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02
제101화 나에게 바라는 게 뭐요?
내가 마차 밖으로 나가자 심야의 정적을 깨뜨리던 환호성이 뚝 그쳤다.
수천 쌍의 눈이 경외감과 호기심을 담고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나는 마차를 호위하듯 따르던 정맹의 고위직들 중 유일하게 친분 비슷한 게 있던 집법전주 소웅성에게 눈길을 주었다. 내 시선을 받은 소웅성의 면상이 경직되었다. 나는 전음을 쓰지 않고 육성을 발했다.
“혹시 독의가 이곳에 와 있습니까?”
내 경어에 굳었던 소웅성의 안면이 풀렸다. 그러나 그는 작년 늦가을의 재판에서처럼 나를 하대하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전왕. 따로 초청을 하지 않았음에도 어제 해시 말에 본맹을 찾아왔더군요. 지금 약왕전에 머무르는 걸로 압니다.”
마치 상전에게 보고하듯 상세하게 답변하는 소웅성의 성의에 나는 요 한 달 새 일어난 내 위상의 급상승을 실감했다.
“고맙습니다.”
소웅성에게 감사인사를 표한 나는 마차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창문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독의가 정맹에 든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내가 무왕의 초대를 받아 쌍십절에 정맹을 찾을 거라는 소식은 만천하에 퍼져있었다. 독의가 그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축일전야에 정맹을 찾은 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라고 보아야 했다. 즉, 그는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쉬웠다. 그러나 그 다음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대체 무슨 속셈일까. 괴선 건과 관련해 백운영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르지 않을 터임에도 제 발로 나섰을 때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그가 자살행위를 할 리는 없지 않은가.
혹시 비영과 둘이서 나에게 맞설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아니면 위급 상황이 발생할 시엔 경신공의 대가인 비영의 도움을 빌어 내게서 달아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건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위험을 자초한 건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나는 추론을 중단했다.
진소월을 흉내 내 여러 그림을 그려보았지만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괜한 심력을 소모해가며 헛수고를 할 바에는 본인에게서 직접 듣는 게 나았다.
나는 독의를 잡으러 약왕전에 가지 않더라도 그쪽에서 나를 찾아오리라 확신했다. 그러지 않을 거라면 일부러 내 눈에 띄는 짓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마차는 으리으리한 칠층 전각 앞에 멈춰 섰다.
작년 십일월 내가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나를 따라 집법전에 들어가지 못한 괴선이 대기하고 있던 귀빈전이었다. 귀빈전주는 안서의 명문 삼청관(三淸館) 출신의 옥주완이었다. 팔십대의 고령에 정맹 공식 서열 이십팔 위의 거물이었지만 옥주완은 내가 민망할 정도로 나에게 굽실거렸다. 그가 시종여일 시종처럼 굴며 하도 저자세를 취하는 통에 나는 본의 아니게 거만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오백 평에 달하는 칠층의 특실로 나를 안내한 옥주완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각종 편의시설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를 내쫓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그는 그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반 시진 가까이 나를 괴롭히던 옥주완이 물러났다. 그에게서 해방된 나는 창가로 갔다. 주위에 고층거각이 없었기에 탁 트인 전망이 눈을 즐겁게 했다. 장관이라 불러 손색이 없을 경치를 감상하며 나는 독의의 방문을 기다렸다.
예상과는 달리 독의는 밤이 다 가도록 오지 않았다.
짙어지는 새벽어둠을 바라보며 나는 갈등했다. 내가 가야하나. 아니면 더 두고 볼까.
점점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러다 날이 밝으면 그와의 만남이 불발될 우려가 있었다. 무왕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창문을 열고 몸을 날리려던 나는 경신을 보류했다. 옥주완에게 들었던 약왕전이 있는 방향에서 긴 궤적을 그리며 다가오는 그림자를 발견해서였다. 나만 본 게 아니었다. 괴인영의 출현을 포착한 순찰무사들이 호각을 불러대는 바람에 새벽의 고요가 깨지고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결국 독의로 추정되는 인물은 귀빈전에 이르기도 전에 정맹의 고수들에게 저지당하고 포위되었다.
