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09
제108화 내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그녀가 왜 전 가가를 보자고 했대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말을 전한 진천수도 모른다고 했소. 당연히 나도 모르오.”
“이미 약속을 한 데다 조 집사 때문에라도 현가를 찾아야 하니 그녀를 만나야 할 테지만 되도록, 아니 무조건 독대는 피했으면 해요.”
“무얼 염려하는 거요?”
“모르겠어요. 그게 무엇이건 그녀와의 만남이 상서로울 리가 없어요. 그녀는…….”
진소월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심경을 이해했다. 그녀는 ‘부용아씨’라면 치를 떨었다. 그녀에게 부용아씨는 모친이 아니라 심혼에 깊은 상처를 새긴 원수였다.
부용아씨는 갓난아이였던 진소월을 햇빛에 노출시켜 살갗이 짓무르는 걸 보면서 깔깔거리곤 했다. 그녀에겐 장난이었지만 진소월에겐 만행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소월은 부용아씨가 그녀를 두고 저주받은 아이라며 떠버리 아저씨에게 목을 꺾어버리라고 종용하던 모습을 수차례나 목격했다. 태어나서는 안 될 귀물이 나왔다고 악담을 퍼부으며 직접 그녀의 목을 조르려 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진소월에겐 끔찍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진소월이 부용아씨를 모친으로 여기지 않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누가 그녀를 천륜 운운하며 비난할 수 있겠는가. 모녀 사이의 화해는 천지가 뒤바뀌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나는 난감했다. 독대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무왕의 말을 부용아씨에게 전한단 말인가.
“걱정하지 마오, 소월. 잠시 얼굴만 보고 나올 테니까. 그 여자의 꿍꿍이속이 뭐건, 어떤 요상한 짓을 하건 다 대처할 수 있소. 나만 믿구려.”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진소월은 더 이상 부용아씨 건에 대해 발언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 * *
괴선은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굴었지만 그의 기쁨과 흥분은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의 보름달만큼이나 확연했다.
모두들 한마음으로 내가 가지고 온 낭보를 반겼다. 특히 한 달이 넘도록 괴선의 수족을 자처하고 수발까지 들었던 광객은 눈물까지 쏟아내며 감격했다.
나는 광객의 태도에 반했다. 필생의 호적수에게 닥친 불행을 안타까워하고 동정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객은 진짜 진국이었다.
그런 이에게 친우와 기쁨을 나눌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되어서 나는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시급을 다투어야 할 사안이었기에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광객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독곡으로 가서 점박이 노인을 데려와 달라는 내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광객과 나는 함께 절곡을 나왔다. 하지만 황무지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려야 했다. 그는 남으로, 나는 북녘으로.
* * *
성주 무림의 동북방 경계는 연강(延江)이었다. 장장 삼천리에 걸쳐 흐르는 대하(大河) 너머는 중원사패의 일익인 명교의 영역이었다.
나는 강을 따라 동진했다. 사오백 리를 올라가니 길이가 일백이십 장에 달하는 대교(大橋)가 나왔다. 천하에서 가장 긴 다리로 알려진 천승교(天乘橋)였다. 폭도 엄청나게 컸다. 족히 이십 장은 될 듯싶었다. 마차 열 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가도 남을 넓이였다.
중원의 명소 중 하나인 천승교는 명교의 영토로 들어갈 수 있는 관문으로도 유명했다. 관문은 천승교 외에도 열네 군데가 더 있었다. 그 관문들을 통과하지 않고 소위 ‘태평성지(泰平聖地)’에 발을 들여놓으면 명교로부터 무단침입자로 간주되어 주살(誅殺) 당했다.
원래는 장왕 집권 이후 대륙 도처에서 그의 선정에 들기를 바라는 민중이 명교의 땅으로 몰려 들어가자 정사마 무림에서 경계선에 감시망을 깔아놓고는 취했던 조치였다. 그러다 장왕이 쇄국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십오륙 년 전부터는 명교 쪽에서 강력하게 월경을 막았다. 예외를 두지 않는 엄격한 법 집행으로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선을 넘으려들지 않았다.
