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19
제118화 고지식한 양반 같으니
나는 둘러가지 않고 핵심을 찔렀다.
“무공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공력은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설마 그 심공을 익히는 것만으로 그만한 내력이 생긴 건 아니었을 테지요?”
그럴 수도 있었다. 극악의 마공들은 내공의 속성과 압축적 증강이 가능했다. 백이면 아흔아홉이 부작용으로 인해 얼마가지 않아 폐인으로 전락해서 문제지만.
미지의 무인이 무왕의 칠대조에게 남긴 심공이 마공 계열이라면 무왕의 내력을 설명할 길이 열린다. 하지만 그 경우라면 무왕에게서 마기가 발출되지 않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아니, 어려워진다.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무왕이 극마지체(克魔之體)라던가, 아니면 독정을 내력의 원천으로 하되 독기를 발산하지 않는 나처럼 특이한 경우거나.
나는 둘 중에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둘 다 틀렸다.
“칠조부께 그 심공을 전하며 그 무인이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곤 할 수 없으나 천하의 어떤 심공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상승의 심법이었다. 다만 사람을 가리는 단점이 있었다. 마치 주인을 선택한다는 보검처럼 말이다. 혹은 체질이 맞는 이에겐 보약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겐 독약 같은 거랄까. 아무튼 나에겐 재단한 옷처럼 잘 맞았다.
다만 그 심공만으로 이만한 내력을 일군 건 아니다. 거기엔 영약들의 도움이 지대했다.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내 공력은 지금의 삼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했을 게다.”
“어떤 영약을 복용하셨습니까?”
“처음엔 만년금구의 내단이었다. 그 이후 공청석유와 동자삼, 그리고 만년하수오도 섭취했다.”
“그 귀물(貴物)들을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무왕은 한참동안 답이 없었다. 혹시 훔친 건가? 아니면 뺏은 건가?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왕의 다음 말에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빼앗았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한편으론 기분이 묘했다. 이런 치부를 내게 고백할 만큼 우리가 친해진 건가.
무왕이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비사를 털어놓았다.
“내가 열두 살 때 선대들이 그랬듯 천하를 배회하다 얼마간 상천의 천민촌에 기거하던 우리 일가는 칠조부의 고향인 북포(北浦)에 가서 터를 잡기로 했다. 어른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나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만류일합의 전초들 중 몇 개를 시현하는 데 성공했다. 초유의 일인지라 다들 몹시 흥분했더랬지. 그러면서 내가 절정 고수 배출이라는 가문의 염원을 이루어 줄 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가문 전체가 보다 안정적인 곳으로 가서 나를 키우는 데 전심전력하기로 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한 편이었지만 전부 모이니 마흔 명이 넘더구나. 모두를 내가 성장한 후 다시 세상으로 나와 세가를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부풀었다. 어른들은 나를 총애했고 사촌과 육촌 형제들은 나를 숭배했다. 질시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내가 범접불가의 특출함을 뽐내서가 아니라 너무나 순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 부모를 추억하며 네가 눈동자에 담았던 그리움의 감정을 완벽히 이해한다. 나 또한 그러하니.”
“…….”
“행복한 여정이었다. 청량산에 들 때까지는. 거기서 우리는 녹림도와 조우했다. 좀 더 안전한 경로가 있었음에도 그 산을 넘기로 한 건 우회할 시 칠팔 일은 더 잡아먹게 되거니와 정찰을 갔던 삼촌들이 산적 떼의 흔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참극이 벌어진 건 협곡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위에서 수십 명의 흉한들이 미끄러져 내리더구나. 털어도 나올 게 없을 우리를 친 건 일행의 절반을 차지한 여자들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청량산의 악적들은 성주 무림 녹림구채의 하나에 꼽힐 만큼 강한 패거리였다. 그러나 평생 은밀히 무공을 수련한 가문의 어른들도 만만치 않았다. 나도 칼을 들고 싸웠다. 그날 나는 여섯 악적의 목을 쳤다.”
“아!”
“하지만 싸움은 우리의 패배로 끝났다. 중과부적인데다 적의 두목이 상당한 강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도끼에 머리가 깨진 어른들이 열 명이 넘었다. 남자들 중 홀로 생존한 나는 수염이 면상의 반을 덮은 산적 두목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힘의 열세로 인해 십 초도 버티지 못하고 그의 철부에 어깨를 찍히고 쓰러졌다. 털보는 재빨리 내 마혈을 점했다. 지금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자가 나를 왜 즉살하지 않고 제압만 해두었는지.
내가 무너지자 두목을 포함해 혈전에서 살아남았던 예닐곱 명의 산적들이 여자들을 덮쳤다.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그러다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달아나지 않고 혈족이 몰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산적들은 그들에게 덤비는 할머니들과 숙모들을 무참히 살해했고 할퀴고 물어뜯는 누이들을 능욕했다.
나는 혈도를 풀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무리한 해혈 시도로 인한 주화입마를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다. 격전이 끝난 직후라 흥분해 털보가 제대로 짚지 않았던지 기적적으로 마비가 풀렸다. 털보가 차 버린 칼 대신 내 옆에 죽어 나뒹군 산적이 쥐고 있던 단창을 빼낸 나는 산적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그들과 싸웠다.”
