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14
제113화 제가 옆을 지키겠습니다
일각 후 소면통달이 장왕을 데리고 돌아왔다.
예상과 달리 귀면나찰과 옥면수라는 그들과 함께 오지 않았다. 소면통달은 위에 남고 장왕 혼자 아래로 몸을 날렸다. 구덩이 가장자리에 선 소면통달이 내게 말했다.
“교주에게 전왕이 원하는 바를 주지시켰소. 선공을 하면 대응을 할 게요. 부디 조심하구려.”
나는 내 칠팔 장 전면에 착지한 장왕을 바라보았다. 유심히 살펴보더라도 그의 이상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다. 약간 멍한 느낌을 주는 동공만이 그의 이지가 흐려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철봉과 옥소를 꺼내기 전에 포권을 하며 장왕에게 예를 차렸다.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장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소면통달을 올려다보았다. 소면통달이 내 말을 옮겨주었다.
“그이가 잘 놀아보자는구나.”
장왕이 헤벌쭉 웃었다. 대번에 근엄한 인상이 망가지며 동네바보 같은 얼굴이 되었다. 속이 쓰렸다. 진소월이 ‘완벽한 인간’이라 평했던 이가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 * *
장왕 정찬(鄭燦).
나이 육십사 세. 무위 절대지경. 신분 명교 교주.
정찬은 떡잎시절부터 될성부를 나무가 될 것임을 알린 신동이었다. 그의 재주가 처음 발현된 분야는 무공이 아니라 경학이었다. 그를 지도했던 노사들은 대학(大學)들에 버금가는 탁월한 경전해석을 듣고는 자기들이 배워야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학문에 대한 정찬의 궁구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이는 그에게 훗날 고대 성군(聖君)의 재림이라는 칭송을 안긴 선정의 바탕이 되었다.
무공 방면으로도 정찬은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었다. 전대 교주의 아홉 제자들 중 여섯째였던 정찬은 열 살 무렵에 이미 그보다 예닐곱 살 연상의 사형들을 능가하는 성취를 보임으로써 이견 없이 소교주로 낙점되었다. 너무나 격차가 현격했기에 그의 사형제들을 그를 질시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소싯적부터 문무겸전의 천재로 이름을 알렸지만 중원 동북방에 한정되었던 정찬의 명성이 온 대륙을 울리게 된 계기는 그 유명한 사사문(死死門)의 초신성 공우와의 일전이었다.
불과 서른의 나이에 초절정의 고수들을 연파하며 위명을 떨치고 있던 공우가 당시 그의 유일한 경쟁자로 꼽히던 정찬에게 누가 최고인지를 가리자며 비무를 청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 중원이 떠들썩했다. 둘은 온중에서 격돌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우의 승리를 점쳤지만 뜻밖에도 승자는 정찬이었다. 이백여 초의 공방전 끝에 약세를 인정하고 물러선 공우는 천하제일기재라는 명성을 정찬에게 넘겨준 후 이를 갈았다.
팔 년 간 절치부심한 공우가 우세의 확신을 가지고 정찬에게 재도전을 신청했을 때 세인들은 이번에야말로 그가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비무 결과는 또 한 번 중론을 뒤집었다.
그들의 삼차전은 그로부터 십삼 년 후에 벌어졌다. 그때야말로 절대다수가 공우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가 사파 무림을 평정하고 사왕에 등극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정찬은 딱히 주목할 만한 업적이 없었다.
최초의 비무 장소였던 온중에서 다시 격돌한 양인은 문자 그대로 경천동지할 대결을 펼쳤다. 사왕 공우는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그날도 정찬의 벽을 넘지 못했다. 둘의 특장기가 공히 장공이었기에 이날의 승리로 정찬은 장왕이란 별호를 획득했다.
위상이 급상승한 정찬은 이 년 후 혼세십삼군의 일원이었던 전대교주가 사망한 후 교주 위에 올랐다. 그리고 일개 지역의 패자였던 명교는 일약 중원사패의 일익으로 발돋움했다. 정복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은천 사방 일천리의 대소문파들이 명교로의 복속을 자발적으로 결의한 덕분이었다.
