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27
제126화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암기(暗氣)를 쏘아낸 이는 동수독군이었다.
이는 응수타진 수준이 아니었다. 일수에 나를 끝장내려는 의지를 담은 무형독장이었다. 은밀함을 중시한 탓에 강도는 약화되었으나 두부(頭部)를 겨냥한 것이 그 증거였다.
만약 내가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머리통이 박살났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 시점에서 무형독장을 날릴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독왕을 받쳐 든 채 마차 문에 손을 뻗는 순간 암습에 대한 대처나 즉각적인 반격이 용이치 않은 자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내가 동수독군으로 하여금 그때 손을 쓰도록 유도한 측면이 컸다. 문제는 그가 어디를 노릴지를 정확히 예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틀리면 그대로 황천 행이었다.
나는 동수독군의 타격점이 뒤통수가 되리라 보았다.
그는 곁눈질로 보이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지만 아무리 무형독장이라도 곧장 옆머리를 직격할 성싶지는 않았다. 몇 단계 상위의 고수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는 건 심리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내 예상대로, 그리고 기대대로 암기를 우회시킨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 무형독장을 직선으로 쏘아낸다면 대책이 없었다. 속도를 감당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수읽기가 하나만 빗나가도 염왕과의 조우는 필연이었다. 현재의 나는 딱 한 번의 절(折)만 구사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절은 동수독군의 암기를 피하는 데 써야 했다.
설명이 길었지만 찰나의 판단과 선택, 그리고 결행에 의해 내 운명이 판가름 났다. 나는 적기에 고개를 모로 비틀어서 동수독군의 독장을 흘려냈다. 하마터면 왼쪽 귀가 뜯겨나갈 뻔했지만 다행히도 눈에 띄는 외상은 입지 않았다.
나는 역시 위기에 처할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초(超)천재였다. 아니, 하나로는 부족했다. 초(超)가 적어도 세 개는 붙여야 하지 않을까.
한 번의 공격을 피해냈다고 으스대는 내가 가소로운가.
세 독군의 합공에 의해 내 동체가 으깨지는 다음 장면을 상상하니 불안한가? 혹은 통쾌한가?
그랬다면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 것이니 반성하시라들.
나는 방어만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연히 그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반격수를 준비해 두었다. 다름 아닌 광환이었다.
금수독군에게 황금마차를 마련하도록 명한 후 독왕의 침소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운공하며 원력을 끌어올렸다. 그가 내 생각보다 열 배는 빨리 과제를 완수한 바람에 계획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으나 그의 보고가 들어오기 직전 가까스로 원력의 일부를 운용하는데 성공했다. 최대치의 일이 할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일회적인 사용만 가능할 듯싶었으나 내겐 마른 논의 단비나 진배없었다.
나는 옥소나 철봉이 아니라 검지로 광환을 발출할 작심이었다. 독군들의 허를 찌르기 위함이었다.
암습을 담당할 동수독군은 내가 무기를 빼들 겨를이 없기에 방심할 터였다. 그는 마차 문을 잡아가는 내 집게손가락 끝이 그를 향해 있음을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검지에 원력을 주입해 지공을 가하는 요령은 괴선에게 배웠다. 위력이 철봉이나 옥소에 원력을 실을 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탓에 실전에서는 한 번도 구사한 적이 없으나 지금의 승부처에서는 더 없이 요긴한 수법이 될 터였다.
내 구상은 적중했다. 동수독군이 암기를 발했음을 감지하자마자 나는 검지로 그에게 광환을 쏘았다. 그의 독장보다 늦게 출발했으나 내 빛줄기는 먼저 그의 안면에 이르렀다. 기특하게도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기에 동수독군은 이마가 쪼개지는 참사를 당했다.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는 즉사였다.
그를 대신해 금수독군이 비명성을 토해냈다. 은수독군도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혼비백산한 금수독군과 달리 그는 정신 줄을 놓지는 않았다. 그에게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할 여유를 주지 않고 나는 고삐를 틀어쥐었다.
“어찌하려나 보려고 했더니, 역시 반역자가 나왔군. 감히 나를 암습하려 들다니. 어이, 너희들 혹시 저 벙어리와 작당한 거 아냐? 벙어리가 간을 보고 통하는 기색이면 숟가락을 얹으려고 했나?”
