을 빼내 뒤를 확인했다. 그러나 찰나지간 내 시야에 들어왔다가 나를 놀래킨 인물은 온 데 간 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