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13
제112화 딱 십 초입니다
어려운 질문들이긴 하나 나는 장왕이 이것들에 어떤 답을 내어놓을지 궁금한 게 아니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의 반응이었다.
놀랍게도, 아니 짐작했던 대로 장왕은 내 뚱딴지같은 질문에 의아해하거나 답을 찾기 위해 심사숙고하는 대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쩔쩔맸다. 그러고는 그의 뒤에 선 소면통달에게 도움을 청하는, 혹은 지시를 바라는 눈빛을 던졌다.
나는 소면통달이 수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해는 어느 쪽에서 뜹니까? 서쪽입니까? 동쪽입니까? 아니면 남쪽입니까?”
삼척동자라도 아는 문제였지만 장왕은 즉답을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소면통달의 낯짝도 죽상이 되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소? 그럭저럭 무난하게 대처했다고 믿었는데.”
실마리는 장왕의 눈이었다. 그럴싸한 언설을 내뱉던 와중에도 장왕의 동공은 완벽한 무심을 드리웠다. 일견 무왕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해보였지만 전혀 느낌이 달랐다. 그것은 오히려 점박이 노인의 명에 귀를 기울이던 이모의 눈동자를 연상시켰다.
이것만 가지고는 무례를 범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나로 하여금 과감하게 장왕을 시험하도록 한 건 다름 아닌 삼대호법이었다. 장왕과 관련해 지난밤부터 이어진 그들의 언행은 분명 석연치 않은 데가 있었다. 그것을 장왕의 동공에서 받은 느낌과 결합하니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소면통달의 물음을 되돌려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면통달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장왕이 안절부절못하더니 돌연 나를 쏘아보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지를 상실했어도 장왕은 장왕이었다.
“괜찮다, 찬(燦)아. 이이는 우리 친구니라.”
가공스러운 압기를 발했던 장왕의 안광이 누그러졌다. 나는 그가 이모보다는 훨씬 상태가 낫다는 걸 알았다. 명령이 아님에도 말귀를 알아듣지 않은가.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소, 형님.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전왕에게 다 털어놓읍시다.”
옥면수라의 말에 귀면나찰도 거들고 나섰다.
“그래요, 오라버니. 차라리 잘 됐어요. 더 이상 애를 태우지 않아도 되니. 사정을 알리고 전왕의 양해를 구해요. 그는 우리를 이해해 줄 거예요.”
소면통달이 다시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교주를 청운정(靑雲亭)에 모시고 가게들.”
쌍둥이가 장왕을 데리고 나가자 소면통달이 나에게 말했다.
“우리도 자리를 옮깁시다. 전부 얘기해주겠소.”
* * *
소면통달이 나를 이끈 곳은 가을걷이를 끝낸 황량한 논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나는 물꼬를 터주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한 일 년쯤 됐소. 공교롭게도 전왕이 강호에 처음 이름을 알렸을 무렵이구려. 마웅이라는 별호가 전해진 날 무림에 새로이 등장한 초신성을 소재 삼아 노부와 대화를 나누다 말고 교주가 별안간 횡설수설하더이다. 그것이 최초의 징후였소. 그래도 간혹 맥락 없는 이야기를 쏟아낼 뿐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해를 넘기면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소. 손을 쓸 새도 없이 교주는 서너 살 아이가 돼버렸소. 교주의 변고가 알려지면 큰일이기에 나와 아우님들은 그때부터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랬소. 하지만 교주가 신공을 연마하고 있다는 구실로 열흘에 한 번 꼴로 노출할 수 있었소. 오늘처럼 말이오.”
안 그래도 궁금했다. 이지를 거의 상실한 장왕이 무슨 수로 회의를 집전할 수 있었을까. 내가 묻기도 전에 소면통달이 의문점을 해소해주었다.
