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39
제138화 쳐라!
내 목표물은 여전히 사왕이었다.
나는 측면에 낭왕의 깃발을 달고서 사왕에게 짓쳐들었다. 사왕의 입장에서는 내가 스스로 그의 아가리에 대가리를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여겨졌을 터였다. 과연 장왕의 공진에 뒤지지 않는 무지막지한 폭풍이 나를 덥석 집어삼켰다. 어제의 나였다면 즉사는 면하더라도 치명상을 입고 운신불능에 처했을 공산이 크지만 나에겐 장왕과의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이동을 제한하는 흙벽이 없었기에 그 깨달음을 구현할 수 있었다.
사라락.
뭔가 간지러운 소리로 들리겠지만 실상은 사왕의 장공에 걸린 내 우견이 으깨지는 소리였다. 중상이었으나 어깨가 통째로 날아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최상의 선방이었다.
충격으로 인해 몸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나는 중심을 잃기 전에 왼손의 철봉으로 광우를 발출했다. 내가 온전할뿐더러 반격까지 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사왕이 허둥지둥 빛의 폭우에 맞서 방어막을 펼쳤다. 내가 바란 대응이었다.
나는 광환을 쏘아냈다. 진짜 원력을 실은 빛의 고리는 선발대로 나간 빛줄기들을 우회해서는 전신에 균일하게 두른 사왕의 호신강기에 균열을 일으켰다. 나처럼 오른쪽 어깨가 깨진 사왕이 체면불구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한심한 위인 같으니.
망외의 전과를 올렸으나 나는 희희낙락하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암담함의 늪에 빠져들어야 했다. 사왕이 기대와 달리 퇴로를 열어주지 않고 재차 쌍장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맹수의 이빨 같은 낭왕의 깃발은 내 목덜미를 물기 직전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내 숨통을 터 준 이는 장왕이었다. 사왕의 장공에 튕겨나갔던 장왕이 그에게 장공을 퍼부었다. 원거리였지만 무방비 상태로 맞으면 곤란해질 터였기에 사왕은 어쩔 수 없이 좌장(左掌)을 장왕에게 할애해야 했다.
장왕이 반의반 호흡을 벌어준 덕분에 나는 사왕이 부상당한 오른손으로 발한 장공을 가르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왼 허벅지에 깊은 자상(刺傷)을 입었다. 낭왕의 깃발에 당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깃발 끝자락에서 뻗어 나온 강선에 찔린 것이었다.
낭왕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직접적인 공격 범위가 오륙 장에 달했다. 괴(怪)초식들은 예측불가인데다 정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유하자면 장대보다 긴 기형검(奇形劍)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격이었다.
그와 대적하려면 깃발 안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그런 연후 근접전을 펼쳐야 했다. 그런다고 대등한 형세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그러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몰릴 뿐이었다. 내 초절한 신법으로도 낭왕의 변화무쌍한 기공에 대처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사왕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가 적의 조문이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낭왕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사왕에게까지 신경을 써야 했으니 가뜩이나 무력이 달리는 나로서는 난국이 아닐 수 없었다.
우는 소리를 한다고 우스운가?
그렇다면 아직도 나를 모르는 소치이니 반성하시라들.
나는 그저 내가 처한 상황을 알렸을 뿐이었다. 비관적인 국면이었으나 나는 비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배전의 투지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직도 내면에 남아있던 두려움의 찌꺼기를 말끔히 태워버렸다. 이게 진정한 나였다.
문득 내게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십구 년 전, 만민이 주시하는 가운데 장왕과 사왕이 세 번째로 자웅을 결하던 해, 대륙 남동 해안의 후미진 숲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혈전이 벌어졌다. 그 혈전에서 사망한 이는 셋이었다. 하나는 떠버리 아저씨였고 다른 둘은 해귀들이었다. 떠버리 아저씨는 해귀들에게 목숨을 잃었고 해귀들은 당시 일곱 살이던 나에게 목을 따였다.
내게 죽은 두 해귀는 공히 나보다 강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먹잇감이 되었다. 저들이 다수이며 내가 어리다고 방심한 탓이었다.
