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21
제120화 일어서!
삼대호법에게 독곡 행을 알리러 갔을 때 젊은 교위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소면통달에게 첩지를 건넸다. 붉은색인 걸 보아 급전인 듯했다.
나에게 양해를 구한 소면통달이 첩지를 폈다. 그러고는 나를 보았다.
“전왕이 기다리는 자가 제삼서관(第三西關)에 나타나 입교를 청했다는구려. 비영이 그의 뒤를 따르는 모양이오.”
“여기서 얼마나 멉니까?”
“팔백 리가량 되오.”
그렇다면 경신을 전개할 시 독의는 늦어도 세 시진 이내에 명교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그를 보고 떠나기로 했다.
삼대호법과 헤어져 구세원으로 돌아간 나는 친인들에게 곧 독의가 올 것임을 알렸다. 괴선은 들뜬 심사를 여과 없이 드러냈고 진소월은 약간 긴장한 기색이었다. 수백 권의 의서를 독파하고 내용을 모조리 암기해 어지간한 의원보다 의학에 대해 밝은 그녀는 수명 연장의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독의는 두 시진 남짓 만에 왔다. 그 동안 무얼 하느라 꾸물댔는지는 모르지만 명교의 영토에 들어선 이후로는 쉼 없이 달려왔다는 뜻이었다. 등에 커다란 궤를 지고 있었다.
두껍고 시커먼 장포를 걸친 복면인이 독의와 동행했다. 그와 더불어 중원육기에 속하는 비영일 터였다. 비영은 구세원에 들지 않고 그곳에서 삼십여 장 떨어진 칠팔 장 높이의 첨탑 꼭대기에 독수리인 양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를 잡아 독강시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자중했다. 전날 정맹에서 그가 명교에 오더라도 방관하기로 독의와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독의는 ‘병 주고 약 주는 고약한 인간아, 잘 왔다.’라는 괴선의 환영인사를 귓등으로 흘리고 진소월에게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경국지색의 미녀를 대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는 그의 반응에 나는 그가 목석이거나 고자거나 남색이리라 확신했다.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독의는 구세원의 설비와 약재들은 꼼꼼히 살피고 다녔다. 처음엔 같이 움직였지만 그가 약초와 약물들을 일일이 점검하며 너무 시간을 잡아먹는 통에 나는 진소월에게 그를 맡기고 다실에서 기다렸다. 독의는 무려 두 시진 반에 걸쳐 일층과 지하의 석실들을 샅샅이 훑은 후 돌아왔다.
대만족을 표하면서도 추가적으로 필요한 약재들이 있다며 독의가 생전 처음 듣는 단어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우산초 여섯 근, 홍고과 열네 알, 연자모 일곱 포, 춘란 세 줄기, 백양산 특산의 삼지구엽 최대한 많이, 용담 여섯 개…….”
진소월이 독의가 읊어대는 약재들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기실 듣는 족족 외울 수 있기에 불필요한 행동이었으나 굳이 독의에게 그녀의 기이한 능력을 알려줄 까닭이 없었기에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지껄여대던 독의는 ‘전부 최상품으로 구할 것’이라는 토를 달고서 지시를 마쳤다.
한시라도 빨리 내 몸을 연구하고 싶은 듯 독의는 제의실에 틀어박혀 한 시진쯤 약을 제조한 후 바로 치료를 개시했다. 나는 출발을 늦추고 그의 처치를 지켜보았다.
