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35
제134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오
“이건 어떤가? 자네가 원한다면 후세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줌세.”
상상도 못했던 말에 일시지간 사고가 정지했다.
“지금 뭐라고 했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내 조문을 찔렀음을 간파한 독의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표정관리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위인이었다.
“자네와 그 아이가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본다고 했네. 어떤가, 전왕? 그러면 그분의 시신을 보게 해주겠는가?”
“그게 가능하단 말이오?”
이세 문제는 진소월과 나, 둘 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문제를 입 밖에 내지 않고 철저하게 함구했다. 마음만 아플 터이기 때문이었다.
기실 아이는 고사하고 합일 자체가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독공을 익히지는 않았으나 진소월은 어느 독인 못지않은 독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내가 지닌 독정의 밀도와 강도는 차원이 달랐다. 평범한 사내가 그녀의 독혈을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그녀 또한 내 독기에 화를 입을 공산이 컸다. 우리가 입맞춤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못한 이유였다.
전날 점박이 노인에게 이 문제에 관해 넌지시 자문을 구했으나 그는 이 방면으로는 문외한이었다. 독곡으로 가거들랑 전문가들에게 상세히 알아봐 달라고 청하기도 민망한지라 그냥 어물쩍 넘어가고 말았다. 당시 나와 진소월은 서로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뿐, 공식적으로는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
실은 독의와 어느 정도 말이 트이면 진소월과의 결합이 가능한지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선수를 치다니. 그것도 내 수읽기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 지점에 착수하다니.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후세……. 후세라.
생경한 단어를 읊조리자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들일까, 딸일까. 나를 닮을까, 진소월을 닮을까.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딸이든 아들이든, 나를 닮건 진소월을 닮건, 얼마나 예쁘고 소중하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받았던 가없는 애정을 물려줄 대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의 해일이 밀어닥쳤다.
독의의 갈고리 같은 음성이 나를 황홀경에서 끄집어냈다.
“확답은 할 수 없으나 충분히 가능하리라 보네. 자네의 존재 자체가 희망의 근거일세. 지금부터 연구에 돌입하면 조만간 긍정적인 결과물을 도출할 수…….”
드디어! 나는 독의의 말을 끊으며 그가 부지불식간에 노출한 허점을 찔러 들어갔다.
“내 존재 자체라니?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나는 독의를 주시했다. 그의 응수는 향후 우리의 관계 설정에 있어 분수령이 될 터였다. 예상과는 달리 독의는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나는 자네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네, 전왕. 하나에서 열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말일세. 아, 물론 후자는 비유적인 표현일세. 자네 몸에 관해서는 차차 알아갈 참일세.”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거요?”
“그야 자네 여자에게 들어서 알지. 기특하게도 자네에 관해 모르는 게 없더구먼.”
“…….”
“노파심에서 하는 얘긴데, 그 아이를 탓하지는 말게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네. 아! 그 아이의 신체에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았다는 뜻일세. 강한 여자더구먼. 어지간한 독종들도 술술 불게 만드는 극성의 미약에 꿋꿋하게 버티는 바람에 적잖이 놀랐다네. 하는 수 없이 특효약을 써야만 했네. 어쨌거나 앞으로의 전망이 밝으이. 전날 말했듯 그 아이의 치유는 초극의 의지력과 인내력이 관건일세. 어쩌면 내 의술보다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네. 그런데 그만한 정신력이면 얼마든지 고통스러운 처치 과정을 견딜 수 있을 듯싶구먼. 섣부른 장담이지만 예후가 좋을 거라 확신하네. 그 아이는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걸세.”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물었소.”
“답하지 않았는가? 그 아이의 몸에 해가 되지 않을 특효약을 썼다고. 그것도 치유의 일환이었네. 어느 정도의 정신력을 갖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했으니까.”
“…….”
