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38
제137화 나는 당신과 같은 입장이오
흑점들은 순식간에 인간의 형상으로 화했다.
그들의 외관을 확인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마왕은 아니었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두 인영은 나와 장왕이 선 데서 이십 장이나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범인이라면 이목구비를 구별하기도 쉽지 않을 거리였다.
나는 실소했다. 낭왕은 몰라도 사왕은 백 장 이내에 들기 전에 이미 우리가 누군지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럼에도 곧바로 우리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고 멀찌감치 내려선 건 전장의 조건을 살펴보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기실 명교 외곽의 벌판을 전장으로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적들을 명교에 끌어들여 싸우다 엄한 이들이 격전의 여파에 휩쓸려 희생될 것을 염려해 그랬다고 하면 근사하게 들릴 테지만 실상은 신법을 주특기로 하는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내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탁 트인 공간이 필요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발목 높이의 풀밭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기에 사왕의 점검은 금세 끝났다.
사왕이 장왕에게 재회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정 교주. 이십 년 만인가?”
사왕은 장왕을 장왕이라 부르지 않았다.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 것이었다.
나에게 고개를 돌린 장왕이 도움을 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사왕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모양이었다.
‘이십 년이 아니라 십구 년이다, 늙은이.’
장왕 대신 응수하려다 참았다. 장왕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십 장 전방의 노인이 필생의 호적수임을 인지한 듯했다.
장왕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사왕이 음험한 안광을 분출했다.
“옛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어째서 환영사가 없는가, 정 교주? 그런데 어디 아픈가? 병든 닭처럼 안색이 파리하구먼.”
“끄어어어.”
장왕이 별안간 괴성을 지르며 내기를 끌어올렸다. 사왕이 말과 함께 쏘아낸 암기(暗氣)가 그를 자극한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장왕의 팔뚝을 잡았다.
“아직, 아닙니다, 어르신.”
다행스럽게도 장왕은 내 제지에 순응했다. 그가 내 손을 뿌리치고 사왕에게 달려들었다면 곤란해질 뻔했다. 장왕은 선공이 아니라 응전으로써 제 역할을 해야 했다.
사왕은 장왕의 반응에 흡족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한결 여유로운 태도로 나를 상대했다.
“요란하게 북소리를 울려대기에 당연히 도망쳤을 줄 알았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뭘 믿는 게냐, 애송이?”
“알아서 뭐하게, 늙은이. 궁금하면 덤벼보던가.”
노기를 발산했는지 사왕의 곤룡포가 복어의 배처럼 부풀었다. 그러나 사왕은 내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계속 돌다리를 두드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살을 감행할 리는 없고, 필히 방수가 있을 테지? 누굴까? 독왕? 아니면 무왕? 그도 아니면 검왕?”
가소로운 수작이었다. 사왕은 내 눈빛의 변화를 포착함으로써 나에게 비장의 패가 존재하는지 가늠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응수타진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그런 유치한 수에 낚일 만큼 하수가 아니었다. 정작 미끼를 문 이는 잠자코 듣고 있던 낭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사왕? 독왕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소? 무왕은 사천 리 밖에 있고. 검왕은 또 뭐요?”
‘동앙은 주구따고 하지 아나써’라고 들리는 등 발음이 불명확하긴 했지만 알아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사왕이 급히 변명했다.
“진정하구려, 낭왕. 독왕의 죽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무왕 또한 말한 대로 수천 리 너머에 있소. 두 시진 전 그의 소재를 확인했으니 분명하오. 검왕은, 여기 올 리가 없소. 절대로 그럴 리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가 이곳에 있다면 숨어있을 위인이 아니오.”
“그렇다면 왜 이런 쓸데없는 잡담이나 나누고 있는 게요? 후딱 해치우자.”
낭왕의 반말이 거슬렸는지 사왕이 면상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낭왕이 거듭 독촉했다.
“어서 싸우자. 나는 저 아이만 죽이면 되는 거요?”
사왕이 답변하게 전에 내가 끼어들었다.
