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26
제125화 배웅은 필요 없어
별안간 밭은기침을 내뱉은 독왕이 심하게 헐떡거렸다.
이러다 그대로 숨이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그가 급작스럽게 죽는 것보다 원력을 물려받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내 본심을 인지하고는 부끄러웠다. 경위야 어쨌건 나를 진심으로 대한 이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독왕이 간헐적으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안……돼. ……네게……원력을……원력을…….”
조마조마해진 마음을 꾸짖으며 나는 독왕의 손을 잡았다.
“아닙니다, 사조님.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부디…….”
반쯤 풀렸던 독왕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왔다. 안색이 갑자기 밝아지고 생기도 완연했다.
설마 이 노인네가 또 나를 시험한 건가. 혼자 순진한 감상에 빠졌던 게 창피해 분통이 터지려는 데 일순 오해임을 깨달았다.
회광반조.
독왕은 삶의 마지막 불꽃을 피어올린 것이었다.
“시간이 없구나. 바로 대법을 시행해야겠다. 준비해라.”
나는 엉겁결에 옥소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독왕이 내 손에 든 손을 빼내더니 내저었다.
“그건 필요 없다.”
어머니에게 원력을 전이 받았을 때와 다른 방법을 쓰려는 건가.
“입을 갖다 대거라.”
“네?”
“네 입술을 내 입에 갖다 대란 말이다. 남녀가 입을 맞추는 것처럼. 한 방울의 침도 새어나갈 틈이 없도록 완전히 붙여야 한다.”
“…….”
황당한 지시에 당황했다.
내가 미적거리자 독왕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나는 내단을 형성했다. 공기가 닿으면 곤란하니 입을 단단히 밀착시키고 받는 즉시 삼키거라. 네 안에 들어가면 알아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을 게다. 그러면 좀 전에 알려준 심공을 운용하거라. 어서, 어서!”
독왕의 재촉에 나는 침상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내 두꺼운 입술로 그의 오므라든 입술을 덮었다. 다소 민망하니 이 장면은 상상하지 마시라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말랑말랑하면서도 끈적끈적한 것이 내 입으로 들어왔다. 설마 가래는 아닐 테지.
물컹한 덩어리는 마치 길을 아는 것처럼 곧장 목구멍으로 돌진했다. 찰나지간 속에 들어가면 녹아버릴까 봐 저어했으나 기우였다. 녹는 건 덩어리가 아니라 내 속이었다. 마치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식도가 화끈거리더니 위장이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독왕에게서 입을 떼고 바닥에 좌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심공을 운용했다. 내 내부를 휘돌며 극렬한 작열통을 선사하던 불덩이가 아랫배에 똬리를 틀었다. 공교롭게도 마왕에게 파괴된 단전이 있던 자리였다.
나는 급한 불만 끄고 운공을 마칠 심산이었다. 여전히 천장의 무영과 바깥의 독군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시방편으로 처리하면 오래도록 고생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천장으로 올라가기 직전 무영이 보였던 눈빛을 상기한 나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까짓것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도박은 성공이었다.
눈을 뜬 나는 내가 아직 이승에 머물러있음을 알았다. 내 눈 앞에는 이승을 하직한 독왕과 그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충복’이라 했던 무영이 시립해있었다. 무영은 무방비 상태였던 나를 건드리지 않은 것이었다.
독왕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시체가 아니라 단잠에 빠진 노인 같았다. 그의 마지막이 표정처럼 평안했기를 빌며 무영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났나?”
무얼 묻는 건지 헷갈릴 법도 한데 무영은 내가 바라는 답을 주었다.
“소주께서 운공에 드신지 정확히 나흘하고 두 시진이 지났습니다.”
헉! 그렇게나 오래?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당황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전혀 느낌이 달랐다. 이건 마치 검왕의 압기에 눌렸을 때와 비슷했다.
일어서려고 용을 쓰는 나를 바라보던 무영이 내게로 왔다.