바다 같은 대강(大江)이었으나 내게 도강(渡江)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럼에도 굳이 다리를 이용하기로 한 건 명교에 대한 존중의 표시였다. 더불어 내 방문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싶어서였다.
천승교 양편은 인도였다. 입경 심사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두 마리 기다란 실지렁이처럼 보일 터였다.
나는 새치기를 하지 않고 줄 뒤에 붙었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고 촌각도 지나지 않아 소란이 벌어졌다. 나를 보고 긴가민가하던 군중은 몇몇 눈 밝은 이들이 경악성에 이어 ‘전왕’이라는 별호를 뱉어내자 깜짝 놀라서는 앞 다투어 바닥에 엎드렸다. 대교 중앙을 오가던 마차들도 일제히 운행을 멈췄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와 인도의 행인들처럼 오체투지의 예를 차렸다. 대부분 남들이 하니까 엉겁결에 따라 한 것이었다.
곧바로 다리 반대편 끝에서 일군의 무인이 달려왔다. 적청황(赤靑黃) 삼색의 띠를 소매에 두른 명교의 교위(敎衛)들이었다. 삼십 명 남짓했다.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오십대 중후반의 중년인이 수하들을 대기시킨 후 홀로 내게로 다가왔다. 나보다는 작았지만 거인이라 불려 손색이 없을 장대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가 내 신분부터 확인했다.
“귀하는 전왕이십니까?”
체구에 걸맞은 굵직한 목소리였지만 긴장으로 인해 삭풍을 두드려 맞은 문풍지처럼 떨려나왔다.
“그렇습니다.”
내 경어에 당황한 거인이 문답을 잇지 못하고 쩔쩔맸다. 나는 그를 위해 대화를 진행했다.
“장왕 어르신을 뵈러 왔습니다.”
내가 용건을 밝혔음에도 거인은 우물쭈물했다. 하는 수 없이 그가 할 일을 일러주었다.
“귀교의 교주님께 저를 만나주실는지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제야 부담을 덜은 거인이 응답했다.
“당장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거인은 도망치듯 수하들을 이끌고 다리 저편으로 물러갔다. 나를 그대로 세워둔 채. 이런 제길.
본의 아니게 천승교를 마비시킨 나는 난간으로 가서 낙조를 구경하는 척했다.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다른 곳으로 가기도 뭐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일어나 각자 볼 일들 보십시오.”
모두들 움찔하긴 했으나 아무도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을렀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용감하거나 소심한 부류가 먼저 반응했다. 그들이 몸을 일으키자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기립했다. 허둥지둥 마차로 돌아간 이들은 그나마 나았다. 인도의 군중은 뻣뻣하게 선 채 전전긍긍했다. 다만 일부는 대담하게 나를 곁눈질했다. 그러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나와 눈이 마주칠라치면 화들짝 놀라 비명을 토해내거나 그대로 주저앉았다. 별로 재미가 없었기에 나는 장난을 그만두고 노을을 담은 강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해가 졌다. 그러고도 한참 시간이 지났다. 빌어먹을.
듣던 대로 융통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부류였다. 일단 안에 들여놓고 일을 처리해야 할 게 아닌가. 대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인들에게 불편을 끼치기 싫어서였다. 벌써 세 시진이 지났건만 대기대열은 별 변화가 없었다. 마차들도 거의 정지 상태였다. 나 때문에 발생한 지체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장왕의 처사가 적잖이 언짢았다. 내가 천승교를 택한 건 이곳이 명교에서 가장 가까운 관문이기 때문이었다. 천승교에서 명교까지는 이백오십 리에 불과했다. 전서구를 이용하면 한 시진 내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거리였다. 나와의 접견 여부를 결정하는 데 두 시진씩이나 걸릴 까닭이 없으니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인 것은 나를 길들이려거나 엿 먹이려는 수작임에 분명했다.
인내심이 바닥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 소동이 일었다.
웅성거리는 소음을 달고서 세 개의 그림자가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속도와 경신공의 수준으로 보건대 상당한 고수들이었다. 나는 안력을 돋우었다. 설마.