독의는 괴선부터 시작했다. 독의가 건넨 약물을 들이켠 괴선은 너무 써 혀가 썩어버리겠다고 투덜거렸다. 독의는 들은 척도 않고 괴선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그의 전신 요혈에 대침들을 마구 꽂아댔다. 괴선이 아프다며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엄살 같지만은 않았기에 나는 혈도를 점하고 침을 놓는 게 어떠냐고 참견했다. 독의는 전에 없이 냉엄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의술 행위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경고 뒤에 협박을 잇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가 수틀리면 치료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제 멋대로 굴 것임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목을 틀어쥐고 목숨을 위협한다고 겁을 먹을 위인이 아니었기에 나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더러웠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괴선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놓은 독의가 그를 내버려두고 진소월이 대기하고 있는 지하석실로 내려갔다. 나는 망설였다. 그가 진소월에게도 괴선과 같은 시술을 하면 난처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진소월의 알몸을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거니와 무엇보다 그녀의 동의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일단 독의를 쫓았다. 만약 치료를 위해 진소월이 탈의해야 한다면 더더욱 그녀 곁을 지켜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독의는 진소월의 몸엔 손도 대지 않고 장황한 설명만 늘어놓았다. 너무 복잡한 내용인지라 반의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그녀의 체질을 파악하는 데만 최소 사나흘은 걸린다는 얘기였다. 독의는 준비해간 색깔이 다른 약병 세 개를 꺼내 놓고 두 시진 마다 하나씩 복용하도록 진소월에게 일렀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상태를 열거한 후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종을 울려 자기를 부르라고 일렀다.
첫 번째 약물을 마신 진소월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지독하기에 인내심의 화신이라 할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까. 살짝 맛이라도 볼까 하다가 참았다. 석대에 반듯이 누운 진소월에게 눈짓으로 작별을 고한 나는 독의와 함께 석실을 나왔다.
나를 데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설비가 가득 찬 의실 한 곳에 들어간 독의가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대나무 한 마디 길이의 관을 꺼내고는 내 피를 뽑게 해달라는 그의 청을 거절했다.
“친인들의 치료에 가시적인 성과를 볼 때까지는 응할 수 없소. 그러니 내가 다녀올 동안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요.”
독의가 즉각 항의했다.
“이러긴가? 동시에 진행하기로 약속했잖은가?”
“당신 탓이오. 당신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요. 급히 갈 데가 있었는데 당신을 기다리다가 지체됐잖소. 내 귀중한 이틀을 허비하게 한 대가로 당신 요구는 갔다 와서 들어주겠소. 단, 괴선 어르신과 진 소저의 치료 경과가 내 마음에 들어야 하오.”
굵은 주름들을 가득 담고 있음에도 기가 막히게 잘 생긴 면상을 우그러뜨리며 독의가 불쾌감을 표명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네. 그건 그렇고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바람직한 질문이었다. 미리 작정을 해두었기에 나는 즉답했다.
“독곡에 다녀올 참이오.”
독의의 흰 눈썹이 위로 휘었다. 그가 미끼를 물자 나는 휙 낚아챘다.
“독왕 어르신을 모셔올 거요.”
독의가 흥분했다.
“정말인가?”
실제로 성공할 가능성은 삼 할에도 미치지 못할 터이지만 나는 태연히 긍정했다.
“그렇소.”
독의의 동공에 불꽃이 일었다.
“아아, 그 위대한 분을 친견하게 되다니, 꿈만 같구먼. 그분의 내부를 살펴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터인데.”
은근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기대감을 표출하는 독의에게 고소로 응수한 나는 이전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다면 어째서 독곡으로 찾아가지 않았소?”
독의가 풀 죽은 아이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네. 그분과 독곡의 독인들은 나를 중원의 아류로 간주하고는 불문곡직 참살하려 들었을 걸세. 오해는 말게나. 죽는 건 조금도 두렵지 않으나 필생의 연구들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가는 건 두려웠네.”
흠, 이 독종에게도 약점이 있었군.
독의가 대뜸 내 손을 잡았다. 징그럽도록 섬세한 느낌의 손이었다.
“그분께 나에 관해 잘 말해주게나. 만약 내가 그분을 검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그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네. 자네 연인과 괴선도 최선을 다해 치료해줌세. 부탁하네, 전왕.”
열흘 만에 마웅에서 전왕으로 호칭을 바꾼 독의의 태세변화에 실소한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 얘기는 해보겠소. 잘 하면 피 정도는 뽑아주실 수 있을지도 모르지.”
독의가 굽실거렸다.
“고맙네, 전왕. 꼭 부탁함세.”
이로써 나는 일시적이나마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 * *
다시 소면통달을 찾은 나는 그에게 독곡 행을 통보한 후 명교를 떠났다.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있었다. 당분간은 내 동선이 노출되면 곤란했기에 인적이 없는 경로를 택해야 했다.
