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32
제131화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전자보다는 후자가 나았다.
몸이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면 설령 명줄을 보존한다고 해도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보아야 했다. 반면 형체가 짓이겨지더라도 숨통만 붙어있으면 이모의 치유력으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터였다.
숨통만 붙어있으면!
문제는 이 간단한 전제를 실현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었다. 장왕의 연속으로 발한 장공은 이전의 막무가내 식 공격과는 궤를 달리했다. 위력도 느닷없이 증강되었을 뿐만 아니라 속도와 정치함 면에서도 월등했다. 흡사 나처럼 결전 도중 각성해 새로운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장왕의 파상공세를 삼십 초 이상 별 위기 없이 버텨내며 일순지간 방심한 탓도 있지만 설혹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대처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렇더라도 벽에 처박히지만 않았다면 외통수에 몰리지는 않았을 것을, 지금에 와서는 대책이 없었다.
물론 퇴로가 없다고 살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장왕의 일차 장공에 휩쓸려 날아가는 동안 나는 두 손을 맞잡고 머리 위로 쭉 뻗었다. 그러고는 몸을 회전해 그쪽을 전면으로 했다. 내가 원하는 자세를 만들자마자 내 동체가 벽을 파고들었다.
석벽이 아니라 토벽인 점은 내게 천운이었다. 벽이 돌이었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아무튼 내 몸은 못처럼 흙벽에 꽂혔다. 상체가 채 들어가기 전에 장왕의 이차 장공이 쇄도해오고 있음을 인지한 나는 머릿속에 하얘졌다. 장공에 적중되는 순간 이미 너덜너덜해진 하반신은 곤죽이 될 것이었다. 그리 되면 이모의 치유력으로도 원상복구가 될는지 의문이었다.
기실 다리가 완전히 뭉개지는 걸 넘어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장공에 실린 경력이 고작 다리를 망가뜨리는 걸로 만족하겠는가. 필히 내 몸통마저 으깨려 들 것이었다. 장왕의 장공엔 그러고도 남을 파괴력이 깃들어있었다.
기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신기한 경험이었다.
흙속에 파묻혔기에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어야 했음에도 사방이 훤히 보였다. 놀란 눈알을 돌출시키며 구덩이로 뛰어내리는 소면통달, 비장의 수를 터뜨리고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장왕, 그리고 토벽에 반쯤 박힌 내 모습까지.
유감스럽게도 광경은 정지해있지는 않았다. 장왕의 쌍장에서 발출된 무형의 강기가 아직 토벽에 들어오지 않은 내 다리를 삼킬 듯 가까이 밀려와있었다. 일견 무해한 안개 같았으나 닿는 순간 내 다리와 몸을 짓이길 벽력이 될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는 당연히 기사회생의 신법이 떠올라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내 뇌리에 스친 빛은 반격의 일수였다.
이런, 제길.
제아무리 경천동지할 신공절학이라도 염왕전 행을 막아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었다. 장왕을 저승길의 동반자로 삼는다고 내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내 욕설을 들었는지 또 다른 서광이 비쳤다. 이번엔 몸놀림에 관한 빛줄기였다. 그러나 그 빛의 인도에 따라 몸을 놀리기엔 너무 늦었다.
빌어먹을.
시간이 풀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먹물 속 같은 어둠에 갇히고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포위된 나는 절명했음을 직감했다. 이곳은 저승임에 틀림없었다.
욕지기가 치밀기보다는 허탈했다. 이렇게 끝나다니.
후회가 없기……는 개뿔! 이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던 안전한 길들을 마다하고 결국 이 꼴이 되도록 나 자신을 몰아세운 내가 원망스러웠다.
왜 그랬나, 전충?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렸어, 응? 좀 둘러가도 됐잖아? 넉넉잡고 이십 년만 자중했으면 천상천하제일무호(天上天下第一武豪)가 되었을 거잖아? 사상 초유의 무황은 따 놓은 당상이고 고금제일인을 넘어 영세제일인도 네 몫이었을 텐데.
