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17
제116화 그때 가서는 어쩌시렵니까?
최초의 경험이었다.
충격적인 경험이기도 했다. 사투 중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했을 때가 아님에도 비약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상에서도 가능했다니. 나도 할 수 있었다니.
나는 전날 한 동안 수련을 등한시한 채 부용아씨와의 인연에 대한 회한에 젖어 있다가 갑작스레 벽을 넘는 체험을 했다던 무왕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생사의 경계에 스스로를 두지 않아도 한계 너머에 이르렀다던 그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전신에 이는 전율을 만끽하며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수십, 수백 가닥의 얽히고설킨 선들을 뇌리에 각인했다. 그러면서 다시금 확인했다. 공(空)과 광환(光環)으로부터 시작된 비약들과 마찬가지로 이 선들 역시 구결로 전환할 수 없음을. 체화하고 구현할 수는 있겠지만 형(形)과 식(式)을 정리하여 남에게 전하는 건 불가능했다. 정형의 설정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라. 수백 장의 나뭇잎을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꿰뚫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아니, 필히 절대지경에 든 이들의 모든 무학이 그러할 터였다. 그러므로 무왕의 심득이 내게 전해진 건 기적이었다. 단순히 내 신법의 뿌리가 그의 절학 만류합일에서 파생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사였다. 무왕이 춤사위를 펼치기 전 부작용과 후유증에 대해 중언부언했던 것도 과도한 경고가 아니었다.
내 복운에 감사하며 나는 새로운 비약에 광우(光雨)라는 이름을 붙였다. 빗줄기들처럼 쏟아질 빛줄기들은 내 최강의 공격초식이 될 것이었다.
* * *
해가 졌다.
좀 더 광우를 붙잡고 씨름하고 싶었지만 나는 미련을 버리고 하산했다.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는 수만 개의 등으로 천공에서 내려오는 어둠을 몰아냈다. 그러나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도처에 존재했다.
이미 두 번이나 누구의 눈에도 걸리지 않고 침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능숙하게 정맹까지 나아갔다. 동북소문(東北小門)을 통해 정맹에 잠입한 후에는 보다 신중하게 움직였다. 절정의 무위를 지닌 무인들의 기감은 범인들의 수백 배에 달했다. 그리고 정맹에는 절정 급의 고수가 수두룩했다.
때로는 굼벵이 걸음으로, 때로는 빛살로 화해가며 이동한 나는 한식경 후 무왕의 거처가 있는 고색창연한 와옥촌에 이르렀다. 정맹 최고의 요처라 할 수 있으나 의외로 경비가 다른 구역에 비해 허술했다. 무왕이 도사린 곳이니 침입자가 있을 리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바람직한 태도였다.
무왕의 와옥을 품은 숲에 들어서서는 긴장이 풀렸다. 무왕은 수림에 일절 비밀호위를 배치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걸어가던 나는 다시 호흡을 닫고 집중했다.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무왕은 어느 지점에서 내 접근을 알아차릴까.
기척을 지우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무왕의 기운을 감지했다. 잠시 멈춰 서서 거리를 가늠했다. 족히 오륙십 장은 될 터였다. 그의 숨소리를 음미하며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내 승리였다. 비록 은밀히 다가갔지만 나는 그를 인지한 반면 그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무왕의 처소 주위에 잠복해 있다가 그가 가까이 올 때 암습하면 그를 해칠 수 있지 않을까. 불경스러운 생각이었기에 얼른 대상을 사왕이나 마왕으로 바꾸었다.
충분히 가능해보였다. 기습의 이점으로 무력의 열세를 상쇄할 수 있을 듯싶었다. 사왕과 마왕이 무방비상태라면 나는 일수에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흥분으로 인해 심장이 뭍에 오른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나는 심호흡으로 나를 진정시켰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최대한 무왕에게 들키지 않고 근접할 작정이었다.
고양이들이 봐도 탄복할 만큼 살금살금 걸어간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왕과의 거리는 이제 이십 장 어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에게선 별 반응이 없었다.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건가.
