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15
제114화 그러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소면통달은 구세원을 통째로 내주었다.
명교의 전전대교주가 의학 연구를 위해 설립했다는 구세원은 사백 평 넓이의 단층 석조건물이었다. 건물 전체에 약내가 진동했다. 지하에 열여섯 개의 크고 작은 석실들이 있어 진소월이 지낼 공간을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다.
시설과 약재가 갖춰졌으니 이제 독의만 오면 바로 괴선과 진소월의 치료를 개시할 수 있었다. 그는 전날 합의한 대로 내가 명교에 들었다는 소문을 들은 즉시 달려올 터였다. 내가 명교 행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데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나는 독의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명교를 떠났다. 두 가지 용무가 있어서였다. 하나는 나현을 만나 교신방법을 재조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성 현가에 가서 조봉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기실 둘 다 시급을 다투는 사안은 아니었으나 굳이 서두른 까닭은 독의와의 거래를 의식해서였다. 진소월의 강권에 따라 나는 점박이 노인이 당도한 후에 그의 연구에 응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적어도 보름 정도는 외부로 떠돌다 가야 했다. 그 동안 불귀곡에서 무학 궁구와 무공 수련에 매진할 계획이었다.
끊임없이 가속 경신을 시도해가며 부지런을 떤 덕분에 정오경에 명교를 출발한 나는 자시가 되기 전에 우한에 이르렀다.
그간 수만리를 오가며 부단한 노력한 결과 연속 가속은 스무 번 이상 가능해졌다. 사왕이나 마왕이 쫓아오더라도 이십 리쯤은 달아날 수 있을 터였다. 그들과 정면승부를 벌인데도 아무것도 못해보고 무참히 깨지지는 않을 터였다. 비록 십 초를 버티는 게 한계일 터이지만 내 명줄을 끊으려면 그들도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나는 내가 두 명이라면 버거우나마 사왕, 혹은 마왕과 대적할 수 있을 듯싶었다. 무력이 두 배로 증가하면 그들과 자웅을 결할 수 있으리라는 뜻이었다.
현재의 추세대로 비약이 꾸준히 이어진다면 몇 달 안에 그만큼의 증강을 이뤄내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나는 목표를 달성하면 한우경과 이모의 복수부터 결행할 작정이었다. 마왕과의 생사투라니, 상상만 해도 짜릿하고 두렵고 황홀했다.
다른 곳은 만물이 잠들었을 시간이지만 중립지대 최고의 향락도시인 우한은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도시가 뿜어내는 화려한 야광과 시끌벅적한 소음이 눈과 귀를 어지럽혔다.
나는 저자로 들어가지 않고 우한 외곽의 허허벌판으로 갔다. 황야 가장자리를 흐르는 하천가에 무성한 풀에 감춰진 출입구가 있었다. 비로에 든 나는 구불구불한 통로를 내달렸다. 네 번째였기에 눈을 감고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은 거리가 아니었지만 반의반각 만에 지하석실에 이른 나는 종을 울려 나현에게 내방을 알렸다.
비대한 나현과 삐쩍 마른 혈접이 변함없이 일층의 계단참에 서서 나를 맞았다. 나현은 수많은 사업을 거느렸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었지만 활동적인 성향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일을 그의 장원에 앉아서 처리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사전 통보 없이 찾아오더라도 허탕을 칠 우려는 없었다.
* * *
“어서 오시오, 전왕. 자주 뵈니 좋구려. 딱 한 달 만인가요?”
환한 미소를 짓고서 나를 반겼지만 나는 나현의 어두운 안색이 마음에 걸렸다. 병이라도 든 걸까. 기실 그는 몸 관리를 좀 해야 했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성정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뚱뚱했다.
“일전에 찾아뵙고 정확히 사십 일이 지났습니다.”
“아! 그렇구려. 늙으니까 기력은 물론이고 기억력도 예전만 못하다오.”
엄살만은 아닐 터였다.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할 내공을 지니지 않은 범인은 칠십대가 되면 급격히 쇠약해지는 법이었다.
