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24
제123화 자격이 있는 자들만 데려갈 거야
금은독군의 독장들이 좌우에서 쇄도해올 때 나는 후방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다 그 방면에 일렁이는 불온한 기운을 감지하고는 방향을 바꿔 위로 치솟았다. 그 순간 본능이 경고신호를 보냈다. 이쪽도 위험해!
그렇다면 남은 곳은 전방뿐이었다. 허공에서 몸을 꺾었던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암기에 발목을 걸려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찰나지간의 지체는 나를 위급지경에 빠뜨렸다.
금수독군과 은수독군이 새로이 퍼부은 독장들이 곧장 나를 덮쳤다. 작심들을 하고 독장의 범위를 최대한으로 넓힌 데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바람에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상부가 유일한 퇴로였으나 나는 그곳에 동수독군의 무형독장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궁지에 몰렸으나 내겐 타개책이 있었다. 호신강기였다.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을 방어막에 쓴다면 독장들에 적중되어도 치명상은 모면할 것이었다. 중한 내-외상이 아니라면 운신에 지장이 없을뿐더러 금세 회복될 터였다. 독군들은 나를 원에서 이탈시킬 수도 없고 쓰러뜨리지도 못할 것이니 승리는 내 몫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방책을 택하지 않았다. 자존심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비약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실패하면 동체가 으깨질 터였으나 그렇기에 나는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고 위기에 대처했다.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극한의 집중력이 생기자 다시금 기적이 일어났다. 시간이 일시 정지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주 느릿느릿 지나갔다. 나는 마법이 풀리기 전에 미친 듯이 궁리했다. 어떻게 해야 이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일순 세 줄기의 빛이 심상에 어른거렸다. 이럴 수가. 해법이 세 개나 된단 말인가. 기쁘기보단 당황스러웠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있을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무작정 중앙의 빛에 몸을 맡겼다.
파파팡!
파공성이 귀청을 찢었다. 부지불식간에 빛줄기를 따라 나온 나는 독군들의 후속공격에 대비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세 독군 모두 출수를 중단하고 망연한 낯짝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동수독군은 귀신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 동체가 허공에 떠있음을 깨달은 나는 천천히 하강했다. 그러고는 동수독군을 겁박했다.
“어이, 너는 이 초 초과했어. 이번엔 봐 주지만 다음에 규칙을 어기면 대가리를 부숴버릴 거야.”
동수독군은 찍소리도 못했다. 나는 금은독군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일초 씩 남았어.”
은수독군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만하겠소.”
“누구 맘대로. 삼십 초를 주었으니 마저 채워들. 자꾸 여러 소리 하게 만들면 진짜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테다.”
내 으름장에 금수독군과 은수독군이 마지못해 쌍장을 들어올렸다.
“제대로 해들. 대충 하면 성의가 없는 걸로 간주해서 책임을 물을 테니까. 자, 어서 날려. 빨리 끝내자고.”
내 독촉에 두 독군이 동시에 독장을 퍼부었다. 그리고 관전하던 독인들이 경악성들을 토해냈다. 내가 그대로 서서 독장들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내가 두른 호신강기는 독장들을 막아냈지만 경력까지 튕겨내지는 못했다. 내부를 침습한 경력에 내상을 입은 나는 표정관리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야 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혈을 삼키고는 말을 뱉어냈다.
“이제 내 차롄가? 적당히 칠 테니 알아서들 막아 봐. 다치거나 뒈져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들. 아! 나는 딱 일 초만 쓸 거야. 너희를 때려잡는데 이 초씩이나 필요할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자, 그럼 준비들 해.”
내가 철봉과 옥소를 빼들자 세 독군이 사색이 되었다. 금수독군이 황급히 소리쳤다.
“소주의 무위는 충분히 견식했소. 가히…….”
“닥쳐!
내 호통에 금수독군의 안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그는 감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나는 입 밖으로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야. 그러니 두 말하게 만들지 마. 그리고 소주? 사조님 말씀 못 들었나? 나는 오늘부로 너희의 소주가 아니라 주군이야. 사조님 명을 거역하고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지금?”