주먹을 꽉 쥐고서 경청하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물으나마나한 질문이었다. 결과는 빤하지 않은가. 그 전투에서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 거인이 내 앞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수련을 하기는 했으나 왼손으로 무기를 부리는 게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악적들을 모조리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두목을 먼저 제거한 게 결정적인 승인이었다. 그자가 땅에 내려놓았던 도끼를 들 찰나 단창으로 정수리를 내리친 나는 다른 악적들도 차례로 처리했다. 아직까지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 그 때 나는 반쯤, 아니 정신이 완전히 나간 상태였다.
마지막 산적의 미간에 창을 꽂고 나자 비로소 시야가 열리더구나. 그리고 바로 주저앉았다. 부지불식간에 입었던 다리의 부상 때문이 아니라 누이들 때문이었다. 아무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모두들 혀를 깨물더구나.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러면서 입에서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침묵했다. 무왕도 입을 닫았기에 마당에 정적이 깔렸다. 좀체 그가 말을 이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진전시켰다.
“만년금구의 내단은 그 산적들에게서 얻으셨는지요?”
“그래. 그날 나는 천하의 녹림을 소탕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려면 살아야했고 강해져야 했다. 당장은 만신창이가 된 몸부터 돌보아야 했고. 두목의 도끼에 찍혔던 우견만이 아니라 전신에 외상을 입었더랬다. 그대로 두면 탈이 날 터이기에 치료를 서둘러야 했는데 산적들의 소굴에 가면 금창약이나 지혈분이 있을 것 같아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협곡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더구나.
두목의 처소로 보이는 석굴에서 약을 찾아 응급처치를 하고 있는데 무언가 눈길을 끌었다. 아니, 후각을 자극했다. 비린내 비슷한 냄새였다. 그냥 나오려다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교묘하게 흙으로 덮어놓은 바닥 밑에 목함이 들어있더구나. 그 안에는 누리끼리한 단환이 들어있었다. 호두알 만했을까. 그보다 작았을지도 모르겠다.
단환을 꺼낸 나는 그것이 말로만 듣던 영약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산적두목이 감춰둘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무작정 입에 집어넣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무모한 짓이었다. 독성을 제거하고 불순물을 걸려내지 않은 만년금구의 내단은 독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아주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날 내가 복용한 것이 무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희대의 영약임도. 어떻게 일개 산적두목이 값을 매길 수도 없다는 귀물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각설하고 나를 살린 건 우리 가문의 시초가 된 심공이었다. 목구멍을 통과하자마자 단환은 내 뱃속에 불을 일으켰다. 극통을 견디던 나는 이러다 내장이 타버릴 것 같아서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가문의 금기였던 심공을 운용한 것이었다. 그것이 통하리라는 계산에서 시도한 게 아니었다. 달리 대안도 없었거니와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으로 벌인 일이었다. 하늘이 돌보셨는지 효과가 있더구나. 며칠 간 죽을 만큼 고생하긴 했지만 별다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되살아날 수 있었다.”
나는 오십여 년 전 혈육들이 몰살당하는 참사를 겪었던 열두 살 소년을 동정하며 그에게 두 번이나 주어진 천운에 감사했다. 그날 그가 운명을 고했더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터였다.
분위기 상 ‘기연에 축하드립니다.’라고 지껄일 수는 없었기에 나는 혀끝에서 말을 바꾸었다.
“다행입니다. 그러면 공청석유나 동자삼 등도 나중에 녹림의 흉적들을 쓸어버리는 과정에서 얻은 전리품이겠군요.”
“전리품이라……. 그리 말할 수도 있겠구나. 내 혈족의 유혼이 떠도는 산중에서 육 년 간 수련한 나는 절정의 무위에 올랐다고 확신한 후 청량산을 나갔다. 그리고 그 참극의 날 결심했던 바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다 팔 년에 걸친 녹림과의 전쟁에서 네 말마따나 세 가지 전리품을 획득했다.”
나는 짓궂게 물었다.
“혹시 산적 두목들의 처소를 일부러 뒤지시지는 않았는지요? 만년금구의 내단 같은 보물이 없을까 하고.”
묵살했으면 좋았으련만 무왕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솔직히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했고. 부끄러운 짓이라고 스스로를 꾸짖어도 자제하기 어렵더구나. 산적들이 약탈했음에 분명한 보물들의 원주인을 찾아 돌려주지 않고 임의로 취했던 처사를 오래도록 자책하다 무림에 이름을 알린 후 뒤늦게 보상을 하려했다. 하지만 팔령채의 녹림에게서 빼앗았던 만년하수오 말고는 출처를 알아내지 못했다.”
고지식한 양반 같으니. 뭘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산적들을 염왕전에 처넣음으로써 영약을 강탈당하고 아마도 목숨까지 잃었을 이들에게 충분한 보답을 한 셈이거늘.
답답한 구석도 없지는 않았으나 어쨌거나 강호의 으뜸가는 수수께끼라 불리는 무왕의 탄생배경을 알게 되어 속이 후련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방문은 크나큰 이득을 남겼다. 물론 최고의 성과는 무왕의 명교 행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다음 일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