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22
제121화 둘이 같이 떠나지 않았습니까?
점박이 노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보이에서 무치까지는 사백리 길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놓인 울창한 삼림으로 인해 우회가 불가피한 탓에 마차로 가면 족히 두 시진은 걸릴 터였다. 가속을 발하며 경신을 전개할 시엔 반 시진이면 도달할 수 있으니 굳이 마차를 이용할 까닭이 없었다.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을 듯싶었지만 뚱보 노인을 데려간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지형이 중원과 너무 달라 길을 잃고 헤맬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력시위를 위해서였다.
점박이 노인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뚱보 노인은 독곡 서열 팔위의 거물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반감을 가진 무리의 일인이었다.
전원이 중원 출신으로 이루어진 독곡의 수뇌부는 나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작년 말 중원에 다녀온 독왕이 심복들과 대신들을 불러놓고는 느닷없이 ‘팔호’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했다고 선언했을 때 조용한 소요가 일었다고 점박이 노인이 전했다. 감히 독왕의 결정에 반발하지는 못했지만 뒤에서는 다들 불만을 공유하며 독왕을 성토하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대신들이 한낱 실험체에 불과한 이족 계집의 자식을 주군으로 받들 수는 없다고 입을 모으는 중이라면서 점박이 노인은 독왕 사후에 그들이 내게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우려했다.
기실 이족의 핏줄 운운은 핑계였다. 그들이 나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진짜 이유는 내가 기득권 확장에 장해물이 될 거라 판단해서였다. 독왕이 죽으면 ‘나눠먹기’를 할 작정이었는데 내가 그의 권력을 이어받으면 그러지 못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원래 나는 독곡이 다스리는 광대한 영토와 수백만의 백성을 물려받을 욕심 따윈 참새 발톱만큼도 없었다. 독왕이 사망하면 독곡과의 연도 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점박이 노인에게서 독인들의 행태에 대해 여러 얘기를 듣고 난 후 생각을 바꿨다. 그들은 마인들 못지않은 악종들이었다. 그들이 마인들처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족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는 말에는 분기가 일었다.
그들의 주장대로 나는 절반은 이족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완전무결했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의 동족을 벌레 취급한다는 자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여 기꺼이 독왕의 후계자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독곡이 장악한 남방에 선정을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공사다망한 관계로 실질적인 통치는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이에게 위임할 계획이었다. 예컨대 나현이나 진청운 같은 이들에게. 진소월도 괜찮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 * *
“저기가 무치인가?”
혼비백산한 상태로 방향을 알려주고 있던 뚱보 노인이 내 질문에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 그, 그렇습니다, 소주.”
나는 녹색의 세계에 이질적인 색깔을 드리운 원형의 공간으로 비스듬히 하강했다. 가속을 거듭했기에 수십 리의 거리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남방 최고최대의 도시라는 무치에 접근함에 따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전날 독곡에 다녀온 광객에게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치는 중원 중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도의 복사판이었다. 건축물이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복색이며 완전히 판박이였다.
기실 남방 독인들의 중원에 대한 동경과 집착은 유명했다.
거대한 왕국을 이룬지 수백 년이나 지났음에도 독곡이라는 저급한 명칭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까닭도 그것이 중원 무림에 있을 때 그들이 지녔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한때나마 대륙의 공포로 군림했던 선조들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갈망하며 자신들이 여전히 중원 무림의 일원임을 표방하기 위해 독인들은 오늘날까지 스스로를 독곡 소속이라 일컬었다. 나는 이 나라의 절대자가 되면 그 덜 떨어진 이름부터 없애버릴 참이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꽤 많은 군중이 운집한 광장에 떨어져 내렸다.
공중에서 날아오는 나를 보았던 이들 몇몇이 내지른 소리 때문에 다들 내 도래를 알고 있었다. 대부분 내가 착지하기도 전에 땅에 엎드리거나 무릎들을 꿇었다. 그러나 세 명의 노인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서서 나를 맞았다. 점박이 노인이 말했던 삼대독군들일 터였다. 그들은 공히 팔십 대였고 초절정 극상의 고수들이었다.
쌍둥이인 양 외양들이 비슷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금은동의 소매로써 신분을 드러낸 덕분에 분간을 할 수 있었다. 독왕에 이어 독곡 서열 이 위인 금수독군(金袖毒君)이 내가 던지듯 내려놓은 뚱보 노인을 힐끗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소주. 보이에서 연락을 늦게 주는 바람에 소주를 환영할 채비가 덜 되었소. 양해 바라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뚱보 노인이 항변했다.
“그렇지 않소, 태상. 나는 소주께서 본도에 오시자마자 바로 알렸소.”
금수독군이 눈을 씰룩거렸다.
“무슨 헛소린가, 단 총주. 기별을 받은 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거늘.”
“정말이오, 태상. 방금 보지 않았소? 소주께서는 나를 안고서 하늘을 날아왔소. 나는 일각도 지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새 반 시진이나 지났소?”
말귀를 알아들은 군중이 웅성거렸다. 반면 금수독군을 비롯한 세 독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만면에 담은 채 침묵했다.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자 술렁임도 금세 잦아들었다.
내가 정적을 깼다.
“환영은 됐고, 어서 사조께 안내나 하시지.”
내 말투에 삼대독군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맞받으며 나는 눈을 부라렸다.
“어서. 이 몸은 한가한 사람이 아냐.”
먼저 분노를 추스르고 평정을 되찾은 은수독군이 나섰다.