잠시 후 옥주완이 방울을 울려 입실을 알린 후 헐레벌떡 달려와서 독의의 면담요청을 알렸다. 나는 그에게 독의를 들이라고 했다. 바깥의 소란이 가라앉고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아 특별한 용모의 노인이 특실에 들어섰다.
빗질의 흔적이 전혀 없는 구질구질한 백발에 깊고 굵은 주름도 가득했으나 감탄이 나올 만큼 근사한 얼굴이었다. 진소월이 그려준 용모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입체감을 과시하는 독의를 보노라니 저절로 검황자가 떠올랐다. 그가 늙으면 저런 낯짝이 될까.
독의는 창가에 선 나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산보라도 나온 듯 편안한 걸음걸이였다. 긴장된 기색이라고는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내 삼사 보 앞에 선 독의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육척에 육박하는 장신이었으나 나하고는 머리 하나의 차이가 났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탐색했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독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네, 마웅. 자네 보기를 돌아가신 선친 뵙듯 앙망했는데 드디어 만나는구먼.”
나는 짐짓 눈을 부라리며 응수타진을 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사는 게 지겨워졌소?”
껄껄 웃으며 독의가 반문했다.
“나를 죽일 셈인가? 괴선의 선력을 지웠다고?”
나는 단도직입했다.
“그럴 작정이요. 그 어른의 선력을 돌려주지 않으면.”
“형평성에 어긋나는군. 금풍검처럼 내 공력을 박탈하는 선에서…….”
“그쯤 하시지. 할 수 있소, 없소?”
나를 빤히 바라보던 독의가 몸을 돌려 탁자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고주 특산의 홍설(紅雪)이라니. 이 차 한 잔의 값이 같은 부피의 금덩이보다 비싸다는 걸 아는가? 정맹이 얼마나 자네를 귀히 여기는지 알겠네. 앉게나.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나는 다시 독의의 말을 끊었다.
“대답이나 하시지.”
독의가 내 독촉에 아랑곳없이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나는 자단목 탁자로 다가갔다. 가면서 기운을 일으키며 압박하자 독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세. 자네 성미가 급한듯하니 결론부터 밝히자면 매우 어렵되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정도로 해두겠네.”
나는 대놓고 반색했다. 기대치가 낮았기에 기쁨이 컸다.
“그 어른의 선력을 원상회복시키면 당신을 용서해주겠소.”
독의는 내가 제시한 협상안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네. 내가 고작 용서나 받자고 자네를 보고자 한 줄 아는가?”
“그럼 바라는 게 뭐요?”
독의는 즉답하지 않고 또 찻잔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를 재촉하는 대신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차를 다 마시도록 내버려두었음에도 독의가 변죽을 울렸다.
“그게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 줄 아는가? 도자기를 깨기는 쉬워도 도로 붙이기는 어려운 법일세. 물을 쏟기는 쉬우나 되 담기는…….”
“원하는 게 뭔지 물었소.”
“그러지 말고 더 들어보게나. 어차피 당장 치료에 들어갈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해귀들 중에서도 독종이었던 자들만을 연상시키는 독의의 눈빛은 그가 협박에 굴할 위인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일수에 그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내가 아니었다.
독의는 빈 찻잔을 붉은 색과 흰 색이 오묘하게 섞인 찻물로 채웠다. 하지만 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지 차를 마시지 않고 말을 이었다.
“괴선에게 원력을 되돌려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걸세. 진귀한 약재도 많이 필요할 터이고. 그러나 방금 말했듯 조건만 갖춰진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네. 원래는 흩어진 연기를 다시 모을 수 없듯 비가역적이나 내겐 천리를 거스르는 비법이 있으니까. 천하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네.”
