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37
제136화 같은 편
우리를 놀라게 한 건 귀곡성이 아니라 아스라이 들리는 북소리였다.
두둥, 두둥, 두둥.
짧은 간격을 가지고 두 번씩 울리는 고성은 천공을 일직선으로 비행하는 괴물체 두 개가 명교의 경계선 상공에서 목격되었다는 신호였다.
“설마 그들이 벌써……. 아아, 큰일이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전왕?”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지만 소면통달은 표정과 목소리에 불안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덩달아 장왕도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들 때문에 나는 오히려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제 의논한 대로 대처하면 됩니다, 어르신. 저는 몇 가지 준비할 것들이 있으니 장왕 어르신을 데리고 먼저 그리로 가 계십시오.”
내가 그대로 방을 나갈 태세이자 소면통달이 얼른 내 소매를 잡았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쓴웃음이 났다. 소면통달은 전날 들고 왔던 탈 것에 내가 친인들을 챙겨 달아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우를 두고 도망치지는 않습니다.”
내 옷을 놓아주며 소면통달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오, 전왕. 그런데 그 둘은 누구일까요?”
짐작이 가고도 남았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글쎄요. 조금 있으면 알 수 있을 테지요. 아무튼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전날 말씀드린 대로 장왕 어르신께 반드시 피아를 분간하도록 주지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초장부터 최강의 응전을 해야 함도 잊지 마시고요.”
“알겠소, 전왕. 부디, 부디 잘 부탁하오. 이 땅 수백 만 백성의 운명이 전왕의 손에 달려 있소.”
나는 대꾸를 주지 않고 삐거덕거리는 문짝을 뜯어낼 것처럼 거칠게 잡아당기고는 방을 나갔다. 그러고는 곧장 구세원으로 날아갔다.
* * *
북소리로 급보를 전달하도록 한 비상조치는 독곡에 갔을 때 경험했던 그들의 수단을 차용한 것이었다.
많은 정보를 담을 수는 없었으나 신속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서신을 전하는 비둘기나 매가 제아무리 빠르다 한들 소리에 비하면 굼벵이나 다름없었다.
그제 소면통달과 대책을 논의하며 나는 명교의 서편 경계를 따라 최대한의 인력을 배치한 후 밤낮 가릴 것 없이 상공을 감시시키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천공을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보이면 그 숫자에 따라 보고하도록 일렀다. 범인이라면 언뜻 새와 구별이 안 갈 수도 있겠지만 무공을 익힌 교위들은 조류와 인영을 식별할 수 있을 터였다. 구름이 낀 야밤엔 놓칠 가능성도 적지 않았으나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결과적으로는 운이 좋았다. 적들의 침공을 모르고 있다가 맞닥뜨렸으면 아무 대비도 못한 채 속절없이 당했을 것이었다. 장왕이 그나마 가장 정신이 밝은 진시에 일이 벌어진 것도 호재였다.
물론 그렇다고 승산이 급상승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선의 대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승전고를 울릴 가능성은 낮았다. 기껏해야 이삼 할 정도일까. 기실 그것도 높게 잡은 편이었다. 어쩌면 일 할 어림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적들은 달랑 두 명이지만, 그들이 내가 짐작하는 인물들이라면 우리 쪽의 절대열세였다.
소면통달에겐 답을 주지 않았으나 나는 적들이 사왕과 낭왕이리라 확신했다.
낭왕 대신 마왕이 올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순 없었으나 무시해도 좋을 듯싶었다. 마왕이 사왕과의 묵은 앙금을 털고 대승적 차원에서 손을 잡을 양이었으면 진즉 그리 했을 터였다.
경우에 따라선 적의 항문도 빨아줄 사왕은 몰라도 마왕은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작자’와 연수할 위인이 아니었다. 사상 최초로 마도를 일통하는 위업을 이루었으나 불혹이 지나서야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마왕은 젊은 시절 사왕에게 받았던 멸시와 모욕을 잊지 않고 이를 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왕은 사왕대로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거들먹거리는 개구리를 재수 없게 여겼다. 어쨌거나 그들의 반목은 내 입장에서는 천운이었다.