“아니오, 소주, 아니, 주군. 절대로 그렇지…….”
“그만! 너희는 사조님께도 그런 말투를 썼나?”
“그, 그건…….”
“너희의 불경을 봐 주는 건 여기까지야. 이제부턴 내 면전에서 헛소리를 지껄이거나 개수작을 부리면 바로 황천길로 보낼 테니 그리들 알아.”
내 기세에 눌린 금수독군이 목을 움츠렸다.
숨죽인 독인들을 둘러보며 무기들을 들어올렸다.
“내 선물을 원치 않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놈들을 꺼냈으니 그냥 집어넣을 수는 없어. 무라도 썰어야지. 그럼 가 볼까.”
캉!
철봉과 옥소를 맞부딪쳐 굉음을 일으킨 나는 낙엽들을 보다가 얻었던 광우를 시현(示顯)했다. 기실 초현은 아니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 날 때마다 수련했기에 잘 될 거란 자신이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독인들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들 눈알들을 쏟아낼 듯했다. 광장 주위의 석주(石柱)들이 일순지간 돌가루로 화해 눈보라처럼 휘날렸기 때문이었다. 십이지신이 양각된 돌기둥은 모두 열두 개였고 하나같이 우람했다. 나와의 거리도 상당했기에 그것들을 일시에 파괴한 건 신위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내 솜씨지만 참으로 훌륭했다.
자화자찬한다고 비웃지 마시라들. 이런 걸 뽐내지 않으면 대체 무얼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얼이 빠진 독군들과 독인들을 휘둘러보고는 금수독군에게 물었다.
“중원에서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금수독군이 더듬거렸다.
“아, 아, 압니다, 주군. 마웅이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무력시위와 협박의 효과가 있었다. 그새 경어를 쓰지 않는가.
“쯧쯧, 그렇게 바깥소식이 어두워서야. 귀들 후비고 잘 들어. 그건 예전 별호야. 한 달 전부터는 전왕이라고들 부른다고.”
장내가 웅성거렸다.
“뭐, 그것도 마웅처럼 오래가지는 못할 거야. 왜 그런지 알아?”
내 눈길을 받은 동수독군이 우물쭈물했다.
“대답 안 해?”
은수독군이 동료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는 혀를 다쳐 말을 못합니다, 주군. 필설 문답은 가능합니다.”
그제야 동수독군이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이유를 알게 된 나는 ‘음흉한 부류’로 단정했던 그에 대한 평가를 보류했다.
“그래? 그럼 네가 대신 대답해 봐.”
은수독군은 짐작했던 대로 눈치가 빠른 자였다.
“주군께서는 장차 천하의 모든 왕들을 굴복시키시고 홀로 만인지상의 권좌에 오르실 테니, 무황으로 불리시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기특했다. 단박에 맞히다니.
“뭐, 무황이 될지 다른 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왕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면 그보다는 높은 이름을 얻지 않겠어? 장담컨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내 호언에 독인들이 열광했다. 벌써부터 나로 인해 누릴 영광을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금수독군에게 눈을 돌렸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불시에 질문을 받은 금수독군이 횡설수설했다.
“그게, 그러니까 무림평정에 나서실 주군을 받들어 저희 신하들이 분골쇄신의 각오로 견마지로를 다해 …….”
더 들어줄 수가 없어 금수독군의 말을 끊었다.
“됐어. 뭔 되도 않는 문자를.”
나는 의아했다. 대체 저 늙은이는 어떻게 서열 이 위가 되었을까. 무력도 다른 두 독군에 비해 쳐지고 지모는 형편없이 뒤떨어지는데. 독왕이 그를 총애한 걸까. 대체 뭣 때문에?