걸음을 멈춘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목석 흉내를 냈다. 이윽고 무왕의 기운에 변화가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예상과는 반대로 내가 선 쪽으로 오는 게 아니라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마당에 나와 있다가 와옥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은 나는 전진을 재개했다. 만약 지척에 이르도록 무왕이 내 접근을 인지하지 못하면 그에겐 경계를 강화할 것을 권고하고 사왕의 암살을 심각하게 고려해 볼 참이었다.
* * *
숲을 거의 빠져나가도록 무왕은 잠잠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마당과 와옥이 보였다. 무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와옥 속에 든 그의 기운을 어렵지 않게 감지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갔다. 와옥과의 거리가 칠팔 장 남았을 때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쯤 되면 무왕이 나를 놀리고 있는 거라 보아야 했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와옥에서 무왕 특유의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뭐하는 게냐?”
나는 촌로의 처소처럼 소박한 무왕의 방으로 들어갔다. 무왕이 무심하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맞았다. 그의 앞에 넙죽 엎드리고는 인사를 생략한 채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무왕은 내 질문을 묵살하고 그의 관심사를 앞세웠다.
“벌써 그만큼 상승했단 말이냐?”
나는 실소했다. 전날 헤어지며 나는 다음에 그를 만날 때는 삼십 초를 버텨 보이겠다고 호언했다.
기실 삼십은 상징적인 숫자였다.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라면 그 안에 승부가 나고도 남을 터였다. 나는 무왕과 재회할 시 그와 대등한 무력을 현시하겠다고 공언한 것이었다. 그게 고작 팔 일 전이었으니 무왕이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나 십 초는 능히 견딜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무왕의 동공에 의미를 헤아리기 힘든 감정의 빛이 서렸다. 안도일까. 놀라움일까. 혹은 둘 다일까. 두 번째이기를 바랐지만 세 번째일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찾아뵌 건 제 성취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보다 긴요한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무왕이 무슨 용무인지 묻지 않았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내가 운을 띄우고는 침묵하자 무왕이 하는 수 없이 장단을 맞춰졌다.
“무슨 청이더냐?”
나는 팔을 펴고 고개를 들어 무왕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그의 눈을 직시하며 직격타를 날렸다.
“지금 저와 함께 사벌로 가셔서 사왕을 처치해주셨으면 합니다.”
코앞에 번개가 내리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 같은 무왕이 움찔했다. 눈가에도 엷은 경련이 일었다. 그의 부동심을 흔들어 통쾌했다.
무왕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진심이더냐?”
“제가 어찌 어르신께 헛된 말을 지껄일 수 있겠습니까?”
무왕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나더러 정사대전(正邪大戰)을 일으키라는 말이냐?”
나는 이번에도 반문으로 답변했다.
“그러면 안 됩니까?”
내 도발적인 언사에 무왕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물러서는 대신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들은 정파의 영원한 적이 아닙니까? 전쟁을 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데 어째서 망설이십니까? 제가 잔챙이들을 처리하는 동안 사왕을 맡아주십시오. 금방 끝내고 어르신을 돕겠습니다. 제가 합세하면 어렵지 않게 그 사악한 노물을 염왕에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무왕은 침묵했다. 나는 그의 응답을 독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내가 던진 미끼를 그가 물기를 바라면서.
무왕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와는 한 번도 평범한 만남이 없구나.”
무왕의 뜬금없는 감상에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그가 정확히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와의 모든 만남이 좋았다. 특히 호천봉에서의 두 번째 만남은 지금까지도 강호에 나온 이래 얻었던 복운과 기연들 중 최고라고 여길 정도였다. 무왕은 우리 부자에게 은인이자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오죽하면 내 이름이 충(忠)이겠는가.
“하지만 오늘은 유독 심하구나. 사왕과 내가 정면격돌하면 십중팔구 동귀어진하게 될 게다. 단순히 우리가 죽는 걸로 끝나지 않고 방금 말한 대로 정맹과 사벌 간의 전면전이 발발해 수많은 무인들과 무수한 백성들이 죽어나갈 게고. 그걸 바라는 게냐?”