물론 사왕과 낭왕이 그날의 해귀들처럼 어수룩할 리는 만무했다. 중요한 건 심상(心狀)이 아니라 무력의 격차였다. 두 왕과 나의 격차는 어린 시절의 나와 해귀들 간의 차이보다 크지 않았다. 그날 기적을 일으켰다면 지금 안 될 게 뭐 있는가.
나는 강호에 나온 이래 수많은 격전을 치렀다. 전력의 열세로 인해 고전한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싸움에서 열세를 딛고 끝내 역전승을 일구었다. 어느 누가 나 말고 그런 이적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한두 번은 운이라 치부하더라도 그것이 계속되면 엄연한 실력이라고 보아야 했다. 공력이나 가진 바 무학의 깊이에 더해 ‘실전적 승부감각’도 무력에 포함시켜야 마땅했다. 이 방면으로는 나는 최고였다. 그냥 최고가 아니라 최고 중의 최고였다.
큰소리쳤지만 일거에 전세를 뒤집은 건 아니었다.
여전히 절대불리의 형국이었고 나는 변변한 반격 한 번 못해 보고 명줄을 보존하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위급지경에 처했을 때에도 냉철하게 국면을 분석하며 타개책을 모색했다. 평정심이 전사의 제일덕목이라고 가르친 이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내 머리가 아니라 심혼에 새겨져있었다.
한 치만 삐끗해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난전에서 평정심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은 결코 알 수 없으리라. 말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평정심이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은 꼭 밝혀두고자 한다.
뾰족한 깃발 모서리가 뱀의 혓바닥처럼 늘어나며 내 발목을 감았다.
착시였다. 실제로는 강기의 선이 뻗어 나온 것이었다. 실처럼 깃발에 연결된 것은 아니었기에 강선은 순식간에 소멸될 터였다. 거대한 낫처럼 내 허리를 베어오는 깃발의 날에 대처해야 하는 탓에 자칫 강선을 소홀히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낭왕의 노림수임을 알아차렸다. 급작스러운 변초에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 덕분이었다.
나는 허리를 내주고 왼발을 지켰다. 상하체가 양분되는 것보다는 발목이 잘리는 게 나았지만 어차피 어느 쪽이건 당하면 뒤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절단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허리를 내주는 게 나았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깃발에 쓸려 배가 갈리기는 했으나 호신강기를 두른 덕분에 척추는 무사했다.
그 시점에서 나는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이제 더 미룰 여력이 없었거니와 모험수를 자중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기필코 성공해야 했다. 실패하면, 끝이었다.
* * *
이야기를 잇기 전에 잠시 그 순간까지의 경과를 간략하게 알리고자 한다.
먼저 나는 낭왕의 파상공세에 십사오 초를 버텨냈다. 전신 도처에 크고 작은 외상을 입긴 했으나 전투불능에 처할 정도의 중상은 없었다. 개전 초기에 사왕에게 당한 우견의 부상이 가장 심한 수준이었다.
낭왕은 나를 조기에 처치하지 못해 자존심이 상한 듯 갈수록 광포해졌다. 나로서는 환영이었다. 그가 시종여일 냉정을 유지했다면 승부수를 던질 기회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사왕은 최초의 공방전 이후 나를 낭왕에게 맡겨두고 장왕을 처치하는 데 주력했다. 먼저 성가신 훼방꾼을 없앤 후 낭왕과 합세해 나를 제거하려는 심산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그린 수순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장왕이 의외로 선전한 탓이었다. 비록 약세를 보이기는 했으나 장왕은 십여 초나 버텨냈다. 사왕과 생사투에 임할 시 삼 초를 한계로 잡았던 내 예상이 무색한 선전이었다.
물론 내가 초반에 사왕에게 입혔던 부상과 그 이후로도 계속한 도움이 없었다면 장왕은 진즉 무너졌을 터였다. 나는 사왕이 결정타를 날리려 할 때마다 광환을 쏘아 그를 방해했다. 내가 그라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했을 테지만 사왕은 나와는 다른 부류였다. 그는 장왕의 목숨 값보다 제 팔다리의 가치를 높게 매겼다.
하지만 장왕은 막판에 몰려있었다. 내상을 입었는지 장공의 위력이 확연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그냥 내버려둔다면 다음 공방전에서 필히 이승을 하직하게 될 터였다.