정말이었다. 상승의 경공을 과시하며 내게로 날아오는 이들은 온 대륙에 위명을 떨친 명교의 삼대호법이었다.
소면통달(笑面通達) 노상지(盧常智).
귀면나찰(鬼面羅刹) 송연(宋燕).
옥면수라(玉面修羅) 송경(宋鯨).
셋 모두 초절정 극상의 강호들이었고 차례로 명교 서열 이, 삼, 사위를 차지하는 거물들이었다.
내 십 보 전면에 착지한 삼인이 먼저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소면통달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전왕. 노부는 노상지라고 하오. 명교의 태상호법이외다. 전왕의 본교 방문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오. 늦어서 미안하오. 북방의 금천에 나가있다가 천승교로 가서 전왕을 모셔오라는 교주의 전갈을 받고는 바로 달려오는 길이오. 최대한 서둘렀지만 거리가 상당한지라 이제야 당도했소.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리오.”
나는 기분이 풀렸다. 목전의 세 노인은 명교의 중추이자 상징적인 존재들이었다. 장왕이 그들 전부를 내보낸 건 최대한의 성의표시였다.
마주 포권했다가 소면통달의 말이 끝나길 기다린 나는 답례를 했다.
“전충입니다. 미리 통고도 드리지 못했는데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공대에 소면통달의 면상에 깃든 웃음기가 짙어졌다. 다소 까칠하게 느껴졌던 귀면나찰의 눈빛도 누그러졌다.
“자, 어서 갑시다. 노부가 안내하겠소.”
소면통달이 신형을 공중으로 띄웠다. 나는 다리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그를 쫓았다. 쌍둥이인 귀면나찰과 옥면수라가 호위하듯 내 후방 좌우에 붙었다.
* * *
나는 의아했다.
천승교를 지난 후 소면통달이 명교가 있는 은천(殷川)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우회가 아니라 아예 다른 장소로 가고 있음에 분명했다. 연유를 물으려다 참았다. 장왕의 지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장왕은 이 행로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잘못 짚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반식경도 걸리지 않았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들판에 이른 소면통달이 경신을 멈추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여기가 적당하겠구려. 우리가 늦는 바람에 전왕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했으니 가급적 신속히 용무를 처리해주겠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늘 웃는 낯이라 소면이란 별호가 붙은 주름살투성이 노인이 돌연 인상을 쓰며 내기를 분출했다. 그와 동시에 내 뒤의 쌍둥이도 투기(鬪氣)를 발산했다. 그들 모두가 장공의 대가들이었으니 무기를 빼들지 않았어도 선전포고를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이들은 모르는 건가? 그들에 뒤지지 않는 칠사(七邪)의 삼인이 내 일수에 모조리 불귀의 객이 되었음을. 암습도 아니고 정면승부로 나를 어쩔 수 있다고 믿는 건가.
노망이 든 게 아니면 그럴 리 만무하니 필경 달리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구석은 당연히 장왕일 것이었다. 그를 뒷배에 두지 않았다면 이들이 이토록 자신만만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추론도 이상했다. 장왕에게 나를 유인한 거라면 그가 나타나기에 앞서 이빨을 드러낼 까닭이 없지 않은가. 강호에 알려진 내 무위를 감안하면 그들의 입장에서 자살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장왕이 내 발밑의 땅 속에 은신해있는 게 아닌 한,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가 나를 공격하기 전에 세 노인의 명줄을 잘라버릴 수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당황했지만 나는 섣불리 손을 쓰지 않고 수차례의 사투에서 단련된 평정심을 담은 눈으로 소면통달을 주시했다. 그러면서 암암리에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장왕의 출현에 대비했다. 그의 기운이 감지되면 불문곡직 순간 가속을 발해 도주할 작정이었다.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점점 더 내기를 키우던 소면통달이 느닷없이 양팔을 들어올렸다. 그의 쌍장에서 장공이 발출될 것이라 예단한 나는 옥소나 철봉을 꺼낼 것 없이 수도(手刀)로 그를 직격하기로 했다. 그와의 거리가 채 이 장도 되지 않았기에 섬(閃)을 가미한 진(進)을 발하면 순식간에 그의 면전에 이르러 목을 날릴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