“부축해 드릴까요, 소주?”
“……그래.”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무영이 내 팔을 자기 어깨에 걸고는 일으켰다. 하지만 신장 차이가 상당해서 그가 다리를 쭉 펴고도 나는 무릎을 구부린 상태였다. 그가 내 허벅지 뒤에 다른 팔을 넣더니 나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침상으로 가서 독왕의 발치에 앉혔다.
나는 다시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독왕의 머리맡으로 돌아갔던 무영이 나를 돕기 위해 다가왔다.
“됐어. 혼자 하게 내버려 둬.”
무영이 물러섰다.
간신히 기립한 나는 뻑뻑한 고개를 돌려 무영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급한 문제부터 꺼냈다.
“독군들은 어때?”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무영은 이번에도 함의를 간파했다.
“심상치 않습니다, 소주.”
“자세히 말해봐.”
“그들에겐 수십 장 떨어진 곳에서도 주군의 체향을 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군께서 승하하신 걸 안다는 뜻입니다. 나흘이 지나도록 소주가 이곳에 틀어박혀 있는 까닭을 궁금해 하는 모양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은수독군이 서관 입구를 서성거렸습니다. 제가 소주의 명을 들먹이며 돌려보내긴 했습니다만 위험수위입니다. 이곳을 지켜야 했기에 그들의 동향을 염탐하러 나갈 수는 없었으나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벌써 약발이 떨어졌단 말인가. 좀 더 거칠게 다룰 걸 그랬나. 독군들 중 한 명의 목을 시범 삼아 꺾어버렸어야 했나. 아니면 아예 그들 전부를 처치했어야 했나.
“그 늙은이들은 나에게 겁을 먹었을 텐데 감히 명을 거역하고 제 멋대로 여기 들어오려고 할까?”
“그래서 나흘이나 자중한 겁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 왔을 테지요.”
“둘러가지 마. 그자들이 뭘 믿고 설치는 거지?”
“…….”
“대답 안 해?”
“그들은 주군의 원력을 물려받은 소주께서 역가(逆價)를 치르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을 겁니다.”
“역가가 뭐야?”
“일종의 주화입마입니다. 무인들의 내공 이전이 그러하듯 독인들에게도 원력 이전은 금기 중의 금기입니다. 백이면 백 실패로 끝나거니와 그 대가는 폐인이 되는 것이거나 죽음이니까요. 성공하는 경우는 만에 하나 꼴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요. 제가 알기로 그걸 해내신 분은 독문 역사상 주군이 유일하십니다. 주군마저도 매번 신중에 신중을 기하셨습니다. 아무리 신독지체라도 언제까지나 운이 따르지는 않을 거라 하시면서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내가 역가라는 것을 당했단 말인가.
급히 내기를 일주천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피가 쇳물처럼 뜨겁고 무거웠지만 그 밖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나는 독왕의 내단과 원력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일 거라 자위했다.
나는 무영에게 걸어갔다. 고작 삼보에 불과했지만 삼천리를 전속력으로 주파한 것처럼 힘들었다. 어쨌거나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무영의 면전에 이르러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만약 그 늙은이들이 들어오면 막을 수 있나?”
“저는 독군들의 일초지적에 불과합니다.”
“겸손 떨지 말고.”
“정말입니다, 소주. 저는 살수의 공부를 익혔습니다. 잠입이나 은신 따위엔 능하지만 전투력은 보잘것없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기에 실망도 작았다.
“그러면 나를 몰래 빼낼 수는 있어?”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은 독군들이 이곳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을 게 빤하니 어려울 듯싶습니다. 십중팔구 걸릴 것입니다.”
이번엔 적잖이 실망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운명의 신이 내편에 서기를 바라며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었다.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전략 자체는 분명했다. 선공을 취할 것.
