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4
제13화 아직 살아 있소?
십전무객은 무왕(武王) 견사휘의 예전 별호였다.
그는 아버지의 우상이자 아버지가 나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종용한 대상이기도 했다. 무왕을 화제 삼기 싫어 나는 이야기를 진척시켰다.
“그래서 성공했소?”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다.
“그럴 리가요. 신필주의 야심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어요. 물론 그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어요. 나름 성과도 상당했고요. 딸이 열여덟 살에 접어들 무렵 십전무객과의 은밀한 만남을 성사시키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십전무객은 미모가 최고조에 이른 부용 아씨에게 일 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어요.
십 년 가까이 공들였던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자 신필주는 심히 낙담했어요. 하지만 이내 마음을 추슬렀어요. 비록 십전무객을 잡지는 못했지만 부용 아씨의 미모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꿩 대신 닭이라고 십전무객 말고 오대세가의 후계자들 중 하나를 꼬여 사위로 만들 작심이었죠. 기실 그 정도만 해도 한낱 흑문 출신의 여자가 성취하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였어요.
신필주는 서둘렀어요. 후보자들 중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이는 둘 밖에 없었는데 어떻게든 부용 아씨를 정실로 들이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했어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달이 나버렸거든요.”
짐작이 가고도 남았으나 나는 짓궂게 물었다.
“무슨 사달이었소?”
“딸이 덜컥 임신을 한 것이었죠.”
“……!”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궁금하던 참이었다. 대체 진청운은 어떻게 부용 아씨와 연분을 맺게 되었을까.
야릇한 내용이 나올 터임에도 진소월의 음성은 담담했다.
“신필주의 입장에서 만사를 그르치게 만든 원흉은 바로 그의 딸 옆에 있었어요.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거죠.”
“그렇게 어설픈 위인이었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만큼?”
진소월이 쓰게 웃었다.
“신필주는 그의 장중보옥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녀를 돌볼 이를 고르는데 신중을 기했어요. 그가 선택한 이는 내 아버지였어요. 신필주는 그의 심복이었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신뢰했어요.
기실 그가 딸을 꽁꽁 감춰둘 황당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도 내 아버지를 믿었기 때문이었어요. 지모와 수완이 대단한 데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기에 아버지가 인세에 드문 충직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었던 거죠. 아버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퇴기의 사생아였던 당신을 거둬주고 키워준 은인을 배신할 인물이 아니었어요.
신필주의 기대에 부응해 아버지는 충심을 다해 어린 주인을 돌보았어요. 이곳에서 지내는데 아무 불편이 없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지요. 아버지 덕분에 그녀는 유배 생활의 외로움과 지루함을 견딜 수 있었어요. 둘은 열두 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서로에게 최고의 벗이 되었어요. 마치 사이좋은 오누이 같았죠.”
나는 고약한 감상을 뱉어내려다 자중했다.
“그러다 그 일이 생겼어요. 십전무객을 잡는 데 실패한 것 말이에요. 낙담한 이는 신필주만이 아니었어요. 존재이유나 마찬가지였던 ‘정파제일인 부인되기’가 무위로 돌아가자 그의 딸 또한 절망하고 분노했어요. 잽싸게 눈높이를 낮춰 오대세가의 후계자들을 십전무객의 대체자로 물색하기 시작한 신필주와 달리 그녀는 쉬이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어요. 때로는 자신을 거부한 십전무객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발광하기도 했다는 군요.
내 아버지는 광기에 젖은 그녀를 달래느라 안간힘을 썼어요. 아무리 그녀가 패악을 부려도 받아주고 보듬어주었대요.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변고가 발생했어요. 스스로 음약을 복용한 그녀가 아버지를 유혹한 거예요. 그녀를 뿌리치면 혈맥이 터져 죽을 상황이었기에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그녀와 교합해야 했어요.”
“…….”