“한 달이나 사십 일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내 위로에 고소를 머금은 나현이 사담을 접고 그의 관심사를 거론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려. 그나저나 친인들은 명교로 옮기셨소?”
진소월 등을 명교에 데려다 놓은 지 채 열 시진도 지나지 않았기에 그 정보가 나현에게 전해지기엔 아직 일렀다. 나현은 사흘 전 내가 천승교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는 그 전후 과정을 추론했음에 틀림없었다. 독의와 정맹에서 만난 사실도 알고 있을 테니 둘을 묶어 사정을 파악하는 것은 그의 수준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렇습니다. 모두들 구세원에 들어갔습니다.”
굳이 비밀로 할 까닭이 없었기에 나는 친인들의 거처를 밝혔다.
“독의도 곧 그리로 합류하겠구려. 구세원이라면 내가 따로 도움을 드릴 일이 없겠구려. 유감이외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무튼 대단하오. 장왕과의 연수를 성사시키다니. 쉽지 않을 거라 보았는데. 명교의 생존을 최우선가치로 내세우는 그가 사마 무림과의 정면 대립을 감내할 결정을 내리다니, 참으로 뜻밖이었소.”
“맞습니다, 대인. 저로서도 예상 외로 잘 풀렸습니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현에게 장왕의 상태에 관해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진소월 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한 소면통달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정보통인 나현은 장왕의 이상에 대해 어떤 기미도 감지하지 못했을까. 그의 이지에 문제가 발생한지 벌써 일 년이나 지났으니 아무리 소면통달이 보안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현이 내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하긴 장왕이 변했다는 얘기는 듣긴 했소. 작년 겨울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집전하던 대신회의도 열흘에 한 번 꼴로 바꾸고 대신들과 격의 없이 벌이던 난상토론도 중단했다고 하더이다. 회의에서도 결론만 제시하고 일절 이의제기는 받지 않았다고 하오. 그이를 오랫동안 알아왔던 이들은 마치 다른 사람 같다고들 수군거린다지요.”
괜히 뜨끔했다. 나현이 살 두덩에 파묻힌 눈을 치켜떴다.
“이번에 그이를 친견하셨겠지요? 전왕이 보기엔 어떻습디까?”
기로였다. 소면통달과 한 약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에게 진실을 고할 것인가. 고심 끝에 나는 중도를 택했다.
“그분에겐 문제가 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함구하기로 언약했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대인.”
나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허허, 그런 말씀 마시구려.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오. 그 정도면 충분하외다.”
다행히 분위기가 경직되는 대신 더 화기애애해졌다.
나현과 새로운 소통방식을 합의한 후 나는 진소월의 당부를 전했다.
“앞으로 사벌과 마련의 동향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명교에 들은 걸 알게 되면 그들은 필히 긴급한 움직임을 보일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그 말씀을 드리려던 참이었소. 그전에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혹시 이십여 일 전 독왕과 함께 사벌에 잠입해 봉산 인근에서 사왕과 격전을 벌였다는 게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리라 생각했소. 그 정보를 접하자마자 독곡의 상황을 알아보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오. 과연 독왕이 팔월 말에 독곡에서 사라졌다가 최근에야 다시 나타났다더군요. 실은 불과 두 시진 전에 그가 독곡에 돌아왔다는 특보를 받았소. 아마 사벌과 마련도 지금쯤 알고 있을 게요.”
예상했던 바였지만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 * *
명교로의 이동을 결행하면서 진소월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마왕과 사왕의 결맹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나를 잡기 위해 공동보조를 취했지만 그들이 직접적으로 연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들 둘이 전격적으로 명교로 쳐들어온다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다만 이점에 관해 진소월은 의외로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마왕과 사왕은 앙숙이었다. 서로를 극도로 싫어하고 원수처럼 취급했기에 내가 등장하기 이전에 그들이 손을 잡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진소월답지 않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독왕의 출현으로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군임을 드러냄으로써 나는 사벌이나 마련 전체와 싸울 수 있는 전력을 과시한 셈이었다. 더욱이 이번에 장왕까지 내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사왕과 마왕 모두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 떨 게 틀림없었다. 그들로서는 강적에 대적하기 위해 ‘죽도록 미운 놈’하고 뭉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마 연합을 기정사실로 놓고 보았을 때 독왕이 결정적인 변수가 될 터였다.