나는 무영이 위험수위라는 표현을 쓴 데 주목했다. 그를 많이 겪지는 않았으나 보통내기가 아님은 명명백백했다. 그가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실제로 그러할 터였다. 독군들은 틀림없이 독왕의 처소로 올 것이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어쩌면 이미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그들이 작심하고 나섰을 때는 이미 늦을 터였다. 저들도 목숨을 걸고 결행하는 것이니 어떤 임기응변도 통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전면전이 불가피한데 지금의 내 상태로 셋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들이 오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문제는 그 대응도 안전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속하게 결단을 내린 나는 내기를 다시 일주천해 본 후 무영에게 물었다.
“이 궁전에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요처가 있나?”
무영은 질문의 요지를 알아들었다.
“독군들이 접근해 오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인지요?”
“그래. 지켜보고 있다가 만약 그들 셋이 여기로 몰려오는 기색이거든 먼저 나가서 내 명이라고 하고 금수독군만 데리고 들어와.”
“그러고는 어쩌시려는지요?”
“설명할 시간 없어. 서둘러.”
“존명.”
무영은 문을 두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기도 전에 나는 이모의 치유력을 극대화하는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금수독군이 오기 전에 운신이 가능해지기를 갈망하며.
그러나 상황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반각도 지나지 않아 금수독군의 입실을 알리는 무영의 보고가 들어왔다.
“제일독군을 불러왔습니다, 주군.”
소주에서 주군으로 호칭이 바뀐 건 금수독군을 의식한 처사일 터였다. 무영에 이어 금수독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나는 겨우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와서는 기호지세였다.
“들어와.”
금수독군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와 독왕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가 놀란 척을 했다.
“선주(先主)께선…….”
나는 금수독군의 말을 끊었다.
“보면 몰라? 돌아가셨어. 며칠 전에. 오늘에서야 슬픔을 가누고 당신의 유언을 집행하고자 하니 잘 들어. 사조님은 허황된 장례식 따윈 다 생략하고 나와 지내던 비처에 묻어달라고 하셨어. 가서 사조님을 모실 금관과 황금마차를 준비해. 틀이며 바퀴며 모두 황금이어야 해. 알아들었어?”
금수독군이 우물쭈물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그를 택한 건 독군들 중 가장 어리바리한 위인이기 때문이었다. 은수독군이나 동수독군이었다면 대번에 이상을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알겠습니다. 신속히 대령하겠습니다.”
금수독군이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나는 이로써 최소한 반 시진은 벌었다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금수독군은 일다경 만에 돌아왔다.
“관과 마차를 동관 앞에 대기시켰습니다, 주군.”
이런 빌어먹을.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나는 독왕의 시체를 받쳐 들고 문으로 갔다. 짧은 시간 동안 분투한 결과 어찌어찌 걸을 수는 있었으나 아직도 동작이 부자연스러웠다.
금수독군을 따라 궁전을 나가니 현관 양편에 은수독군과 동수독군이 서있었다. 전면으로는 황금일색의 마차가 보였다. 관은 마차 안에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아, 제길. 다시 욕설이 나왔다. 훨씬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 걸.
“배웅은 필요 없어.”
독군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한 나는 천천히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두 독군을 지나치면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태연을 가장한 채 계속 나아갔다. 마차와의 거리는 삼사 장에 불과했지만 까마득히 멀어보였다.
돌아보지 않아도 내 뒤통수에 꽂히는 세 쌍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와 독군들의 미묘한 신경전은 마차에 이르도록 지속되었다. 나는 나흘 전 내가 그들에게 심어준 공포가 효력을 발휘하길 빌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대로 나를 보내주기를 바랐다.
이윽고 마차 앞에 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잘 있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전날 내준 과제들 열심히 수행하고. 제대로들 해야 할 거야. 나중에 성과에 따라 상벌을 내릴 테니까.”
작별 인사를 마친 나는 독왕을 안은 채 마차 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섬뜩한 암기(暗氣)가 내 머리통을 노리고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