진소월이 한참이나 말을 잇지 않았기에 나는 다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소?”
“아버지는 죽을 각오를 하고 신필주에게 그날의 사건을 솔직히 고했어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신필주는 당연히 노발대발했죠. 호위를 불러 아버지의 머리통을 부숴버리려던 신필주는 생각을 바꿨어요. 이미 쏟아진 물은 어쩔 수 없지만 성질이 난다고 병마저 깨뜨리면 손해가 더 커진다고 여긴 거죠.
기실 그는 아버지의 재주가 아까웠던 거예요. 그런 성품에 그 정도의 재주를 지닌 이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더라도 아버지를 그냥 용서해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오른 발목 힘줄을 자르고 왼 팔을 불구로 만든 후 광산에서의 십 년 노역을 명했어요. 아버지는 그 처분을 달게 받았어요.”
내 아버지를 빼닮은 데다 똑같은 장애를 갖고 있던 신필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실로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한편 신필주는 난감한 처지에 처했어요. 한 번의 결합으로 ‘부용 아씨’가 아이를 잉태했기 때문에요. 태아를 지우려던 신필주는 그러다 자기 딸에게 이상이 생길까 봐 다른 대안을 모색했어요.”
진소월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제 떠버리 아저씨가 등장할 차례였다.
* * *
신필주는 세인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여럿 쥐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학림수호령의 존재였다.
학림수호령은 무림사의 초창기에 무인들에 의한 학살을 경험했던 학사들의 자구책이었다. 무도한 무인들의 횡포로부터 문사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양성된 학림의 수호자들은 한때 천하의 패권을 두고 무림의 강대세력들과 경쟁할 만큼 위세를 떨쳤었다. 그러나 무인들의 집중 견제와 탄압으로 쇠퇴 과정을 밟았고 종내에는 소멸되고 말았다.
세상에는 멸절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살아남은 수호령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존전략을 수립했다. 무림에 노출되지 않도록 소수의 기재들만 엄선해 학림이 연구해 온 비공(秘功)을 전하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소수는 극소수가 되었고 어느 시점부터는 일맥전승으로 바뀌었다.
수가 줄어든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세심한 선별과 집중을 통해 초절정의 무위에 도달한 고수를 연이어 배출했기 때문이었다. 태생적인 이유로 공개적인 강호활동을 자제했지만 학림수호령은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들로부터 매 시대 천하십대고수에 꼽힐 만한 강자로 평가받곤 했다.
* * *
진소월이 비사를 들려주었다.
“실은 원래 계획엔 없던 일이었어요. 신필주는 전대의 학림수호령과 친분이 있었어요. 이십 년 전 어느 날 예고 없이 오연객잔을 찾은 수호령이 그에게 뜻밖의 부탁을 했대요. 심산유곡에서 무공만 수련하며 보낸 자신의 후인이 바깥세상의 실상을 알 때까지 그를 돌봐달라는 것이었죠.”
나는 이해난망이었다.
“그런 강자가 뭐가 아쉬워서?”
“급작스러운 발병 때문이었어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는 유일한 친인이라 할 신필주에게 후사를 맡기려 했던 거예요. 그의 후인은 약간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물론 당시 신필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나는 속이 쓰렸다. 떠버리 아저씨에겐 ‘약간’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수준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두 개나.
“신필주는 수호령의 청을 흔쾌히 수락했어요. 그로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죠. 더욱이 시기적으로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어요. 신필주는 수호령의 후인을 딸의 짝으로 삼을 요량이었어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거든요. 하나는 그이가 너무도 순진한 청년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차 무림 십대고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한 잠룡이라는 것이었죠. 신필주에게 있어 세상 물정을 책으로만 익힌 이를 속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어요.”
일순지간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뱃속에서 불덩이 같은 분기가 치솟은 것이었다.
내 심정을 헤아렸는지 진소월의 음성이 조심스러워졌다.