“따라 오시오. 내가 곡주께 데려다 드리리다.”
내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은수독군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극상의 섬을 발해 그의 옆에 붙었다. 내 신법의 속도에 놀란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달려.”
“무슨 소리요?”
“귀가 먹었어? 달리라고. 전속력으로.”
내 독촉에 저항하려던 은수독군이 서슬 퍼런 내 눈빛을 보고는 굴복했다.
“알겠소.”
은수독군이 몸을 날렸다. 그의 속도에 맞춰 날아가며 말로써 그를 채찍질했다.
“빨리. 더 빨리.”
고개를 돌린 은수독군이 나를 쏘아보았다.
“뭘 봐? 느려졌잖아. 어서 안 달려?”
은수독군은 저항했다. 돌연 경신을 중단하더니 이를 갈며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사람을 붙여주겠소.”
이로써 나는 확신했다. 독곡의 대가리들이 한 달여 전 내가 칠사의 세 명을 일수에 날림으로써 천하를 뒤집어놓았음을 모르고 있음을. 여전히 일 년 전의 마웅으로 나를 평가하고 있음을.
* * *
미리 듣지 않았더라면 눈이 휘둥그레 떠졌을 터였다.
건물 전체가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겉에만 금을 바른 게 아니라 벽이 통째로 금이었다. 문자 그대로 황금 궁전이었다. 사치를 극도로 혐오하는 진소월이 보았으면 수만 민중의 고혈이라고 통탄했을 터였다.
나를 독왕의 처소까지 안내했던 이족 사내가 합장을 하며 허리를 구부렸다.
“주군께서는 저 안에 계십니다. 저는 들어갈 수 없으니 소주 혼자 입궁하셔야 합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경어에 사내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나는 황송해하는 그를 두고 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도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외관과 마찬가지로 천박한 느낌만 줄 따름이었다. 마치 돼지소굴을 보석으로 꾸며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인기척이 났지만 삼십 보를 나아가는 동안 나에게 다가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예기치 않았던 허술한 응대에 헛웃음이 나왔다.
기감을 끌어올려 직접 독왕을 찾으려던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기감에 앞서 후각이 그의 소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냄새의 인도에 따라 양편에 황금 기둥을 두른 너른 대전을 가로질러 뒤편의 복도로 갔다. 복도 끝에서 독왕의 체향이 흘러나왔다. 그리로 걸어간 나는 문 밖에서 방문을 알렸다.
“소손 전충입니다, 사조님.”
“오오, 어서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간 나는 내뱉던 날숨을 도로 들이켰다.
독왕은 그의 작디작은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초대형 침상에 누워있었다.
몸은 이불에 덮여있고 얼굴만 빼꼼 내민 상태였다. 그 얼굴이 문제였다. 보름 전 파양의 상림에서 헤어졌을 때보다 족히 십 년은 더 늙어보였다. 급작스러운 노화보다 심각한 건 그의 노안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였다.
황망한 사태에 당황한 나는 절을 하는 것도 잊고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독왕이 진물이 고인 눈을 찡그리며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 오너라. 설마 이렇게 일찍 찾아줄 줄은 몰랐느니라. 장(張)학사와 만난 게냐? 아니면 소 전주가 벌써 절곡에 이르렀더냐?”
장 학사는 광객을 뜻했다. 독왕은 광객의 자기소개에 따라 그를 학사라고 불렀다. 소 전주는 점박이 노인이었다. 독곡에서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기환전주(奇幻殿主)였다.
나는 독왕의 말이 이해난망이었다.
“둘이 같이 떠나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냐? 소 전주는 내가 이곳에 온 다음 날 보냈느니라. 너를 부르러. 경공이 시원치 않으니 아직 절곡에 당도하기엔 이를 듯싶었는데 용케도 시간을 앞당긴 모양이구나. 장 학사는 사나흘 전엔가 여기 왔더랬다. 나더러 같이 네가 있는 곳으로 가달라고 청하더라만 보다시피 내가 이 꼴이라 들어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너를 이리로 보내라고 일러두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독왕의 침상에 다가간 나는 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먼 길을 오가시느라 힘드셨나 봅니다. 어서 쾌차하셔야죠.”
독왕이 클클 웃었다.
“쾌차라……. 그래, 어서 일어나야지.”
오수처럼 탁했던 독왕의 눈빛에서 돌연 청광이 번득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좀 도와주겠느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언제 다 죽어가는 모습이었냐는 듯 독왕이 강렬한 안광을 분출했다. 그러고는 이가 다 빠져 오므라든 입술을 벌려 내가 예상한 말을 쏟아냈다.
“네 피를 다오. 그러면 나는 일어날 수 있을 게다.”
찰나지간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를 시험하려는 건가. 내 진정성을 확인해보려고? 아니면 정말로 사경에 처해서는 내 피를 기사회생의 영약으로 삼으려는 걸까. 그래서 점박이 노인을 부랴부랴 절곡으로 보낸 건가.
나는 눈을 감았다. 독왕이 사라지고 그의 기운만 남았다. 일순 섬뜩했다. 그에게선 여전히 감당불가의 내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눈을 떴다. 혼란스러웠다. 독왕의 이마에 드리운 그림자는 전장에서 나고 자란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설마 이것도 꾸며낼 수 있단 말인가.
어느 쪽도 가능할 듯싶었기에 정확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대답에 뜸을 들이는 나를 응시하며 독왕이 들창코를 벌름거렸다. 뭔지 모르지만 위험신호였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