만약 그가 명교에 오면 마왕과 사왕은 침공을 감행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장왕의 변고를 모르는 한 승리를 자신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쌍방 보유한 두 명의 왕들을 빼면 오히려 우리 쪽의 전력이 우세했다. 초절정고수의 수는 저들이 압도적으로 많을지라도 이편에 속한 일당백의 전사, 즉 나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나는 칠사의 남은 셋과 팔마 중 건재한 여섯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들의 합공에 스스로를 던져놓는 무모한 도박을 벌이지 않고 각개격파의 전술을 택한다면 몰살도 가능했다. 이를 나도 알고 그들도 알았다.
하지만 독왕이 독곡에 있다면 사왕과 마왕의 명교 침공은 시간문제였다.
전면전을 벌일 시 그들도 다대한 피해를 입을 게 불 보듯 뻔하고 그리 되면 정맹에 어부지리를 주는 꼴이 될 터이기에 망설이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릴 공산이 컸다. 미적거리고 있다가 독왕이 우리와 합류하는 날엔 기회조차 사라질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독왕의 행방이 매우 중요했다. 하여 나는 나흘 전 점박이 노인을 데려오도록 광객을 독곡으로 보내며 몇 가지 부탁을 덧붙였다. 우선은 독왕에게 명교로의 동행을 재삼재사 권유해보고 그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을 시엔 당분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은신해주기를 간곡히 청하라고 했다. 독왕의 잠적은 사마의 제왕들에게 혼란을 줄 것이었다.
임시조치로 적들의 진군을 일시 예방한 연후 나는 직접 독곡으로 날아가 독왕을 설득할 참이었다.
* * *
잠시 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나현의 설명이 이어졌다.
“독왕이 나타난 날 사벌은 난리가 났소. 물론 정확한 내용은 극소수의 수뇌부들만 공유했지만 그들이 크게 동요하는 바람에 그 여파가 사파 무림 전체로 퍼져나갔다오. 대다수의 사파 고수들은 영문도 모르고 상전들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오.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마련과 정맹도 사정이 비슷하오.
실은 쌍십절에 전왕이 정맹을 찾을 거라는 풍문이 전해졌을 때 직접 원중으로 가서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오. 오대세가의 원로들이 무왕을 이용해 전왕을 해하려 들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오. 독왕과의 명백한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왕과 우호적인 관계를 고수하기로 결정한 건 참으로 의외였소.”
보다 복잡한 내막이 있었지만 나는 나현에게 알리지 않고 침묵했다. 딱히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거니와 무왕과의 내밀한 교감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현이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바랐다. 나현은 진소월처럼 남의 속을 읽는데 능숙한 상람이었다.
“방금 전 전왕이 말한 사벌과 마련의 긴급한 움직임 말인데, 실제로 그런 동향이 포착되었소.”
나는 뜸을 들이는 나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들이 연수할 것 같습니까?”
내 성급함에 나현이 쓴웃음으로 응수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지난 이십여 일 간 물 밑으로 긴박하고 적극적인 협의가 오갔으나 결렬된 모양이오. 밀담의 대표였던 탈혼창군과 혈마 간에는 거의 합의에 이르렀으나 최종결정권자인 사왕과 마왕이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무산된 듯하오. 하지만 여전히 대타협의 여지는 남아 있소. 특히 이번에 전왕이 장왕까지 등에 업었으니 그들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소. 사마의 제왕들은 서로를 떠올리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손을 잡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게요.”
“그러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나도 알 수 없소. 시기를 예측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소.”
“그래도 대인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고집을 부리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현이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