나는 ‘더럽게 잘났군.’이라고 비아냥거리지 않고 자중했다. 그러길 잘 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독의가 뜻밖의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괴선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을 걸세. 그의 상한 근골도 고쳐주고 잘린 힘줄도 이어줌세. 치료가 완료되면 그는 이전의 몸을 되찾을 수 있을 걸세. 아니, 각종 영약의 효능으로 더 건강해질 걸세.”
하마터면 고맙다는 인사와 더불어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뱉을 뻔했다. 그러나 독의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그가 아무 대가 없이 이런 선심을 쓸 리 만무했다. 그는 병 주고 약을 주거나 반대로 약을 준 후 병을 일으키는 기벽으로 유명했다. 아무리 용해도 그의 약은 결국 독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것만이 아닐세. 자네에게 구음절맥에 걸린 정인(情人)이 있지 않은가? 만년설삼이나 구지선초 같은 영물이 아니라 극약 처방으로 발병을 지연시킨 듯한데, 맞는가?”
나는 진소월에 대해 언급하는 독의의 의도를 몰랐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감을 품고서.
“그렇다고 들었소.”
“그 아이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걸세.”
나는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일세. 현재 스무 살 언저리로 알고 있네만, 아마 길어야 삼사 년 후면 유명을 달리할 걸세. 기실 그 방식으로 지금까지 생존한 것도 극히 이례적인 일일세.”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진소월은 스물 두 살이었다. 그렇다면 독의의 예측보다 더 빨리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진소월의 처지에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음을 깨달았다. 일백일마다 극독이 용해된 약액을 복용해야 함을 알면서도. 구음절맥이 완치불가의 천형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진소월의 심정을 헤아리자 가슴이 저몄다. 얼마나 암울했을까. 얼마나 내가 야속했을까.
독의의 수작에 말려들고 있음을 인지했지만 나는 그가 내민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그녀의 지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거요?”
나는 독의가 긍정적인 답을 내놓길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그러리라 예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까닭이 없었다.
청수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야비한 미소를 머금으며 독의가 답에 뜸을 들였다. 나는 그의 목줄을 틀어쥐고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내 표정에서 위험수위임을 감지했는지 독의가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뗐다.
“단정적으로 답하기 어려운 일일세. 자네에게 이를 이해시키려면 족히 반나절은…….”
“요점만 말하쇼. 고칠 수 있소, 없소?”
“정 결론만 듣기 바란다면 이렇게 말하겠네. 그 아이의 병을 지울 수는 없으나 수명은 연장할 수 있네. 다만 얼마나 오래 명줄을 보존할는지를 묻는다면 이 자리에서 확언하기 어렵네.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일세.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그 아이의 인내력과 의지력일세. 극악의 고통을 견뎌내는 독심과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의지 말일세.”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걱정할 게 없다고 큰소리치려다 그만두었다. 구태여 진소월을 대변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독의가 원하는 말은 내놓아야 했다.
“그녀를 돌봐주시오. 부탁하오.”
독의의 입술이 승자의 미소를 그렸다.
“그럴 작정일세. 그렇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최선을 다할 터이나 괴선이든 그 아이든 자네가 바라는 수준까지 회복되리라고 장담하긴 어렵네. 또 한 가지. 두 경우 모두 약재 구입 등에 엄청난 자금이 들 걸세. 완벽한 설비도 필수일세. 둘 중 하나만 빠져도 치료의 출발 자체가 불가능하다네.”
나는 퍼뜩 나현을 떠올렸다. 그라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
“흠, 꽤나 유력한 조력자를 둔 모양이구먼.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소.”
독의의 말을 자른 나는 그를 본론으로 끌고 갔다.
“괴선과 그녀를 치료해주는 대가로 나에게 바라는 게 뭐요?”
다소 경망스럽던 독의의 낯빛과 음성이 진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