“신필주가 그이를 꼬인 과정을 시시콜콜히 늘어놓지는 않을 게요. 부용 아씨는 그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부친의 설득과 강요에 못 이겨 그를 홀렸어요. 그러고는 그와 동침했죠. 아무리 순진한 이라도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아이는 칠삭둥이였어요. 적어도 그이는 그렇게 믿었죠. 그이는 모녀를 극진히 돌보았어요. 단 한 번의 합일 이후론 그에게 몸도 마음도 내주지 않았던 아내였지만 온 정성을 다해 왕후처럼 받들었죠. 딸에겐 말할 것도 없고요. 아까 말했듯 그이의 목소리는 지금껏 내가 들어본 어떤 음성보다도 다정다감했어요. 그이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침묵했다. 떠버리 아저씨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맙게도 진소월은 답을 채근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이의 약점은 금방 드러났어요. 어느 날 그이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다고 신필주가 요청한 것이 계기였죠. 그이가 펼치는 도공을 본 신필주는 칼에 공력을 담아 제대로 해보라고 요구했어요. 그이는 난색을 표했죠. 그러고는 고백했어요. 자신이 내공을 축적하기 어려운 신체임을. 소위 ‘새는 단전’의 소유자였죠. 그런데 그이에겐 그 못지않은 문제가 있었어요. 뭔지 알 테죠?”
“……그렇소.”
아저씨는 타고난 새가슴이었다.
“신필주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머지않은 장래에 청룡이 될 거라 기대했던 사위가 이무기가 될 자질도 없음이 판명되었으니 그럴 만했죠. 어찌어찌 단전에 난 금을 때워 약점을 보강한다고 하더라도 그이에겐 희망이 없었어요. 무위가 상승한들 무용지물이었죠. 하급무사와 비무만 해도 얼어버리는 데 어떻게 실전에 쓸 수 있겠어요? 그이는 당대의 수호령이 선택했을 만큼 출중한 기재였지만 무인지로에 들기엔 적합하지 않은 성정이었어요.”
진소월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떠버리 아저씨는 맹수들의 세계에서 노닐기엔 너무 순하고 심약한 이였다.
“기대를 접은 신필주는 그이를 노골적으로 박대했어요. 그의 딸도 마찬가지였죠. 아니, 더 심했어요. 쌀만 축내는 버러지라며 그이에게 모욕을 주기 일쑤였죠. 그러다 그들은 결국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어요.”
“아저씨를 전장에 보낸 게 그들 부녀였단 말이오?”
“그래요. 아까도 말했듯이 신필주는 철저히 계산적인 인물이에요. 그이를 그냥 내쫓는 건 안 될 일이었어요. 그래서 그이를 정맹에 용병으로 팔아버렸어요. 도법을 현시하면 일류무사로 분류될 테고, 최전선에 지원하면 상당한 보상금이 나오니까요.”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터였다. 그 악독한 늙은이는 떠버리 아저씨가 전쟁터에서 사망하리라 확신했음에 틀림없었다.
“신필주는 그이에게 이 산장에서의 일이나 ‘부용 아씨’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입막음을 했대요. 하지만 듣지 않은 모양이네요. 전 공자가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내가 불쑥 물었다.
“당신 외조부는 아직 살아 있소?”
내 목소리가 생경했다. 분노로 인해 떨려나왔기 때문이었다.
진소월이 습관처럼 쓴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를 외조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용 아씨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연유가 궁금했지만 내 질문의 답을 듣는 게 우선이었다. 기실 나는 불안했다. 환갑에 이르러 여식을 얻었다면 신필주는 현재 일백세에 육박할 터였다. 내가고수라면 모를까 범인이 그 나이까지 장수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진소월의 입술에서 내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는 답변이 흘러나왔다.
“어쨌거나 그는 살아있어요, 단순히 명줄이 붙어있는 정도를 넘어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죠.”
나는 귀가 번쩍 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