“교주는 진시에서 오시 사이 두 시진 간은 그나마 정신이 멀쩡해진다오. 뭐, 그래봤자 겨우 간단한 말을 이해하는 정도지만. 다행히 암기력은 그대로인지라 꽤 복잡한 내용도 외울 수 있소. 그래서 우리는 회의에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해서 미리 주지시키곤 했소. 내가 신호를 보내면 교주는 순서대로 준비했던 말을 쏟아냈소. 아슬아슬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지만 신공 수련에 몰두하느라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핑계로 넘어갔소. 그래도 오늘은 썩 잘한 편인데 전왕에게 걸릴 줄은 몰랐구려.”
“대신들이 회의 중에 질문을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도 사전에 합의했던 겁니까?”
웬일인지 소면통달이 면상을 구겼다.
“합의라기보다는 명령이었소. 아까 보았듯 질문이 나오면 금방 들통이 날 터인데 어찌 허락할 수 있었겠소? 처음엔 다들 반발했지만 힘으로 눌러버렸소. 전통을 들먹이며 바락바락 대드는 고지식한 위인 두엇을 본보기로 처리하니 다들 찍소리도 못하더이다.”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질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내 최대의 관심사부터 확인했다.
“장왕 어르신의 무력은 그대로입니까?”
소면통달이 반문했다.
“어떨 것 같소?”
“이전엔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무력에는 별 이상이 없을 듯싶습니다만.”
“잘 보셨소. 몸에 배서 그런지 수련은 능숙하게 해내이더이다. 위력의 차이도 없어 보이고. 물론 우리 수준으로는 교주의 무위에 변동이 있어도 감지할 방도가 없소. 퇴화했는지, 단순히 유지 중인지, 아니면 정신 상태와 무관하게 늘었는지.”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주와 비무를 하겠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정기적으로 비무를 하면 장왕 어르신의 무력의 진퇴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아! 묘안이오.”
나는 흥분을 감추려고 애썼다. 장왕의 변고는 나에게 복운이었다. 이런 게 전화위복인가. 아님 말고.
“그런데 아까 보니 장왕 어르신은 어르신께 많이 의지하는 것 같던데 어르신의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지요?”
나에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질문이었다.
“그런 듯하오. 아우님들 말도 듣긴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아니외다. 아마도 내가 교주와 보다 연이 깊기 때문일 게요.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왔고 한때는 사부였으며 같은 이상을 추구하며 평생 동고동락했으니 교주에겐 내가 가장 가까운…….”
눈시울이 붉어진 소면통달이 말끝을 흐리더니 황급히 사과했다.
“미안하오.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구려. 옛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구려.”
나는 소면통달을 위무하지 않고 진도를 나갔다.
“장왕 어르신과의 비무에 관해 어르신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면?”
“그분께 전력을 다해 저를 상대하라고 해주십시오.”
소면통달이 가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전왕의 무위가 교주와 대등하거나 능가한단 말이오? 전왕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허어, 나는 지금 천하제일인이나 고금제일인을 넘어 영세제일인을 보고 있는 게였구려.”
민망했다. 간신히 소면통달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은 나는 그의 충격을 완화시켰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기껏해야 십 초가 한계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장왕 어르신께 십 초만 저와 어울려주라고 이르십시오. 딱 십 초입니다. 그 초수를 넘으면 안 됩니다.”
나는 내 목숨이 걸려있다는 뒷말은 생략했다.
소면통달이 멋쩍게 웃었다.
“아아, 그렇구려. 솔직히 말해주어서 고맙소, 전왕.”
바라는 바를 얻어낸 나는 문답을 재개했다.
“만약 제가 오늘 장왕 어르신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했다면 어쩌실 작정이었습니까?”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소면통달은 장황한 답변을 내놓았다.
“맹세컨대 전왕을 속일 생각은 없었소. 다만 교주의 일은 당분간 감추고 싶었소. 전왕이 혹시 그것을 문제 삼아 연수 제의를 철회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오. 우리는 전왕과의 관계가 보다 돈독해지고 신뢰가 구축된 연후 사정을 알릴 참이었소.