기실 마왕이 낭왕으로 대체되었을 뿐 사정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사왕과 더불어 십왕의 최하위를 다툰다고 폄하되고 있으나 낭왕은 서역 무림에서 고금제일인으로 공인된 절대강자였다. 그가 다스리는 영토는 중원의 삼분지일에 달했고 휘하에 거느린 초절정과 절정의 고수들도 부지기수였다. 새외사세의 일익인 천랑성의 위세는 정맹이나 사벌, 혹은 마련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서역에서 신화를 일군 낭왕은 동방의 허접스러운 왕들을 무릎 꿇리고 대륙을 수중에 넣겠다며 십사 년 전 홀로 천벽(天壁)을 넘고 대사막을 건넜다. 실로 대담무쌍한 행보였다. 그를 가로막은 이는 마왕 공손정이었다. 마왕은 팔마를 대동했음에도 그들을 부리지 않고 단독으로 낭왕을 상대했다. 서역 무림의 절대자에 대한 예우 차원이 아니라 자신감의 발로였다.
서천의 소량에서 벌어졌던 경천동지할 대결은 마왕의 승리로 끝났다. 이백 초 가까이 버텼지만 낭왕은 결국 마왕의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패퇴했다. 마뇌의 명을 받은 팔마가 부상을 입고 도주하는 그를 추격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그때 호되게 당했는지 낭왕은 다시는 호기를 부리지 못했다. 중원 무림에 마왕과 동급의 무존(武尊)들이 다섯이나 더 도사리고 있으니 그로서는 중원 정복을 도모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 * *
명교가 든 은천의 동서 양편은 공히 황량한 들판이었다.
장왕의 백운당이 자리한 동쪽 황무지는 명교의 테두리 안에 있었지만 서쪽 벌판은 담장 밖에 아득하게 펼쳐져있었다. 급하게 마련한 ‘패’를 쥔 나는 그곳으로 날아갔다.
내 가슴 높이의 담장을 지나자 멀리 두 개의 인영이 보였다. 장왕과 소면통달이었다. 나는 패를 적당한 곳에 둔 채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소면통달에게 물었다.
“장왕 어르신께 충분히 알려드렸습니까?”
불길하게도 소면통달이 어두운 안색을 드리웠다.
“거듭 숙지시키긴 했으나 그대로 따라줄지 장담하기 어렵구려.”
이런, 제길.
나는 욕설을 목구멍에 가두는 품위를 발휘했지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은 제어할 수 없었다.
“대신회의에서 발언할 그 복잡한 내용을 완벽하게 암기했는데 고작 두어 개의 지시사항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말씀입니까?”
소면통달이 상전에게 질책을 받은 하인처럼 쩔쩔 맸다.
“그게, 좀 다른 문제인지라. 전날 전왕과의 비무에서처럼 교주가 도중에 흥분해 내 말을 잊을 우려가 있기에 미리 알려드린 거외다. 여하간 미안하오.”
나는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소면통달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따지듯 물어서 제가 죄송합니다.”
사과로써 내분을 봉합한 나는 멍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장왕의 손을 잡았다. 장왕이 움찔하며 내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를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장왕이 내 품에서 몸부림쳤다.
“어르신과 저는 한 편입니다.”
소면통달이 나를 거들었다.
“그와 우리 편이다, 찬아. 그를 지켜줘야 한다.”
나는 소면통달의 말을 수정했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러지 않으셔야 합니다. 장왕 어르신께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사왕을 상대하는 데 전념하도록 일러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소면통달이 서둘러 내 청에 응했다. 그의 주문이 어려운지 장왕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를 더욱 꽉 껴안으며 좀 전의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어르신.”
요동을 멈춘 장왕이 두 차례 내 말을 따라했다.
“같은 편. 같은 편.”
나는 장왕을 풀어주었다. 그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기를 바라면서.
양털구름이 깔린 천공을 올려다보며 소면통달이 물었다.
“그들이 언제쯤 올 것 같소?”
“잘 모르겠습니다.”