이십 년이 지났다고 마왕이 뒈졌을 리도 없으니 한 노야와 이모의 복수도 이룰 수 있었어.
사마를 멸하고 정파를 무릎 꿇려 대륙을 일통하는 건 아이들 소꿉장난일 터였어.
검황자 정도가 아주 약간 신경 쓰이긴 하지만 십왕들 대부분이 쇠락했을 이십 년 후에 누가 있어 너를 막을 수 있겠어? 온 무림이 덤빈대도 네 상대가 안 됐을 것을.
꿈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한들 뭔 소용이야. 죽으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걸.
네가 망쳤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전충. 이 철딱서니 없는 개자식아.
닥쳐!
나는 내게 욕을 하는 나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극통이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희열감에 휩싸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통은 살아있음의 명백한 증거거늘.
근맥들이 으깨지고 내장이 터지고 척추가 바스러졌지만, 나는 숨이 붙어있었다. 절반은 운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임기응변 덕분이었다.
장왕의 장공이 하체에 닿을 찰나 나는 앞으로 뻗었던 팔을 아래로 긁으며 다리를 오므렸다. 몸을 웅크리면서 필사적으로 토벽에 박히는 각도를 살짝 튼 탓에 나는 창두처럼 뾰족한 강기에 직격되는 참사를 모면했다. 진흙처럼 부드러운 토벽이 나를 빨아들이며 장공의 상당부분을 흡수해 준 것도 천운이었다. 단단한 흙이었다면 뒤로 밀리지 않아 충격이 내 몸에 고스란히 전해졌을 터이고 그랬다면 즉사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내가 아직 이승에 머물러있음을 깨달은 장왕이 열을 받아 가일수를 하면 그때는 정말로 뒤가 없었다.
* * *
다행히 소면통달이 제 역할을 해주었다.
장왕을 만류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당황했다. 골수에서 나온 원력을 혈류에 넣으며 이모의 치유력을 극대화하려는 데 내단이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독왕의 심공으로 내단을 제어하려던 나는 생각을 바꿔 그 기물이 내 원력을 취하도록 방치했다. 이미 방향을 정했으니 우직하게 밀고 나가야 했다. 일관성을 상실하면 내단을 영영 길들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회복이 더딘 건 감내해야 했다. 내단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
내단에게 원력을 바치고 있는데 물속에서 들리는 듯 막막했던 소면통달의 음성이 조금씩 뚜렷해졌다.
“괜찮소, 전왕?”
그럴 리가 없잖소, 노인네?
속으로 반문한 나는 소면통달이 억지로 나를 끌어낼까 봐 조바심이 났다. 자칫 잘못하면 간신히 달려있는 좌족이 뜯겨나갈지도 몰랐다. 이모의 치유력이 아무리 경이롭다 한들 절단된 사지를 도로 붙이지는 못할 터였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혹시…….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호기심을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게 가능할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고맙게도 토벽 깊숙이 박힌 나에게 다가온 소면통달은 내 몸에 손을 대지 않고 주위의 흙들만 거둬냈다. 그러고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괜찮소, 전왕?”
입을 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나 나는 안간힘을 써서 혀를 놀렸다.
“잠시 이대로 두십시오.”
그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실제로는 발음이 뭉개져 웅얼거림으로 들렸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소면통달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교주를 백운당에 모셔다주고 오겠소.”
그러지지요. 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소면통달은 바로 구덩이를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좀, 많이 놀랐소. 교주는…….”
말끝을 흐린 소면통달이 뒷내용을 얼버무렸다.
“아니오. 그럼 다녀오겠소.”
소면통달과 장왕이 몸을 날리는 기척이 났다. 소면통달이 하다만 얘기가 궁금했지만 애써 관심을 끊고 치유에 전념했다.
소면통달은 일각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어느 정도 회복된 나는 그에게 광객을 불러주기를 청했다. 사람을 부리지 않고 소면통달이 직접 구세원으로 가서 광객을 데려왔다.