광대한 영토와 수백만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가 된 장왕은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통치를 선보였다. 만인이 그의 치세에 들기 위해 명교의 땅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정사마의 무인들이 부랴부랴 국경선에 진을 치고 민중의 월경을 막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수만 명이 참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자 명교는 스스로 쇄국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정사마 무림과의 갈등을 봉합했다.
* * *
진소월에게 들었던 장왕의 약사를 떠올리며 나는 무기들을 꺼내 양손에 쥐었다.
장왕의 눈빛에 변화가 생겼다. 흐릿했던 초점이 보다 뚜렷해졌다.
나는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심호흡을 했다. 이제 절대강자를 상대로 나 자신을 시험해야 할 시간이었다.
폐에 공기를 가득 채운 나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장왕에게 쇄도하며 두 줄기의 빛살을 쏘아냈다. 장왕이 그의 좌우를 공략하는 광환에 주의가 팔려있을 때 그의 전면에 광폭을 발출했다. 빛이 폭발하며 혈인이 나타났다. 피투성이가 된 장왕이 마구잡이로 장공을 퍼부었다. 실로 가공스러운 태풍이었다. 위력만 따지만 내가 경험한 최강의 장공이라 할 사왕의 장공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왕에겐 정교함이 부족했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가 일으킨 폭풍을 빗겨냈다. 그와 동시에 광망을 던졌다. 빛의 그물은 미친 듯이 쌍장을 휘두르고 있는 장왕을 덮쳤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당황했다. 설마 장왕이 맥없이 당했단 말인가.
기우였다. 그물을 찢어버리고 나온 장왕은 미친 소처럼 날뛰었다. 그가 쏟아내는 장공에 나 대신 얻어맞은 땅과 벽이 파이고 깨져나갔다. 순식간에 지형을 바꿔버린 장왕은 무시무시한 속도를 과시하며 거리를 벌리려는 나를 추격했다. 우리는 술래잡기를 하듯 쫓고 쫓겼다. 그가 공격하면 나는 반격했다. 십 초는 진즉 지났고 공방전은 삼십 초로 치닫고 있었다.
관전하던 소면통달이 연신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해라, 찬아!”
장왕은 소면통달의 명을 듣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더욱 흉포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일방적으로 몰리지 않고 대등한 형세를 유지했다. 아니, 방어를 도외시한 장왕이 계속 내 광환에 부상을 입었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유리한 형국이었다. 솔직히 말해 마음을 독하게 먹었으면 그를 끝장낼 수도 있을 터였다. 싸움에 능한 이리가 월등한 힘을 갖고 있는 황소의 목을 물어뜯어 쓰러뜨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비무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자 소면통달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나는 격전장으로 뛰어내리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장왕의 장공이 스치기라도 하면 운신에 지장을 받을 터이고 그러면 그의 장공에 직격당할 위험성이 컸기에 회피에 전력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삼사 장 왼쪽에 떨어져 내린 소면통달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태풍에 휩쓸려 날아갔다. 그를 구하려다 나까지 위급지경에 처할 터이기에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소면통달이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가 죽으면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장왕을 소면통달이 날아간 반대쪽으로 유인했다. 벽이 지척이었기에 상당한 모험이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다. 나는 광폭으로 맞불을 놓으며 절정의 신법으로 장왕의 장공을 흘려냈다. 하지만 장공의 경기에 걸려 몸이 팽이처럼 돌며 튕겨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일시지간 균형을 잃은 탓에 장왕의 후속공격에 대처하기가 용이치 않았다. 허공에 뜬 장왕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광포한 바람이 산사태처럼 쏟아졌다. 빠져나갈 공간은 전무했다. 유일한 퇴로는 흙벽 속으로 스며드는 것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그리고 심상에 들어찬 암담함을 쪼갤 빛줄기가 비치려는 찰나 거짓말처럼 장왕의 장공이 뚝 멈췄다.