장왕을 힐끗거리며 소면통달이 중얼거렸다.
“늦기 전에 와야 할 텐데.”
사정을 모르는 이에겐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나는 소면통달의 심려를 공감했다. 정오가 지나면 장왕은 급격히 이지가 흐려졌다. 적들이 그 시간 이후에 당도하면 낭패였다. 그러면 두 번째 방책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왕과 낭왕을 끌고 전날 삼절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바탕 도주극을 펼치는 것이었다.
나는 소면통달을 안심시켰다.
“그 전에 올 겁니다.”
바람 섞인 예측이었으나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명교의 영토는 남북으로 길쭉한 형태였다. 서편 경계선에서 은천까지는 길면 일천사오백 리 정도였고 짧은 곳은 칠팔백 리에 불과했다. 적들이 어느 지점에서 목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일천 리 쯤이라 계산하고 그들이 최고 속력을 유지할 거라 가정할 시 늦어도 사시 말이나 오시 초에는 이곳에 도달하게 될 터였다.
나는 소면통달을 전장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그가 은연중 발산하는 불안감이 장왕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제게 맡기고 이제 그만 가보시지요.”
나는 일부러 직설적인 언사를 썼다. 그럼에도 소면통달은 미적거렸다.
“정말 우리가 참전하지 않아도 되겠소?”
“당장은 장왕 어르신과 제가 대처하는 게 낫습니다. 그들의 주의가 분산되면 오히려 우리 쪽에 불리하게 작용할 공산이 큽니다. 말씀드린 대로 제가 신호를 주면 나오십시오.”
나는 장왕과 내가 적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당하면 지체 없이 항복 선언을 하라는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은 약한 소리를 늘어놓을 때가 아니었다. 전의를 다져야 할 때였다.
장왕을 일별한 소면통달은 마지못해 내 요청에 순응했다.
“사왕을 물리쳐 다오, 찬아. 무운을 비오, 전왕.”
장왕과 나에게 한마디씩 남긴 소면통달이 몸을 날렸다. 나는 그를 쫓으려는 장왕의 팔을 잡았다.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어르신. 저를 두고 가시면 안 됩니다.”
나를 뿌리치려던 장왕이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핵심적 단어를 읊조렸다.
“같은 편.”
“맞습니다. 같은 편.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장왕은 팔에 주었던 힘을 풀었고 나는 그를 놓아주었다.
* * *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시간은 지긋지긋하게 느리게 흘렀다. 아니, 한편으로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 새 해가 중천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를 일수에 짓뭉갤 수 있는 버거운 강적들이 어서 오기를 바라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초조하면서도 맥이 빠졌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적들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소면통달을 보낸 후 나는 철봉과 옥소를 꺼내 근자에 창안한 공격 초식들을 빈 공간에 쏘아내며 내 상태를 꼼꼼히 점검했다.
우려했던 대로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을 발할 시엔 타격점에서 미세한 차이가 발생했다. 전투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오차는 생사를 가를 수도 있었기에 심히 걱정스러웠다.
심사가 혼란하니 오만가지 잡념이 들끓었다. 온갖 단상들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 그 중 하나가 유독 두드러졌다. 무왕에 관한 의문이었다. 그는 왜 왔다가 떠났단 말인가. 그가 있었더라면 우세를 점할 수 있었을 터인데. 적들을 처치하지는 못하더라도 퇴치는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무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자각한 순간, 깨달았다. 내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긴장감일 뿐이라고 애써 자위했지만, 아니었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상대가 될 낭왕을. 나는 마왕에 비해 별 손색이 없는 초(超)강자와 생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이었다. 일대일(一對一)로! 더욱이 장왕까지 챙겨가며.
나는 내 안의 두려움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러나 인정해야 했다. 그래야 두려움의 크기와 강도를 확인하고 그보다 더 크고 강한 의지력으로써 제압할 수 있었다. 내면의 두려움을 직시하며 나는 투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투지로 두려움을 포박하고는 뱃속에서 추방했다.
“꺼져!”
내 사자후가 터짐과 동시에 까마득한 천공에서 두 개의 점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