나는 즉시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반각만 사왕을 잡아두십시오. 그 동안 반드시 칠사 중 남은 셋과 방해가 될 만한 자들을 제거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어르신을 도와 사왕을 처치하겠습니다. 그는 결코 우리의 합공을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사왕만 제거하면 사파 무림의 잔당들은 정맹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터이고 어르신이 말씀하신 대규모 희생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왕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의아했다. 설마 내 제안을 받아들일 셈인가. 전부를 거는 극단적인 수법은 나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어울리지만 그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 터인데?
잠시 후 무왕이 결론을 내렸다.
“그건 일방적인 기대일 뿐이다. 네 예측대로 되리란 보장이 없지 않으냐?”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역시 사람은 난제에 직면했을 때 자기에게 익숙한 해법을 택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무왕이 뒤늦게 미끼를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네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설령 사왕을 처치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나나 네가 온전할 가능성은 전무에 가깝다. 목숨을 보전하더라고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게 틀림없다. 그리 되면 누가 정파 무림을 지킬 수 있겠느냐? 나아가 중원 무림 자체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간 정사마의 왕들과 명교의 장왕이 충돌을 자제한 건 새외사왕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당금 무림이 사상 유례가 없는 융성기라고들 하지만 이는 새외 무림도 마찬가지다. 우리 중 둘이 사라지거나 급격히 약화되면 새외의 네 마리 호랑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우리가 빈자리를 차지하려 들 게 뻔하다. 검왕과 도왕은 바깥세상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니 그들이 연수할 시 막아낼 방도가 없다. 그러니 천하 만민이 외적들에게 짓밟히는 참사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경솔한 행동은 자제해야 할 게다.”
박수라고 치고 싶었다. 좀처럼 듣기 힘든 무왕의 열변에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가 정확히 내가 원한 방향으로 나와 주어서.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일단 혀로 입술을 축였다. 진소월의 지도하에 갈고 닦은 언변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사왕과의 대결 결과에 대해선 어르신께서 예상하시는 바와 의견이 다르지만 그와는 별개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새외의 네 마리 호랑이 중 남쪽의 노호(老虎)는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늙어서가 아니라 아군이기 때문입니다. 장담컨대 그이는 저의 편에 설 것입니다. 제가 독곡을 물려받기를 바랄 뿐, 예전처럼 중원을 정복하겠다는 야욕도 없습니다.”
허를 찔린 무왕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곧 눈썹을 완전히 일그러뜨려야 했다.
“둘째, 어르신께선 중원 무림 전체를 걱정하시지만 사파의 우두머리는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제 스스로 새외의 호랑이를 불러들이려는 걸 보니 말입니다.”
“무슨 소리냐?”
“사왕이 낭왕과 접촉 중이라는 첩보가 있습니다. 아마 조만간 흉포한 이리 떼가 중원으로 넘어올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어쩌시렵니까?”
무왕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정보의 신뢰성을 물고 늘어졌다.
“확실하더냐? 아무리 내가 정맹의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지만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보고를 올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바로 어젯밤 사벌의 사정에 정통한 이에게 얻은 내용입니다. 사벌에 관한 한 그이의 정보력은 집보각이나 밀전보다 월등합니다. 그러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근거라고는 사벌을 떠난 대막혈륜이 서역의 스앙카에서 목격되었다는 것뿐이었지만 나 자신이 나현의 추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기에 내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나는 무왕이 근거를 묻기 전에 계속 몰아붙였다.
“사왕으로서는 궁여지책이었을 겁니다. 제가 명교와 연을 맺었다는 것은 들으셨겠지요? 그도 당연히 그 소식을 접했을 겁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똥줄이 탔겠습니까? 독왕은 독곡으로 돌아갔다지만, 이제 장왕이라니. 거기에 독왕이 다시 올라오기라도 하는 날엔 대책이 없잖습니까? 어쩔 수 없이 저를 공적으로 둔 마왕과 손을 잡아야 할 터이지만 견원지간인 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다는…….”
무왕이 내 말을 끊었다.
“그만 하거라.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주도권을 틀어쥐었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