원력이 필요 없는 살기를 마음껏 발산하며 을러대자 사색이 된 금수독군이 황급히 부인했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주군. 신은 결코 저 반도처럼 불충한 마음을…….”
씨도 먹히지 않을 개소리였다.
“됐어. 너는?”
금수독군의 말을 자른 나는 은수독군을 노려보았다. 마지막 고비였다.
은수독군은 내 허장성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강철 같은 내 눈빛을 받지 못하고 시선을 떨군 그가 양손을 허벅지에 짚은 채 상체를 구부렸다.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는 독인들 특유의 동작이었다.
“맹세코 신은 제삼독군이 주군을 암해하려 들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제가 앞서서 그를 제지하고 주군께 고해 합당한 처벌을 내렸을 것입니다. 신의 충정을 믿어주십시오, 주군.”
나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좀 미심쩍긴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일단 그렇다고 해 두지. 저 벙어리처럼 허튼 수작을 부리면 하시라도 대가리를 부숴줄 수 있으니까.”
어느새 은수독군과 같은 자세를 취한 금수독군이 부르짖었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주군. 제 충심은 저 하늘의 태양만큼이나…….”
나는 다시 금수독군의 말을 끊었다.
“아, 시끄러! 중원 무림을 평정하고 올 동안 시킨 일이나 잘 하고들 있어.”
“맡겨주십시오. 반드시 주군의 지엄하신 분부를 충실히 이행해…….”
“됐고, 너도 대답해 봐.”
금수독군은 입을 다물고 은수독군은 입을 열었다.
“신도 충심을 다해 주군께서 내리신 명을 완수하겠습니다. 명교의 인사들이 놀랄 정도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두고 보겠어.”
상황을 마무리 지은 나는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안에 들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궁전 지붕으로 눈길을 올렸다.
“이리 와.”
내 명에 무영은 지붕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경신을 펼치지 않고 달음박질로 내 앞에 이른 후 부복했다.
“마차 몰 줄 알아?”
무영의 낯빛이 밝아졌다. 질문의 의도를 알아들은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주군.”
“길은?”
무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보이까지는 가능합니다.”
궁색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동행에 대한 간절함이 배어있었다. 나는 무영을 거두기로 했다. 기실 처음부터 그럴 심산이었다. 향후의 일정에 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좋아. 올라가.”
따로 명하지 않았음에도 눈치 빠른 마부가 무영에게 자리를 내주고 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마차에 들어갔다. 내부도 황금일색이었다. 좌석 뒤편의 공간에 금관(金棺)이 있었지만 나는 독왕의 시신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가자.”
마부석에 오른 무영에게 출발을 명한 나는 기다란 날숨을 내보냈다. 위기를 무사히 넘긴 안도감의 발로가 아니었다. 위악적인 언행은 위선을 떠는 것만큼이나 피곤한 일이었다.
* * *
무치에서 보이까지는 직선거리로는 사백 리 남짓하지만 그 사이에 자리한 울창한 수림으로 인해 실제로는 그 두 배를 가야했다.
무영은 말을 부리는 데 서툴렀다. 그러나 워낙 말들 자체가 잘 훈련되어 있는데다 길도 탄탄대로인지라 불편함은 거의 느끼지 않았다. 무영에게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달리라고 이른 나는 운공에 전념했다.
단전에 자리 잡은 독왕의 내단은 이질감이 확연했다. 마치 갓난아이 주먹만 한 불덩이가 아랫배에 들어앉은 듯했다.
내단이라니, 새삼스레 신기했다. 영물들 중에서도 용이나 금구 같은 잘 난 놈들이나 품을 수 있다는 기물이 아닌가. 내 식견이 풍부한 건 아니지만 인간이 내단을 형성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독문 역사상 최고의 독존으로 자타가 공인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독왕은 확실히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내단에 얼마만큼의 원력이 깃들어있는지 궁금했다.
절반만 취해도 사왕의 공력을 훌쩍 능가할 거라는 독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양일 터였다. 만약 전부를 체화하게 된다면 나는 적어도 내력에 관한 한 미증유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셈이었다. 호사가들이 신의 경지라 일컫는 천년공력도 꿈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몰랐다.