장왕과의 기나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음을 직감한 사왕은 그에게 살초를 날리기 전에 나를 일별했다. 마침 내가 낭왕의 깃발에 걸려 복부가 갈린 시점이었다. 찰나지간 사왕의 눈동자에 청광이 명멸했다. 십중팔구 쾌재를 불렀으리라.
내가 그의 행사에 끼어들지 못하리라 확신한 사왕이 오롯이 장왕에게 집중했다. 내가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나는 사왕이 장공을 발출하기 직전에 그의 등짝에 광참을 날렸다. 초승달 모양의 섬광은 순식간에 공간을 격하고 그의 왼 어깨를 찍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광참은 호신강기에 가로막혀 사왕의 좌견을 몸통에서 분리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견갑에서부터 등허리까지 깊고 기다란 도상(刀傷)을 만들었다. 내 원력이 더 강했더라면 양단도 가능했을 터였다.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처지였는지 꿈에도 모를 장왕이 반사적으로 발출한 장공이 내 일격을 허용하고는 단발마의 비명을 토해낸 사왕을 덮쳤다. 사왕이 괴성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얼핏 저승에 가기 전에 지르는 작별인사로 들렸지만, 엄살이었다. 나와 장왕의 공격에 연타당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테지만 사왕은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양 어깨에 중상을 입었지만 무리하면 장공을 발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전의를 상실했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확실히 하기 위해 쐐기를 박았다.
“쳐라!”
기실 나는 사왕의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비장의 패를 꺼냈다. 내 명령이 떨어지자 땅 속에 매복해있던 비영이 튀어나왔다. 장포와 복면을 벗은 그는 평범한 중년인의 외양이었다.
비영은 그에게서 팔구 장 떨어진 사왕에게 돌진하며 독장을 퍼부었다. 난데없는 녹색 해일에 대경실색한 사왕은 반대편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 * *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위기가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대상을 나로 한정한다면 오히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사왕에게 전력을 쏟아낸 대가로, 다시 말해 한 눈을 판 대가로 나는 낭왕의 직격을 감내해야 했다. 카라랑.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그의 깃발이 도끼처럼 내 정수리를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초극의 절(折)로써 가까스로 두부가 쪼개지는 참사는 모면했으나 등판을 내주고 말았다. 왼 목 바로 옆에서부터 배꼽 아래까지 갈라졌다. 사타구니까지 내려갔다면 그대로 두 조각이 났을 터였다. 그나마 천근추로 몸을 순간 낙하시킨 덕분에 양단의 참사는 모면했다.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낭왕의 깃발이 내 등에 닿을 찰나 나는 그의 우안을 겨냥해 광환을 쏘아냈다. 내가 한 번도 반격을 가하지 않아 방어를 소홀히 하고 호신강기도 가볍게 두르고 있던 낭왕은 내 암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의 우안(右眼)이 터져나갔다.
눈을 잃고 분기탱천한 낭왕이 보복하기 전에 나는 광폭을 날렸다. 단숨에 낭왕에게 이른 빛줄기가 폭발했다. 그러나 그새 호신강기를 두텁게 한 낭왕의 몸뚱이를 박살내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충격을 받은 낭왕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지체가 나를 살렸다. 일단은.
사왕이 도주하자 비영이 낭왕에게 달려들었다. 사전에 ‘곤룡포를 걸친 자’와 ‘깃발을 든 자’가 목표물임을 주지시킨 탓이었다. 이모와 비슷한 수준의 이해력을 가진 비영은 이 정도의 간단한 명은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 리 없는 비영은 거침없이 독장을 뿜어내며 낭왕에게 덤볐다. 아직 신형을 추스르지도 못한 낭왕이 사납게 깃대를 휘둘렀다. 차라랑. 쇠사슬을 철판에 내리치는 기음과 함께 채찍 같은 깃발이 비영을 휘감았다. 그가 깃발을 회수하자 비영은 가슴을 기준으로 양분되었다. 마왕의 철삭에 두 동강 났던 이모의 모습과 흡사했다.
일수에 초절정 극상 이상의 무력을 지닌 비영을 끝장 낸 낭왕이 내게 깃대를 겨누었다. 나는 옴짝달싹 못했다. 움직이는 순간 간신히 동체에 붙어있는 좌반신(左半身)이 떨어져나갈 터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