점박이 노인에 따르면 독군들은 예외 없이 잔혹하고 오만한 성정이지만 특히 금수독군의 횡포는 유명하다고 했다. 조금만 심기를 건드려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살하는 통에 모두들 그를 독왕보다 더 두려워한다며 점박이 노인은 자신의 지인들도 여럿 변을 당했다고 치를 떨었다. 금수독군이 단지 심심풀이로 수천의 이족을 학살한 적도 있다는 점박이 노인의 말에 나도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금수독군에 면박을 준 나는 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마무리를 지었다.
“머지않아 천하는 내 아래 하나가 될 거야. 그러면 너희도 중원으로 나갈 수 있어.”
독인들이 환호작약했다. 나는 그들이 분출하는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자격이 있는 자들만 데려갈 거야. 그 동안 너희는 여기서 자격을 입증해야 해. 중원에 명교라는 데가 있어. 나하고는 동맹이야. 거기서 어떤 정책을 펴는지 알아보고 그대로 따라해. 수시로 와서 점검할 거니까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땅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면 너희들 중 책임 있는 자들부터 굶겨죽일 테니까. 그리고 이제부터는 너희가 이족이라고 부르는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 마. 살인이 일어나면 철저히 기록에 남겨 둬. 나중에 검토해보고 타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친 놈들은 목을 비틀어버릴 테니까. 내 어머니가 이족 출신인 건 다들 알지? 이족이라고 무시하다간 어떻게 될 지도 알겠지?”
다들 똥 씹은 표정의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 * *
내 곡주 등극이 경사인지 참사인지 헷갈려하는 독인들에게 충성맹세를 받은 나는 지금부터 ‘사조님의 비공’을 전수받을 예정이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고는 독왕을 안고서 그의 거처로 돌아갔다.
좀 과장을 보태 열 명이 드러누워도 여백이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침상에 내려놓자 독왕이 감상을 밝혔다.
“내 후계자답다. 내가 잘 봤지. 네게는 타고난 제왕의 풍모가 있다, 아이야. 나처럼.”
우쭐했다가 마지막 말에 김이 빠졌다.
“그나저나 그 짧은 기간에 정말 많이 늘었더구나. 왜 턱도 없는 판을 벌이는 건지 내심 걱정했는데 기우였어. 클클, 그 녀석들 콧대를 그렇게 납작하게 만들다니, 통쾌하더구나. 역시 내 후계자야. 내가 잘 골랐어.”
쓴웃음이 났다. 저승으로 갈 날이 오늘내일하는 와중에도 자기 자랑인가.
한편으로는 내가 독왕과 동류인 듯싶어 찜찜했다. 나도 훗날 임종 시에 내 후인을 곁에 두고 저런 소리를 지껄일 것 같았다.
“여하간 잘 했다. 사실 네가 삼십 초를 운운했을 때는 말리고 싶었느니라. 뭘 하든 끝까지 지켜보기만 하라던 당부가 아니었으면 실제로 그랬을 게다.”
아까 독왕의 침소를 나가며 그에게 독군들과의 비무를 주선해달라고 요청한 데는 압도적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그들을 굴복시키려는 의도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곧 행해질 원력이전대법 이후를 염두에 둔 처사였다.
십사 년 전 어머니에게서 원력을 전이 받은 과정은 반나절이나 소요됐거니와 종결된 후에도 나는 한 동안 마비상태에 빠졌다. 독왕이 지닌 원력의 양은 어머니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클 터이기에 시간도 훨씬 길어질 게 뻔했다.
예방 조치를 취해두지 않으면 독군들은 무방비 상태에 처한 나를 해하려 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둔 것이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크게 겁을 먹은 대상에겐 섣불리 덤비지 못하는 법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책이었다. 나는 독왕이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게는 사체에서 원력을 취하는 비술이 없으니 그가 살아있을 때 진력을 물려받아야 했다.
독왕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는지 더 이상 잡설을 늘어놓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대법을 시행하자꾸나. 그 전에…….”
“그 전에…….”
그의 말을 자르며 똑같은 말을 꺼냈던 나는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사조님.”
내가 말을 끊었음에도 독왕은 역정을 내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 죽을 때가 되면 성격도 변하는 걸까.
“뭔데 그러느냐? 말해 보거라.”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