아쉬웠다. 너무나 아쉬웠다.
비약이 일어날 참이었는데 코앞에서 놓친 것이었다. 느낌 상 월척이었다. 그걸 낚았더라면 단숨에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나를 방해한 노인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안구에 준 힘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소면통달이 끼어든 것은 그로서는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러니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괜찮소, 전왕?”
소면통달의 물음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아아, 다행이오. 십 년 감수했소. 딱 십 초만 하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교주가 이리 흥분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소.”
쩝.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교주는……, 교주는 어땠소?”
얼마나 내키지 않는 질문이었을까. 답변을 주기도 괴로웠다.
“죄송한 말씀이오나 장왕 어르신께서 사왕과 다시 붙으신다면 그를 감당할 수 없으실 겁니다.”
사왕이 낭왕과 더불어 십왕 중 최약체로 꼽히는 까닭은 장왕과의 삼차전에서 패배한 데 기인했다. 그 후 북해의 빙왕과 동해의 해왕이 차례로 장왕에게 도전했다가 평수를 이루고 물러갔으니 사왕이 장공 대종사들의 맨 아랫자리로 전락한 것도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나는 설사 장왕이 정상이라도 지금 사왕과 싸운다면 이기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온전한 솜씨를 보일 수 없는 장왕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겪은 사왕의 무력은 확실히 장왕 이상이었다.
나는 소면통달의 어깨 너머로 장왕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그가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아프다며 우는 소리를 했다. 소면통달이 아이처럼 징징거리는 그를 달랬다.
“가서 금창약과 갈아입을 의복을 가져와야겠소. 잠시만 교주를 부탁하오, 전왕.”
말을 알아들었는지 같이 가겠다며 장왕이 소면통달에게 매달렸다. 소면통달은 엄한 말로 간신히 그를 떼놓았다. 소면통달이 떠나고 나와 둘만 남자 장왕은 안절부절못했다.
“운공에 드시지요. 제가 옆을 지키겠습니다.”
장왕은 내 권유에 따르는 대신 폐허가 된 땅을 가로질러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다행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던 소면통달의 말을 기억하는지 위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나는 내 눈길을 피하는 그에게서 눈을 돌려 천공을 바라보았다. 언제 몰려왔는지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 * *
나는 절곡으로 돌아갔다.
소면통달은 장왕의 상태에 관해 함구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나는 진소월이 나와 ‘일심동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나를 강제할 수단이 없었기에 소면통달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절대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을 것을 보장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내게서 사정을 들은 진소월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심각한 분위기와 무관하게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녀와 밤새 향후의 계획을 의논한 나는 날이 밝은 후 동굴을 나와 숲으로 갔다. 친인들을 명교로 운반할 탈 것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잡목이 우거진 수림에서 반 시진 이상 공을 들여 전날 늪지에서 절곡으로 올 때보다 튼튼하고 편안한 틀을 제작했다. 그때보다 거리도 훨씬 멀었지만 비행속도가 사뭇 다를 터였기에 안전성과 안정감을 한층 높여야 했다. 반듯한 통나무 열네 개를 덧댄 후 위에 명교에서 가져온 가죽을 깔았다. 불의의 사고로 튕겨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사방에 두 자 높이의 목책을 둘렀고 아예 지붕까지 얹었다.
작은 통나무집 같은 틀을 완성한 나는 친인들을 고정시킬 넝쿨을 모으는 걸로 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절곡으로 돌아가지 않고 숲에서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진소월의 병증으로 인해 해가 난 동안에는 출발할 수 없었다.
장왕과의 비무에서 아쉽게 놓쳤던 빛줄기를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보니 눈 깜짝 할 새 날이 저물었다. 좀 더 수련을 하고 싶었으나 욕심을 접은 나는 절곡으로 가서 틀에 친인들 다섯 명을 태우고 명교가 있는 북녘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