“아직도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구먼. 알겠네. 정 특효약의 구체적인 성분을 듣고 싶다면 말해줌세. 약이라기보다는 기물이라고 하는 게 이해가 쉽겠구먼. 채혼주라는 이름의 구슬인데 술사들이 부리는 물건이라네. 미약을 복용한 상태에서 시전자의 유도에 따라 구슬에 초점을 맞추고 주문을 들으면 제아무리 초절한 정신력을 가진 인간이라도 혀를 놀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네. 혹시나 싶어서 덧붙이네만, 염려하지는 말게. 자네 같은 이에겐 통하지 않으니까. 자네는 고사하고 일 갑자 어림의 공력을 가진 조무래기들에게도 무용지물이지. 다행히 그 아이는 내공을 익히지 않아 제대로 먹히더구먼. 덕분에 크게 수고를 덜었네.”
“그 기물을 준비하느라고 전날 늦게 온 거였소? 제길,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군.”
“부인하지는 않겠네. 솔직히 꽤 애를 먹었다네. 약에 쓰려면 개똥도 없다더니 딱 그렇더구먼. 개똥처럼 흔치는 않으나 그렇게 대단한 귀물은 아닌데도 간신히 구했다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어 뿌듯하구먼.”
나는 헷갈렸다.
독의가 채혼주에 대해 실토한 것은 바람직한 신호였다. 그러나 여전히 꺼림칙한 구석이 남아있었다. 살아온 이력으로 보건, 본능적인 판단에 의해서건, 독의는 등을 맡기기엔 미덥지 않은 인물이었다.
내 속을 읽은 듯 독의가 그 말을 꺼냈다.
“자네 선친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를 가릴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일렀다지? 나는 어떤가, 전왕? 그럴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나는 솔직히 답했다.
“아직 잘 모르겠소.”
“허허, 그런가? 청컨대 나를 괴선이나 광객처럼 자네의 ‘진정한 전우’에 포함시켜주게나.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세. 적어도 우리의 거래에 관해서는 말일세. 나는 그저 신이 내린 독왕 어르신의 유체와 자네의 몸을 연구해 신에게로 이르는 궁극의 비결을 알아내고자 할 뿐, 다른 욕심은 아무 것도 없네. 자네에게도 나쁠 게 없지 않은가? 놔두면 죽을 날이 머지않았을 연인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뿐더러 잘하면 바라마지 않은 후세까지 얻게 될 터이니. 나아가 장차 내가 거둘 결실도 결국은 자네 차지가…….”
“그쯤 하쇼.”
“그러지 말고…….”
“됐다니까. 그보다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됐다니까 나도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봅시다.”
“뭘 알고 싶은가? 말만 하게나. 다 알려줄 터이니.”
“왜 무림의 제일천룡 자리를 걷어차고 뚱딴지 같이 의계에 뛰어들었소?”
그런 질문이 나올 줄 몰랐는지 독의의 동공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걸 아는 게 자네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가?”
“당연하지 않소?”
“…….”
“얘기하기 싫으면 관두던가.”
시간을 벌려는 듯 독의가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도로 내려놓더니 내 요구를 수용했다.
“알았네. 말해줌세.”
이렇게 해서 나는 강호의 호사가들 사이에 오랫동안 최고의 수수께끼 중 하나로 꼽혔던 비사를 듣게 되었다.
* * *
독의가 담담한 목소리로 회상을 시작했다.
“내가 무인지로를 떠나 의원의 길로 접어들 게 된 계기는 두 가지였네. 하나는 정을 나눈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계의 절감이었네. 전자가 월등히 중요한 계기였으되 후자가 없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걸세.
나의 정인은 운학서원 출신의 학사였다네. 내 글 선생이었지. 열세 살에 처음 만났는데 보자마자 그에게 매료되었다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네. 그냥 그의 모든 게 좋았네. 나직한 음성, 부드러운 표정, 맑은 눈빛. 여인처럼 섬세한 손.
그는 학림 팔대명문인 운학서원의 상학답게 학식이 깊었다네. 내 질문에 쩔쩔매던 이전의 선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 그러면서도 늘 겸손했네. 우리는 난문을 함께 해독하며 서로의 감각이 통한다는 걸 확인했다네.
그와 마음을 주고받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네. 나는 매일 그와 만날 수 있는 미시가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네. 함께 있으면, 행복했다네.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네. 그도 그랬을 거라 믿네.
