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33
제132화 아, 실은 그게 아니고
뜻대로만 된다면 인생이 얼마나 편하겠는가.
혹은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지루함과 지겨움을 견디지 못하는 내 성정을 고려했는지 신은 내 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또 다른 과제를 안겼다.
내단이 내보내는 원력이 기존의 수준을 상회하자 쾌재를 부르기도 잠시, 얼마 가지 않아 이상 상황이 발생했다. 마비 신호가 온 것이었다. 즉시 개입해야 했으나 나는 두 가지 방안을 두고 갈등했다. 무상심공으로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독왕의 심공을 운용할 것인가.
마비가 일어나기 전에 나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애초의 기조를 고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내단의 입장에서 독왕의 심공은 일종의 채찍이었다. 나는 독왕만큼 그 채찍을 부리는 데 능숙하지 않았기에 자칫 반발만 초래할 공산이 컸다.
또 하나, 독왕의 심공은 원력의 체득이 더디더라도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여러 이질적 원정을 융합하는 과정에서 고생했을 독왕의 고심이 짙게 배어있었다. 따라서 그에겐 최고의 심득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나에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겐 느긋하게 원력을 취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최단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사왕이나 마왕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하여 당분간은, 아니 아마도 오랫동안 독왕의 심공은 접어둘 참이었다.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내게 어울리지 않으면 안 입느니만 못한 법이었다.
나는 독왕이 창안했으되 내 자신이 독자적으로 수정-발전시킨 부분도 상당한 무상심공을 길잡이로 삼았다.
우선은 혈류를 돌던 원력의 일부를 내단이 아니라 골수에 집어넣으며 응수타진을 했다. 내단은 문을 걸어 잠그는 것으로 대응했다. 아주 바람직하지는 않았으나 최악도 아니었기에 나는 지체 없이 다음 수순에 착수했다.
전신에 퍼져있던 원력을 회수해 골수에 갈무리하자 경직되었던 근골이 서서히 풀렸다. 아슬아슬했다. 골수 밖으로 나온 원력의 최대치가 조금만 지속되었더라면 마비가 왔을 터였다. 그랬다가 독곡에서처럼 며칠 동안이나 운신 불편을 겪는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운공을 하며 나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 내 원력은 확실히 불어나있었다. 공력으로 치환하면 일 갑자 정도일까. 잠깐의 운공으로 획득한 것 치고는 엄청난 양이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만큼 긍정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원력은 증가했으나 순도가 떨어졌다. 불순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원래 내 몸에 깃들었던 어머니의 원정은 물론이고 독왕에게서 받았던 이모의 원력에 비해서도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를 무공에 원활하게 활용할 수 있을까. 위력이나 정밀함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당장 알아보기로 했다.
* * *
눈을 뜨자 휘둥그레 뜬 광객의 눈이 보였다.
깜짝 놀랐지만 광객은 더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경악성을 내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더니 마치 입맞춤이라도 하듯 내 면상에 자기 낯짝을 바짝 붙이고 있었던 이유를 황급히 설명했다.
“자네 얼굴이 제멋대로 움직이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살펴보던 중이었네, 은공. 실로 변화무쌍했다네. 표정으로 희로애락을 반복하다가 일순지간 굳어버리더니 다시 경련이 일더구먼. 그래서 걱정이 돼서…….”
매듭을 지을 말을 찾지 못한 광객이 어물쩍 넘어갔다.
“그런데 괜찮은가, 은공? 황소 발에 밟힌 개구리 같았던 자네 다리는 신기하게도 원 형태를 찾긴 했네만, 얼굴이 별안간 난리를 치는 바람에 무슨 탈이라도 난 줄 알고…….”
다시 말끝을 흐리는 광객을 보며 나는 씩씩한 음성을 토해냈다.
“저는 끄떡없습니다, 어르신. 나가시지요.”
나는 소면통달이 판 일 장 반 길이의 동굴을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구덩이로 나가 위를 올려다보고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벌써 해가 지는군요.”
광객의 동공에 근심이 어렸다.
“정말 괜찮은 겐가, 은공? 지금은 황혼이 아니라 아침일세. 해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네.”
“아!”
