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03
제102화 거기가 어디요?
거래가 성립할 거라 확신했는지 독의는 더 이상 에둘러가지 않고 나를 찾아온 목적을 털어놓았다.
“자네를 연구하게 해 주게.”
어느 정도 짐작했던 답변이었음에도 나는 당혹스러웠다. 별안간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며 독의가 열변을 토해냈다.
“나는 의계에 입문한 이후, 아니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을 무렵에 이미 인간 신체의 비밀을 풀어보리라 결심했다네. 열다섯 살부터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그 내밀한 다짐을 실행에 옮긴 과정에 다름 아닐세.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숱한 시도를 했고 나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고 자부하네. 나는 내공 축적과 이를 바탕으로 구현하는 무공 외에도 인간을 인간 이상의 존재, 즉 초인으로 만드는 여러 비법들을 알아냈다네. 원한다면 들려줌세. 며칠이 걸리겠지만…….”
“됐소.”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독의가 나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나와 눈싸움을 벌이기는 부담스러웠던지 바로 표정을 관리했다.
“알았네. 하지만 되도록 간략하게 줄일 터이니 조금만 참고 들어주게. 그래야 내가 자네를, 보다 정확하게는 자네의 몸을 연구하고자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니. 서역과 머나먼 서방, 북녘의 동토, 바다 건너 해왕도와 남방의 이족들에겐 신체능력을 극대화할뿐더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신의 영역에 이르게 하는 사이하고 극악한 수단들이 수두룩하다네. 그 중 일부는 중원이 발전시킨 내공과 무공의 효능에 못지않은 이능을 보이기도 한다네. 하지만 단언컨대 어느 것도 중원의 무공을 능가하지는 못한다네.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엄연한 사실일세. 특히 절대지경의 초인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함으로써 이역 이인들과의 경쟁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당금 무림은 그야말로…….”
나는 다시 독의의 장광설을 중단시켰다.
“그래서 요점이 뭐요?”
한창 열을 올리던 독의가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이제 막 운을 뗐건만. 알겠네. 자네가 좋아하는 결론으로 바로 넘어감세. 이 시점에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초인화(超人化)에 있어 궁극의 비결은 독(毒)이라는 걸세. 저마다 천외천의 신력을 뽐내지만 나는 십왕 중 으뜸은 독왕일 거라 확신하네. 그의 진전을 이었을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 터이지만.”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독의에 대한 신뢰성이 뚝 떨어졌다. 이렇게 허술한 위인이 괴선의 선력을 복원하고 진소월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을까.
나는 사왕과 충돌한 연후 독왕이 얼마나 풀이 죽었던지 독의에게 알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그 얘기를 들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독왕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의와 그런 초특급 정보를 공유할 까닭이 없어서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독의가 나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자네는 독인일 테지? 바라건대 부인하지 말게나.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나는 시치미를 떼볼까 하다가 관뒀다. 괜한 짓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절대지경에 발을 들여놓은 자네의 무력은 독의 힘이 아니라면 설명할 방도가 없네.”
터무니없는 소리!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했다. 독의는 검황자라는 괴물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주목한 건 자네가 드러낸 불가사의한 치유력일세. 그것이야말로 자네가 독종(毒宗)의 경지에 근접한 독인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세.”
나는 탄복했다. 이모의 치유력은 독곡에서도 기이한 현상으로 치부되었다. 점박이 노인에 따르면 이모가 나오기 전까지 독왕조차도 독인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독의는 그 경이로운 치유력이 독에서 비롯되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실로 대단한 안목, 혹은 지식의 소유자였다. 어쩌면 독의는 그와 관련한 비법을 터득했을지도 몰랐다.
“지난달에 사벌에서 내 오랜 벗인 탈혼창군을 만났다네. 자네의 놀라운 무위 상승에 관해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가 분통을 터뜨리더구먼. 마련이 자기들을 속였다며.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몰라 사정을 캐물었더니 함구를 조건으로 귀띔해주더구먼. 마뇌가 전하길 삼월 초에 마왕이 자네의 은신처를 급습해 자네를 철저하게 망가뜨렸다고 말일세. 단전을 깨뜨리고 주요근맥을 찢어발겼으니 회생의 여지는 없지만 그래도 후환을 완전히 제거하자며 자네 잔당을 쓸어버릴 것을 제안했다지. 그 술수에 넘어가 성주 무림에서 살겁을 일으키는 바람에 자네에게 보복을 당했다고 여기더군. 탈혼창군은 마뇌가 자기들을 농락했다고 이를 갈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직감했네. 마왕은 정말로 자네를 파괴했을 터이고 자네는 독의 권능으로써 부활했을 거라고 말일세. 내 생각이 틀렸는가?”
은근했던 목소리가 점차 고조되며 종래엔 흥분이 잔뜩 묻어났다. 내가 묵묵부답하자 독의가 자답했다.
“그럴 리가 없네. 나에겐 청천의 태양만큼이나 명명백백한 진실일세.”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슬슬 독의와의 면담을 종료해야 할 시점이었다.
“내 몸을 어떻게 연구한다는 거요? 설마 내 배를 갈라 안을 들여다보겠다는 얘기는 아닐 테지?”
독의는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진지한 낯짝이 섬뜩했다.
“그러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자네가 허락하지 않을 게 아닌가? 혹시 그래 줄 의향이 있는가?”
질문에 담긴 기대감이 너무나 확연해 나는 코웃음을 쳤다.
“흥, 꿈 깨시지.”
“그럴 줄 알았네. 우선 쉬운 것부터 시작해봄세. 자네 피를…….”