오해는 말게나. 우리는 일심(一心)이되 동체(同體)는 아니었네. 그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몽정을 시작하며 사내구실을 하는 몸이 되었으나 우리는 한 몸이 되지는 않았네. 서로의 손을 어루만지는 게 최고의 접촉이었지.
세간에 나더러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떠돈다는 걸 알고 있네. 사실이 아닐세. 나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에게도 끌린 적이 없네. 오로지 그에게만 심혼의 울림을 느꼈네. 그는 나의 운명이었네.”
독의의 목소리가 어느새 축축해져있었다. 나는 그에게 뒷이야기를 재촉하지 않고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었다.
“꿈같은 시절은 일 년 남짓 만에 끝났네. 내가 막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네. 그가 토혈을 했다는 전갈을 받고서 걱정하던 차에 오전 수련을 마치자마자 중식을 거른 채 그의 처소로 달려갔더니 이미 숨을 거두었더군. 어떻게 손을 써 볼 여지도 없었네. 그야말로 급사였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네. 가슴도 뻥 뚫린 느낌이었고. 그런데 희한하게도 침착하게 행동했네.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네. 돌이켜보면 충격이 너무 커서 현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듯싶으이. 슬픔이 너무 커서 눈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것도 같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 현장에서 나는 문(門)의 의원을 붙잡고 물었네. 그의 사인(死因)이 뭐냐고. 심장이나 혈맥, 그리고 폐 등을 거론하며 서너 가지 가능성을 주절거리더구먼. 어느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네. 그래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지. 혹시 미리 알았다면 예방책이 있었을지 말일세. 사후약방문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나 자신을 달래야 했네.
하지만 즉시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네. 뒤늦게 항거불능의 상실감이 밀어닥쳤기 때문일세. 몇날 며칠을 멍하니 지내다 그의 부재를 실감한 나는 삶의 의욕을 잃었네. 그러다 폐인이 될 것 같아서 얼마간은 미친 듯이 무공 수련에 몰두했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빈자리가 더욱 더 커져가더구먼.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가 죽은 날 했던 결심이 떠올랐네. 즉시 의방으로 달려가서 서적들을 긁어 와서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네. 공교롭게도 첫 번째로 본 책이 의서를 빙자한 기서였네. 자신의 혼을 바쳐 죽은 자를 살리는 술법이라든지 영약들을 이용한 불로불사의 비법에 관해 떠들고 있더구먼. 허무맹랑한 소리였지만 나는 대번에 사로잡혔네. 그를 되살릴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았네. 실제로 그런 교환이 가능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걸세.
문의 의방에 비치된 의서들을 통독했으나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외부의 의서들을 구해 탐독했네. 그러다 차츰 의학에 빠져들었네. 무공을 수련하고 무학을 궁구하는 것보다 더 재미나더구먼. 정확한 시점은 특정할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그와 무관하게 의학 자체에 심취하게 되었더랬지. 그것이 내가 의계(醫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였다네.”
* * *
두 번째 계기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기 전에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이상하구려. 세상은 당신이 여가 삼아 의서를 뒤적이다가 난데없이 의문(醫門)에 투신한 거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정도 사연이면 주위에서 이유를 알아차렸을 거 아니오?”
독의가 실소를 흘렸다.
“아무도 우리 관계를 몰랐네. 좀 전에 말했듯 내가 의서를 보기 시작한 것도 그가 사망한 날로부터 꽤 지난 시점의 일이었고.”
나는 즉시 반박했다.
“아무리 은밀히 정을 나누었다고 해도 몇 사람은 눈치를 챘을 거요. 그들의 입을 전부 봉하지 않는 한 비밀은 새어나갔을 테고. 그런데도 당신과 관련하여 그 학사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떠돈 적이 없소. 이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오.”
독의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설령 친인들 중 누군가 우리가 범상치 않은 사이임을 감지했다고 해도 단순히 사제지정이라고 여겼을 걸세. 왜냐하면 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거든. 그는 나보다 반백 년 이상 연상이었네. 그러니 그와 내가 연정 같은 마음을 주고받았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치 못했을 걸세.”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완벽한 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