“어이, 낭왕. 그 늙은이를 믿지 마쇼. 배신이 전문이니까. 똥줄이 타서 온갖 감언이설로 당신을 꼬드겼을 테지만 똥을 싸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왕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고작 준비한 수가 반간지계더냐? 그 따위…….”
나는 사왕을 무시하고 낭왕에게 시선을 박은 채 내 말만 쏟아냈다.
“저 늙은이와 손을 잡느니 차라리 내 편이 되는 게 어떻소? 중원에 들기 전에 여러 가지로 조사했을 게 아니오? 평생 수하들 것까지 빼앗아가며 제 잇속만 차린 저 늙은이와 달리 나는 욕심도 없을뿐더러 신의를 지키는 인물이오. 그리고 중원의 왕들이 당신에게 정착을 허락할 것 같소? 하지만 나는 당신과 같은 입장이오. 저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족속이란 말이오. 내가 남방을 지배하는 독곡의 주인임을…….”
사왕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천둥 같은 고함이 지축을 울렸다.
“닥쳐라, 이놈! 간교한 혓바닥을 놀린다고…….”
사왕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를 막은 이는 내가 아니라 낭왕이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오, 사왕. 저 아이의 목을 주겠다. 사왕도 약속을 지켜!”
사왕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낭왕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에게 쇄도해왔다.
평범한 생김새의 낭왕은 특이한 기병을 휘둘렀다. 그의 무기는 번(幡)이었다. 깃대에 매달린 쪽의 폭은 한 자도 안 되는 반면 뾰족한 끝까지의 길이는 삼사 장에 달해 깃발이라기보다는 채찍처럼 보였다.
카라랑.
흑색 일색의 깃발은 펄럭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쇠사슬을 철판 위에 끄는 것 같은 기음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도 고막이 터지고 두개골이 울렸다. 소문이 전하는 대로 깃발의 움직임 자체가 강력한 음공(音攻)이었다.
나는 낭왕의 깃발이 나를 덮치기 전에 장왕에게서 떨어졌다. 낭왕을 내 쪽으로 유인해 장왕이 단독으로 사왕을 상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 둘이 붙어있으면 구상했던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사왕은 낭왕이 개전을 알리자마자 지체 없이 그를 쫓아 몸을 날렸다. 그의 목표물은 당연히 장왕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초장부터 강공으로 나왔다. 전날 경험했기에 나는 그가 최초의 장공에 전력을 실었음을 알았다. 사왕은 그를 세 번이나 꺾은 원수를 일장에 뭉갬으로써 단박에 오랜 빚을 청산할 작심을 했을 터였다.
나는 장왕이 내가 누누이 강조했던 ‘최강의 응전’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삼 초만 버텨주길 바랐다. 그러면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적들을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며 수십 가지의 전술을 떠올렸지만 무엇을 택하건 핵심은 동일했다.
낭왕을 따돌리고 장왕을 거들 것.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낭왕의 공격을 흘려낸 후 사왕의 후방을 노리는 것이었다.
장왕이 사왕을 잠시라도 묶어주면 해 볼만 했다. 사왕은 그의 등을 찔러가는 내 빛줄기에 대처할 여력이 없을 것이었다. 그를 즉살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부상을 입힐 수는 있을 터였다. 그것으로 우세를 점하지는 못할지라도 나는 사왕이 몸을 사리리라 확신했다. 어쩌면 전격적으로 퇴각할 지도 몰랐다. 바라건대 그래 주기를!
사왕은 불굴의 전사(戰士)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제 보신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위인이었다. 이십여 년에 걸쳐 치러졌던 장왕과의 대결들에서 그가 전패의 수모를 당한 건 무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동귀어진을 꺼린 결과였다. 만약 끝을 보고자 했다면 사왕은 장왕보다 반 호흡이라도 늦게 염왕을 알현했을 터였다.