내가 광객에게 운공에 든 동안 호위해 줄 것을 부탁하자 소면통달은 다음에 보자며 작별을 고했다. 나는 광객의 도움으로 좌정했다. 몸을 일으키면서 보니 구덩이에서 내가 앉은 곳까지 무려 일 장 반 길이의 동굴이 뚫려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석벽이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무상심공을 운용하자 골수에서 원력이 샘솟았다. 나는 원력을 아낌없이 내단에게 주었다. 내심 내단도 내 성의에 보답하길 바라면서. 내단은 내 바람을 묵살했다. 최소한의 상도의도 모르는 놈 같으니.
부아가 치밀었지만 나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원력을 내단에 밀어 넣었다. 내단은 조금도 고사하지 않고 냉큼 받아먹었다.
두려웠다. 이러다 내단 좋은 일만 시키고 껍데기만 남는 게 아닐까. 내가 잘못 판단한 게 아닐까. 이제라도 남은 걸 지켜야 하나.
나는 내 속의 나약한 속삭임을 억눌렀다. 기호지세였다. 이왕 올라탔으면 좌고우면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야 했다.
중상으로 인해 골수가 내보내는 원력의 양이 평소 운공 때보다 배는 많았다. 나는 원력을 줄기차게 내단에 쳐 넣었다. 내단은 한줌도 마다하지 않고 주는 족족 다 챙겼다. 대단한 욕심쟁이였다.
오기가 생겼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빈털터리가 되는 한이 있어도 네놈이 배가 터지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
한낱 이물과 감정싸움을 한다고 한심하게 보지 마시라들. 흥을 돋우기 위해 추임새를 넣었을 뿐 나는 지극히 냉철하고 과감하게 스스로 정한 해법에 내 운명을 걸고 있었다. 늘 그렇듯 ‘모 아니면 도’ 식의 도박이 전자의 결과를 가져다주길 갈망하면서.
무조건 전진하기로 결심하고 흔들림 없이 실천에 옮겼으나 불안감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적지 않은 원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내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암담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들이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껏해야 밤톨보다 약간 더 큰 내단이 어떻게 그 많은 원력을 품을 수 있는지 기가 막혔다.
이중고였다.
치유에 투여해야 할 원력이 죄다 내단으로 빠지는 통에 내 몸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약을 달라는 육신의 아우성을 무시하고 고집을 부렸다. 여기까지 와서 철수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리라……라고 근사한 헛소리를 늘어놓고 싶지만 실은 달리 방법이 없어서였다.
이윽고 골수의 원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밑천이 달리면 도박을 계속할 수 없는 법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항복 선언을 하려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내단이 한 움큼의 원력을 뱉어낸 것이었다. 뱉어냈다고 했는데, 정말로 과식으로 배탈이 난 그놈이 소화가 안 된 원력을 토해낸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승리의 찬가를 부르기엔 일렀다. 내단이 내놓은 원력은 제 놈이 처먹은 양의 백분지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이게 어딘가. 이전에 독왕의 심공으로 추출했던 원력에 비하면 수백 배에 달했다. 개미 오줌이 고양이 오줌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얼른 원력을 일주천한 후 다시 내단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과연 내 심상에서 어떤 감탄사가 나올 것인가.
맙소사? 아니면, 옳거니?
제발 후자이기를.
성공이었다.
이변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철이 들었는지 내단은 받은 만큼 내주었다. 아니, 약간이라도 더 많은 것 같았다. 면밀히 살펴볼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서둘러 내단에서 나온 원력을 혈류에 실어 내부에서 한 바퀴 돌린 다음 도로 내단에 보냈다.
흡사 심장에서 헌 피를 받고 새 피를 내보내듯 원력이 내단을 중심으로 순환했다. 체내를 휘도는 원력의 양은 차츰 증가되었다. 이는 원력이 내 몸을 자신의 확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방증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만 되면 나는 십왕 급의 무존들이 지닌 공력의 두 배 이상 되는 원력을 획득하게 될 터였다. 흥분으로 심장이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다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이 참에 내단의 원력이 완전히 체화되기를. 그래서 임박한 적들의 침공을 통쾌하게 응징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