애초의 구상은 일단 전왕을 돌려보낸 후 교주가 신공 창안을 이유로 급거 폐관수련에 들도록 하는 것이었소. 엉성한 수법이나 무인에겐 그만한 핑계거리가 없잖소. 특히 교주는 대종사 급의 무존(武尊)이니 꽤 설득력이 있으리라 보았소.
기실 전왕이 구세원에 친인들을 받아달라는 청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그 방안을 관철시키려고 했소. 우리로서는 사활이 걸린 사안이니 협상을 깨뜨릴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감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오. 결과적으로 이렇게 잘 풀려 한시름 놓았소.”
쓴웃음이 났다. 아쉬운 쪽은 나인 줄 알았는데 명교가 나를 이리도 필요로 했다니.
뭐, 서로 원하는 걸 얻었으니 불만은 없었다. 아니, 대만족이었다.
내가 대꾸를 주지 않자 소면통달이 말을 이었다.
“간밤에 애기했듯 우리는 오랫동안 전왕을 주목했다오. 전왕만이 아니라 전왕 주변의 친인들도 면밀히 조사했소. 그러고는 장차 손을 잡아야 할 이들이라고 결론 내렸소. 구세원에 들게 해달라는 친인이 전날 보성 현가의 봉공에게 납치되었다던 여인일 테지요? 그 여인과 그 여인의 부친이 결성한 해원사가 전원 일대에서 어떤 사업을 했는지 알고 있소.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능히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다고 판단했소. 물론 주(主)는 어디까지나 전왕이오.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떤 이상도 공염불에 불과하니까.
앞으로 잘 부탁하오, 전왕. 교주가 후계자를 두지 않았으니 향후 명교의 영토와 백성들은 전왕에게 건네질 게요. 부디 교주 못지않은 성군이 되어 우리 늙은이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오.”
이건 횡재가 아니라 날벼락이었다.
“받들기 어렵습니다, 어르신. 아직 정정하시니 지금이라도 장왕 어르신의 뒤를 이을 기재를 기르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이가 굳건히 설 때까지 제가 뒤를 받쳐주겠습니다.”
소면통달이 감격했다.
“말만 들어도 고맙구려.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소. 전왕과 한 배를 타게 되어 너무나 든든하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현과 더불어 진소월이 반드시 포섭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장왕과 한편이 되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 * *
나는 소면통달이 안내한 용도불명의 장소가 마음에 들었다.
직방형의 거대한 구덩이였는데 장왕과 비무를 벌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족히 이천 평은 됨직한 넓이에 깊이도 상당했다. 바닥은 다소 울퉁불퉁했지만 비무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비처의 지하광장을 보는 듯했다. 위만 막혀있다면 지하광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소면통달이 장왕을 데려오겠다며 구덩이를 나갔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작전을 구상했다. 아니, 각오를 다졌다. 나는 생사투에 준하는 결의를 품고서 비무에 임할 참이었다.
내가 제시한 십 초는 모험이었다.
장왕이 무왕과 동일한 무력의 소유자라고 가정했을 때 현재 버틸 수 있는 최대치는 팔 초였다. 그것도 지난밤 전원이 초절정 극상의 고수인 명교 삼대호법의 합공을 견디며 새로이 터득한 신법을 보탠 숫자였다. 그게 없었다면 칠 초가 한계였다.
어쩌면 초수를 세는 게 무의미할 지도 몰랐다. 사오 초 만에 막판에 몰린다고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십 초를 초과하고도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할 수도 있었다. 장왕의 상태, 그의 정확한 무위, 그리고 나와의 상성 등 다양한 변수가 존재했다.
어쨌거나 전력을 다할 장왕에게 십 초를 버텨내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나는 이 버거운 과제를 완수함으로써 보상을 받기를 바랐다. 다수의 적들이나 강자와의 결전을 통해 이루곤 했던 비약이 또 한 번 일어나기를 빌었다. 나는 내가 여전히 상승국면에 있다고 믿었다.
만약 아니라면? 욕심에서 비롯된 착각일 뿐이라면?
그렇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설령 장왕과의 비무에서 예기치 않은 변을 당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