“잠깐. 멋대로 앞서나가지 마쇼. 그보다 어느 정도의 자금과 어떤 설비들이 필요한지나 알려주쇼. 준비가 되면 부를 테니까. 그때까진 다른 데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무르쇼.”
“그걸 일일이 설명하려면 한두 시진은 걸릴 걸세. 그보다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 데만 최소한 석 달은 걸릴 걸세. 그러니 간단한 해결책을 알려줌세. 현실적으로 내 연구를 진행하면서 괴선과 그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장소는 천하를 통틀어 세 군데밖에 없네. 그 중 한 곳을 선택하게나.”
“거기가 어디요?”
독의가 세 개의 이름을 댔다. 앞의 둘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곳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귀를 솔깃하게 했다.
* * *
동편의 창으로 햇살이 밀려들었다.
일다경가량 독의와 문답을 주고받은 나는 금명간의 재회를 기약하고 그를 내보냈다. 그가 특실을 나간 후 탁자 위의 주전자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 차가 반 이상 남아있었다.
홍설이라 했던가. 독의 말로는 식은 다음에 마셔야 진미를 느낄 수 있는 차라고 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찻잔에 조금 따라 마셔보았다. 오묘했다. 쓴 맛과 단 맛이 함께 감도는 데다 강렬한 향과 은은한 향이 동시에 후각을 자극했다.
차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않았으나 나는 홍설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 진소월을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이 요상한 맛을 음미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사코 마다할 게 뻔했다. 홍설이 민중의 피눈물이라는 이유로.
진소월은 세가와 부가들에서 이루어지는 특권적이고 배타적인 사치를 혐오했다.
오대세가 내원의 귀부인 한 명이 일 년에 평균적으로 사들이는 장신구의 비용은 같은 기간 동안 빈민 일천 명을 먹여 살릴 곡식의 값과 맞먹는다고 했다. 각각 인구의 절반과 구 할이 종과 노예인 사마 무림은 논외로 치더라도 정맹이 다스리는 땅에서만 매년 수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다며 그녀는 분개했다. 오대세가를 비롯한 정파의 권문세가들이 조금만 신경을 쓰더라도 굶어죽는 빈민을 크게 줄일 수 있을 터이지만 그들에게 구휼은 흉작이 들었을 때 잠시 생색을 내는 정도의 사업에 지나지 않았다.
전날 내가 고연에서 주천 백가의 칼귀 노인과 시비가 붙었을 때 괴선이 그를 옹호하고 나선 이유도 그가 그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덕행을 보인 인물이어서였다. 괴선은 오대세가 출신으로서 그런 품성을 가진 이는 가물에 나는 콩처럼 드물다고 했다.
같은 부피의 황금 이상의 값어치를 갖고 있다는 홍설을 바라보며 나는 이 주전자에 든 양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진소월이면 순식간에 계산해낼 터였다.
귀빈전주 옥주완이 나를 부르러 왔을 때 나는 맨바닥에 좌정한 채 묵상에 잠겨있었다.
간밤에 알린 대로 종을 울려 미리 기별하고 들어왔음에도 그는 내게 방해가 될까봐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를 위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로들 가는 겁니까?”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온 옥주완이 냉큼 대답했다.
“태평전(太平殿)으로 가고들 있는 게지요. 그곳에서 오시(午時)에 총회가 열릴 예정이니까요. 제가 전왕을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불쑥 물었다.
“무왕 어르신도 나오십니까?”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옥주완이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나는 그가 ‘덫’에 대해 알지 못함을 알았다. 그랬다면 이렇게 태연자약할 리 없었다. 혹은 애당초 나를 잡기 위한 ‘덫’ 따위는 없었던 건가. 진소월의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오대세가의 수뇌부는 자기들 안마당에 들어온 ‘골칫덩이’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으려 할 터였다. 무왕은 그들의 아우성에 못 이겨 나를 잡으러 나서게 될 것이었다.
진소월은 내게 쌍십절 전날 은밀히 무왕을 방문해 밀담을 나눌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원력을 취득하고 독인이 된 경위, 그리고 내 의사와 무관하게 독왕과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을 상세히 밝힘으로써 그의 이해를 구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녀는 나의 안전이 무왕을 설득할 수 있을지 여부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젯밤 나는 고민 끝에 내 방식으로 난관을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소월의 방책은 무왕에게 사정을 하라는 것이었기에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무왕이 내 얘기에 수긍할 가능성도 그리 높지 않을 듯싶었다. 어쩌면 자승자박하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조우성의 일에 공공연하게 개입함으로써 나는 배수진을 쳤다. 떠들썩하게 정맹에 들어섰으니 무왕과의 사전 면담은 물 건너 간 셈이었다.
인파로 넘실거리던 대로가 쩍 갈라졌다.
나는 군중이 터준 길을 성큼성큼 나아갔다. 귀빈전에서 태평전까지의 거리는 이백여 장 정도에 불과했기에 목적지에 이르는 데는 반각 밖에 걸리지 않았다.
뜻밖에도 태평전 경내는 한산했다. 내 두 발짝 뒤에서 시종처럼 졸졸 따라왔던 옥주완이 서열 오십 위 이내의 고위직들만 청석이 깔린 원장(元場) 안으로 들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칠팔백 평은 됨직한 원형 공간 안에는 과연 사오십 명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들 나를 보고는 억지미소를 그렸다. 일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들이 ‘덫’을 놓은 자들임을 직감했다. 대략 스무 명 남짓했고 전원이 상당한 내기를 갈무리한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집법전주 소웅성도 들어있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무왕에게 제압당한 나를 덮칠 자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는데 멀리서 함성이 일었다. 무왕의 도래를 예고하는 신호였다. 잠시 후 오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종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무왕이 태평전 경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