기껏해야 반 시진 정도 지난줄 알았다. 그런데 중천의 해가 구덩이 너머로 사라지고 없어 의아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세 시진 어림이 아니라 꼬박 하루가 지났다니.
“어서 가세나, 은공. 참, 가는 길에 소면통달에게 들름세. 여섯 번이나 찾아왔다네. 자네가 깨어나면 꼭 백운당인가에 데려오라고 하더구먼. 가는 길은 알지?”
나는 광객을 잡았다.
“안 가도 됩니다, 어르신. 두 시진쯤 지나면 그 어른이 장왕 어르신과 함께 이리로 오실 겁니다.”
광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시진?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말인가?”
“그냥 기다리기엔 심심하니, 어떠신지요, 어르신? 오랜만에 저하고 손을 섞어보지 않으시렵니까?”
광객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농담일 테지, 은공?”
절로 쓴웃음이 났다.
일 년 전 나는 광객과 평수였다.
그와 치열하게 겨룬 적은 없으나 우리 둘 모두와 생사투에 준하는 격전을 치렀던 괴선을 기준점으로 삼아 비교하면 완벽하게 대등한 무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몇 단계 이상의 차이가 났다. 내 무위는 광객이나 괴선보다는 십왕에 가까웠다. 그러니 광객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놀린다고 여길 수도 있을 터였다.
기실 광객과는 이전에도 자주 손을 섞지 않았다. 비무를 하는 경우에도 격렬하게 치닫는 경우는 전무했다. 그저 서로의 수를 견식하고 가볍게 체험하는 수준이었다. 광객이 첫 만남 때부터 나를 은공이라고 부르는 통에 나는 그에게 과하게 손을 쓰기가 부담스러웠고 그는 그대로 나와 우열을 가리기가 난처했을 터였다.
그나마 늪지에서는 이따금 어울렸으나 비처로 옮긴 후부터는 거의 따로 놀았다. 간혹 그와 괴선, 그리고 검황자와 상대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한우경이나 이모와 더불어 수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사정을 솔직하게 알렸다.
“실은 아직 제 내기가 불안정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제 몸을 제대로 부릴 수 있을 때까지 예전에 늪지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제 상태에 맞춰 응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대번에 광객의 안색이 밝아졌다.
“부탁이라니, 당치 않네, 은공. 자네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네. 그럼 바로 시작할까?”
“네, 어르신.”
“그럼 어서 오게나.”
웬일인지 신이 난 광객이 비무를 재촉했다. 나는 철봉과 옥소를 빼들지 않고 적수공권으로 광객에게 달려들었다. 수공의 대가인 그와의 육박전을 통해 몸을 얼마만큼 통제할 수 있을는지 가늠하고 싶어서였다.
권법 대결을 벌이는 무사들처럼 바짝 붙은 우리는 수도(手刀)와 주먹, 그리고 팔꿈치를 번갈아 사용하며 서로를 공략했다. 광객은 팔뚝으로 방어했고 나는 몸놀림으로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공방전이 격화됨에 따라 나는 서서히 원력을 끌어올렸다. 그에 맞춰 광객도 공력을 양수에 실었다. 초반엔 그럭저럭 균형을 이루었으나 원력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나는 차츰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기실 미세한 차이였으나 초절정 극상의 고수였기에 광객은 금세 알아차렸다. 정신없이 치고받다 말고 그가 돌연 내게서 훌쩍 떨어졌다.
“괜찮겠는가, 은공?”
“다쳐도 괜찮으니 좀 더 저를 거칠게 몰아주십시오, 어르신. 전날 불귀곡에서 괴선 어르신과 싸울 때처럼 말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게 저를 돕는 길입니다.”
광객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알았네. 최선을 다함세.”
우리는 다시 붙었다. 광객이 죽기 살기로 임한 덕분에 비무는 생사투가 되었다.
나는 광객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려면 그보다 월등한 수준에서 그를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 되면 새로이 취득한 원력의 적합성을 확실히 판단하기 어려울 터였기에 수위 조절에 애를 먹었다.
나는 원력을 광객의 공력보다 약하게 운용하는 대신 신법은 극상으로 펼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면 쌍방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장기전을 치를 수 있을 터였다.