독곡의 현재 터전인 ‘무치’는 명교에서 직선거리로만 칠천 리에 달했다. 곧장 날아간다면 내일의 해가 뜨기 전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이리저리 돌아가야 하니 이틀은 걸릴 터였다.
어쩌면 독곡에 이르렀을 때 독왕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가 광객과 함께 떠났거나 내 요청에 따라 잠적했다면 허탕을 치는 셈이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그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독왕은 독곡에 있을 터이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 둘 중 하나를 실행하도록 해야 했다. 그가 독곡에 머물면 적들을 억제하기 힘들 터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독왕의 소재가 불분명하다면 적들은 함부로 명교를 치지 못할 것이었다.
전날 사왕에게 약세를 보였다지만 독왕은 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중요인물이었다.
진종일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남하한 나는 해가 진 후 속도를 올렸다. 한 시진 만에 이전 다섯 시진동안 이동했던 만큼의 거리를 지운 나는 중원과 남방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대(大)밀림지대에 이르렀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수목의 바다 위를 비행하며 나는 고양산을 찾았다. 고양산은 삼십 년 전 독곡이 깃들었던 곳이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만났던 곳이기도 했다.
전날 점박이 노인에게서 상세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막막했다. 산이라고 부르지만 편의상 명칭을 그렇게 붙였을 뿐 낮은 둔덕에 불과한지라 다른 숲들과 분별이 되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보았다면 어떻게든 어머니가 십 년을 몸담았던 골짜기를 찾아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었기에 포기해야 했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다시 속력을 올렸다. 무치까지는 아직도 삼천리는 더 가야 했다.
여명이 새벽어둠을 몰아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백의 마을을 그대로 통과했던 나는 중원의 대도를 방불케 하는 시진에 이르러 속도를 줄이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이곳이 남방에서 무치 다음으로 큰 도시라는 ‘보이’일 터였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각이었기에 거리는 한산했다. 하지만 금세 소란이 일었다. 나를 발견한 몇몇 행인이 괴성을 질러댔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이 내게로 달려왔다. 한 명만 빼고 전부 이족이었다. 나는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들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은 낯선 이방인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무리를 이끌고 온 팔자수염의 중년인은 중원인으로 보였다. 그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어라 소리치자 학익진을 펼치고 나를 덮치려던 이족 무사들이 바로 이어진 노인의 말에 우뚝 멈춰 섰다.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노인이 날선 눈빛을 누그러뜨리더니 어눌한 중원어로 물었다.
“호시 소주이십니까요?”
나는 어떤 말투를 써야할지를 두고 고심했다. 그러다 이 땅에서 신과 동급의 위상을 지닌 독왕의 후계자로 행세하려면 팔자수염에게 하대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 사조를 뵈러 왔으니 어서 그분께 알리고 나를 그분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라.”
눈을 크게 치켜뜬 팔자수염이 허둥지둥 엎드렸다. 그가 뭐라고 외치자 이족 무사들도 일제히 오체투지 했다.
“보양전주 오차는 소주에 명을 받드옵니다.”
고개를 든 팔자수염이 옆을 보며 또 뭐라고 수군거렸다. 그러자 두 명의 이족이 벌떡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뒤로 달려갔다. 팔자수염이 다시 이마를 바닥에 박고는 더듬더듬 보고했다.
“마차를, 준비시킵니다. 곡주님은, 곧 알려주신다.”
얼마 후 북소리가 났다. 그리고 더 멀리서 동일한 박자의 고성이 울렸다. 그런 식으로 소식을 전달하는 모양이었다.
북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져갈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차가 달려왔다. 금으로 테를 두른 호화찬란한 마차였다. 말 네 필도 하나같이 준마였다. 마차에서 화려한 금의를 입은 뚱보 노인이 뛰어내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는 중원식으로 포권했다. 그러더니 유창한 중원어를 뱉어냈다.
“보이 총주(總主) 단구(檀具)가 소주를 뵙습니다. 제가 본곡까지 소주를 모시겠습니다.”
“일어서!”
뚱보 노인에게 기립을 명한 나는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무치까지 가는 길을 알지?”
“물론입니다, 소주, 눈 감고도, 흐억!”
말을 하다 말고 뚱보 노인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내가 그의 뚱뚱한 허리춤에 팔을 두르고는 공중으로 비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