흥분을 다스리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독왕의 내단은 무왕의 춤사위에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복운이었다. 그리고 내 심저에 깔려있던 불안을 해소해 준 명약이었다.
전날 독왕이 준 이모의 원력에 더해 골수에 내재된 어머니의 원력을 완전히 용해할 시 나는 내 내력이 사왕과 마왕이 현시했던 공력의 칠 할 어림이 되리라 예상했다. 내가 획득할 수 있는 원력의 최대치가 그들의 삼분지이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라면 설령 무학 방면에서 그들과 대등해지더라도 자웅을 결하기는 어려웠다. 상대적 우위를 노릴 수 있는 신법을 최대한 활용하더라도 내력의 열세를 상쇄하기엔 차이가 너무 컸다. 나는 이 난제를 생사를 결하는 실전에서의 탁월함으로써 해결할 작심이었다. 무모하지만 유일한 방책이었다.
이제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내단에 든 원력을 이삼 할만 내 것으로 만들어도 나는 내력 면에서 사마의 제왕들에게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약점이 강점으로 바뀌게 되는 셈이니 그 효력은 배가 될 터였다.
그러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멀게만 느껴졌던 복수의 날이 가까워졌는데. 사실상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과업을 이룰 수 있게 되었는데.
* * *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무치를 벗어날 때 중천에 떠있던 해가 서산에 저물도록 독왕이 전한 심공을 운용했지만 성과는 거의 전무했다. 첫술에 배를 불릴 심산이었느냐고? 전혀 그렇지 않으니 좀 더 들어보시라.
일단 내단이 반응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내보낸 원력의 양은 조족지혈이었다. 아니, ‘새 발의 피’보다는 ‘먼지 한 톨’이 더 어울릴 터였다. 그에 반해 원력 추출의 대가로 치른 육신의 고통은 지나치게 컸다. 극통에는 이력이 난 몸임에도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나는 비로소 최하 이십 년 운운하던 독왕의 말이 허언이나 과언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 제길.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내단이 아량을 베풀 리 만무했기에 나는 감정을 추슬렀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봇물을 터뜨릴 비책을 찾아야 했다. 수십 년에 걸쳐 찔끔찔끔 짜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 * *
무영의 음성이 들렸다.
“일각쯤 후면 보이에 당도할 듯싶습니다, 소주.”
헛웃음이 났다. 듣는 귀들이 없다고 다시 소주로 돌아오다니.
하지만 나는 무영의 호칭에 시비를 걸지 않고 명을 내렸다.
“보이에서 길을 잘 아는 이를 태워라. 대(大)밀림지대까지는 마차를 이용할 참이니.”
“존명.”
독곡의 영토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보이에 들어서기 전부터 떠들썩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북소리 교신을 통해 내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도시 진입로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나와 있었다. 닷새 전 길잡이 삼아 무치에 데려갔던 뚱보노인이 그새 제 본거지로 귀환했던지 유독 눈에 띄었다.
황금마차를 본 수만 군중이 일제히 엎드렸다. 소수의 수뇌부 독인들은 부복으로써 예를 표했다. 서 있는 자는 오로지 뚱보노인 뿐이었다. 뚱보노인도 마차가 지근거리에 들자 손바닥을 다리에 붙이며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 보이의 신민을 대표해 총주 단구가 인사 올립니다.”
내가 뚱보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침묵하자 무영이 입을 열었다.
“중원과의 경계선까지 길을 안내할 자를 내주십시오, 총주님. 이는 주군의 명이십니다.”
뚱보노인이 난색을 표했다.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먼 길이니 여기서 하루 묵으시고 내일 떠나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부디 소신들에게 주군을 모실 영광을…….”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내 말에 기겁을 한 뚱보노인이 잽싸게 개구리 자세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소신, 당장 존명을 이행하겠습니다.”
별안간 정적이 깔렸다. 뚱보노인이 전음으로 지시를 내린 탓이었다. 평상시라면 전음의 내용을 엿들을 수 있었을 터이나 지금은 전혀 잡아낼 수 없었다. 뚱보노인의 말마따나 가야 할 길이 멀고도 멀었기에 심사가 편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