우세한 공력을 바탕으로 공세를 펼쳤으나 광객은 주도권을 쥐지는 못했다. 근거리였음에도 내가 그의 수강들을 모조리 흘려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날카로운 반격을 가해 광객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광객은 어느새 애초의 목적을 망각하고 몰아지경에 빠졌다. 나는 광기를 발산하는 그가 아니라 내 내부를 지켜보았다. 처음엔 껄끄러운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생각보다는 원력의 활용이 매끄러웠다. 다만 이 이상의 원력을 뽑아냈을 때도 그러할 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나는 아직 최대치의 삼분지일에도 못 미치는 원력만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시험에 나서야 할 때였다.
나는 철봉을 꺼내들었다. 마음껏 수강을 휘두르며 발광하던 광객이 흠칫했다. 그의 몰입을 깨뜨린 것 같아 왠지 미안했다.
내가 계속하자는 시늉을 하자 광객이 다시 수강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두 자 길이의 강기가 내 명치를 찔러왔다. 나도 광환을 쏘아냈다. 하지만 내 광환이 겨냥한 것은 광객이 아니었다. 철봉에서 발출된 빛줄기는 구덩이의 사방 벽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머리카락 두세 올의 차이로 광객의 수강을 빗겨냈다.
광객에게 맞불을 놓지 않고 주변에 포진한 가상의 적들에게 공격을 가함으로써 나는 길을 찾았다.
비무라기보다는 상태 점검을 겸한 수련이라 할 공방전은 삼백 초 이상 지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한 차례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내단에게 받은 원력이 균등하지 작동하지 않은 탓에 균형이 흔들렸을 때였다.
광객은 하수가 아니었기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내 왼 무릎을 찍어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전후좌우 어느 쪽으로도 피신 방위가 나오지 않았기에 속절없이 당할 판국이었다. 장왕과의 일전에서 당한 부상이 아직 덜 아문 부위인지라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은 지금 가격을 허용하면 자칫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으깨지는 정도라면 이모의 치유력으로 회복 가능할 터이지만 만에 하나 통째로 뜯겨져나가면 곤란했다.
나는 유혹에 굴복했다. 무릎 대신 허벅지를 내줌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책을 버리고 어제 장왕과의 결전에서 얻은 깨달음을 시도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찰나지간의 선택과 결행은 절반의 성공을 낳았다.
나는 데굴데굴 굴렀다.
내 무릎을 작살낸 줄 알고 지레 놀란 광객이 허둥지둥 손을 거두었다. 아쉬웠다. 그가 후속공격을 가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또 다른 비약을 이루지 않았을까. 뭐, 심하게 다칠 수도 있었겠지만.
“괜찮은가, 은공?”
나는 고소를 지었다. 오늘만 한 다섯 번쯤 들은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어르신.”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광객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내 무릎은 멀쩡했다. 다만 나는 공격자가 광객이 아니라 사왕이나 마왕이었다면 신기를 발했음에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망외의 성과를 얻고도 불만스러웠다. 근래 눈부신 성취를 거듭했지만 더욱 더 발전해야 했다. 그래야 다른 방면에서의 약세를 상쇄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탄복했네, 은공. 원래부터 자네 신법은 귀신의 몸놀림 같았으나 이제는 신묘한 정도를 넘어 가히 천외천의 경지일세 그려. 나는 누가 자네를 잡을 수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네. 십왕들이라 해도 가능할는지 의문일세.”
“과찬이십니다, 어르신.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거짓말이었다. 신법에 관한 한 나는 이미 십왕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에 이르러있었다. 앞으로 몇 번만 더 발돋움하면 그들을 능가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겸양의 언사를 곧이곧대로 들은 광객은 침중해졌다.
“허어, 그들은 정녕 신이란 말인가. 그 신비한 신법으로도…….”
광객은 말을 마무리 짓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실은 그게 아니고…….’
사실을 일러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웃기는 노릇인지라 나는 답답했다. 겸양지덕은 개뿔. 이래서 사람은 늘 솔직해야 하는 법이었다.
광객에게 비무 속개를 요청하려는 찰나 나는 위로 시선을 올렸다. 나를 따라 고개를 쳐들었던 광객이 미간을 모았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