나는 명예를 잃는 것보다 제 몸 상하는 걸 더 두려워하는 그의 성향을 한 달 전에 몸소 확인했다. 독왕과 충돌했을 때 사왕은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자신이 아주 약간이나마 우위에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독왕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꽁무니를 뺐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태였다. 어느 정도는 나를 의식해서 그랬을 테지만 당시 사실상 전투불능에 처해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 위협이 되기 어려웠다. 사왕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는 단지 독왕과의 일전에서 행여나 심하게 다칠까봐 겁을 먹은 것이었다.
나는 사왕이 그날의 처신을 되풀이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려면 반드시 그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해야 했다.
* * *
두 가지 변수가 발생했다. 하나는 낭왕의 괴이한 비술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왕의 뜻밖의 대응이었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니 집중해서 들어주시라.
길쭉한 깃발이 나를 휘감아왔을 때 나는 가볍게 빗겨 내리라 자신했다. 자만이었다. 번의 궤적을 벗어났다고 여긴 순간 느닷없이 번의 모서리에서 실낱같은 강선이 빠져나와 내 옆구리를 꿰뚫었다. 나는 가느다란 이물이 횡으로 이동해 나를 두 동강 내기 전에 반대쪽으로 빠져나갔다. 절단의 참사는 모면했으나 실에 실린 경력으로 내 복부 반쪽이 폐허가 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낭왕이 첫수부터 비장의 절초를 구사했음을 직감했다. 이는 내 예상을 완전히 거스른 처사였다.
낭왕은 사왕에게서 내 무위에 관해 전해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정보였다. 나는, 한 달 전의 내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압도했다.
사왕의 무릎 언저리에 불과했던 내 무위는 그의 가슴께에 이르러있었다. 그와 정면 승부를 벌이더라도 최소한 십 초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맞불을 놓지 않고 회피에 주력한다면 이십 초 이상도 가능할 것이었다.
낭왕이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으니 나는 그가 당연히 여유를 부리리라 내다보았다. 일방적인 수읽기였다. 그는 나를 경시하지 않고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오판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낭왕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했지만 임무를 방기하지는 않았다. 나는 장왕을 초전박살 낼 기세로 가공스러운 쌍장을 퍼부은 사왕에게 광참(光斬)을 날렸다. 광참은 바로 어제 장왕과의 비무에서 마지막 순간 떠올랐던 빛줄기였다. 익숙한 광환이나 광폭, 혹은 광우 대신 초현에 겨우 성공한 초식을 승부수로 삼은 건 가장 위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어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을 때 나는 불현듯 심상에 솟은 빛줄기가 나를 토벽에 처박은 장왕의 무지막지한 장공을 가르고 그를 이등분하는 환상을 보았다. 그래서 광참이라 명명했다.
나는 일도양단의 수법이라 할 광참이 사왕의 등짝을 도끼를 맞은 장작처럼 쪼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신강기를 둘렀더라도 광참에 직격당하면 치명상에 준하는 중상을 입을 터였다.
유감스럽게도 내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장왕에게 온 정신이 팔려 있어 내 기습에 대비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왕은 내가 광참을 날린 순간 이형환위를 발했다. 미리 알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동작이었다. 광참은 그의 호신강기를 훑고 지나갔다.
광참을 흘려냈지만 사왕은 아주 무사하지는 못했다. 광참에 실린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의 여파에 곤두박질친 것이었다.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나는 그에게 가일수를 할 겨를이 없었다. 낭왕의 깃발이 코앞에 이르러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첫 일합에서 사왕에게 크게 밀린 장왕은 칠팔 장이나 튕겨나갔다. 그토록 강조했건만 ‘최강의 응전’을 까먹은 모양이었다. 비틀거리는 그를 내버려두고 사왕은 내게 쌍장을 겨누었다. 이 또한 예상 밖의 일이었다.
졸지에 낭왕과 사왕의 협공을 받게 된 나는 대번에 궁지에 몰렸다. 사방이 터져있었으나 활로는 전무했다. 전후좌우상하 어디로 피하더라도 낭왕의 깃발에 잡힐 터이고 사왕의 장공에 노출될 것이었다.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닌 한 피해는 불가피했다. 나는 어차피 당할 거라면 내 피해를 최소화하기보다는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는 방향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