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41
제140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독의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주시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입씨름을 중단하고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모두의 눈에 예외 없이 기광이 일었다. 신비한 회복과정을 목도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지가 흐려진 장왕마저도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내 상처부위에는 시간이 백배쯤 빠르게 흘렀다. 이를 테면 꽃이 피는 광경을 단번에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구경거리가 된 듯해 불쾌했으나 나는 노인들이 내 몸이 현시하는 이적을 감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독의는 보지 말란다고 안 볼 위인이 아니고, 장왕과 광객은 봐도 상관이 없었으며, 소면통달은 이미 알고 있으니 막을 까닭이 없었다. 쌍둥이 남매의 경우는 형평성의 원칙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들만 못 보게 하면 서운해 할 터였다.
그나저나 굉장한 전상(戰傷)이었다.
부상에는 이골이 난 나였지만 강호에 나온 이래 당한 최악의 중상이라 할 만 했다. 마왕에게 당한 것보다 더 심했다. 단순히 동체가 거의 반으로 쪼개진 데 그치지 않고 절단면 주변의 내장이며 근골들이 모조리 파괴됐기에 명줄이 붙어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나마 심장과 단전, 즉 내단을 빗겨났기에 목숨과 원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건 운이 아니었다. 아무려면 그렇겠는가. 내 생존과 무력보전은 낭왕의 깃발이 정수리를 찍어올 때 최선의 대응을 한 덕분이었다. 비록 피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두 군데 급소는 지켜냈다. 나를 모르는 이들이 보면 아주 아슬아슬했다고 여길 터이나 나 자신은 성공을 확신했다. 이는 생사의 경계에 처했을 때도 흔들림 없는 평정심을 견지할 수 있는 이만이 해낼 수 있는 신기였다. 천하에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타고난 강심장에 더해 수십 차례의 사투에서 갈고 닦은 비기이니 타인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리라. 이 방면에서 나는 단순히 걸출한 수준을 넘어 독보적 대가였다.
뭐, 아님 말고.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을 성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보는 눈들을 의식한 나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신색을 유지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몸이 봉합되자 상체를 일으키며 좌정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면상을 찌그러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초극의 인내력을 갖고 있어도 돌이나 나무토막이 아닌 이상 생명체의 본성이 드러나는 걸 막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신음성은 끝까지 참아냈다.
간신히 자세를 갖추고 가부좌를 튼 나는 운공에 들기 전에 정리를 했다.
“이제 더 볼 것도 없으니 가서 당신 일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독의가 응답하려는 찰나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있던 장왕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소면통달을 위시한 삼대호법이 돌부리에 걸려 엎어진 삼대독자 돌보듯 법석을 떨었다. 그들은 떼쓰는 아이처럼 징징거리는 장왕을 보다 편안한 장소에 데려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으나 독의를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난감해 했다. 뜻밖에도 독의가 그들의 곤경을 해소해주었다.
“오늘 일은 기억해두겠다.”
원독이 서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뒤끝을 보인 독의가 어느 샌가 움직임을 멈춘 비영의 사체 두 조각을 챙겨 장내를 벗어나자 소면통달 등은 노골적으로 반색했다. 하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어르신들도 그만 가보시지요. 저는 여기서 얼마간 운공에 들겠습니다.”
장왕을 달래고 있던 소면통달이 얼른 대꾸했다.
“그래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소. 정말 수고 많았소, 전왕.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쌍둥이가 소면통달의 뒷말을 복창했다. 그러자 장왕이 그들의 말을 따라했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장왕이 죽상을 그렸던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 * *
눈을 뜨자 주황색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노을이 깔린 하늘로 시선을 올리며 내 곁에 장승처럼 우뚝 선 광객에게 물었다.
“제가 얼마 동안 운공에 들었는지요, 어르신.”
“세 시진 쯤 경과했을 걸세. 아까 유시(酉時)를 알리는 종이 울렸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흘이나 나흘이라는 답변을 들으리라 예상했는데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니.
일어서느라 쩔쩔매는 나를 부축하며 광객이 이제는 익숙한 질문을 던졌다.
“괜찮은가, 은공?”
“물론입니다, 어르신.”
“허어, 자네는 진짜 불사신 같구먼.”
불사신이라. 흠, 귀에 쩍 달라붙는 게 전왕보다 낫군. 이걸 별호로 삼을까? 나중에 무황이 되더라도 여인네의 귀고리처럼 쌍으로 어울릴 것 같은데.
기립하긴 했으나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자 광객이 얼른 나를 잡았다.
“괜찮은가, 은공?”
반복은 질색이었으나 같은 대답을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어르신.”
나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돌을 갓 지난 아이의 걸음마처럼 위태로웠으나 쓰러지지 않고 십 보를 나아갔다. 경신을 발하는 건 무리였기에 나는 걸어서 명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보행하는 동안 운신이 차츰 원활해질 터였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발을 멈추었다.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나를 멈춰 세운 건 광객의 옷자락 끝에 삐죽 튀어나온 붉은 첩지였다.
“그건…….”
“아! 깜박했네 그려. 미시 초에 소면통달이 갖고 와서는 자네가 깨거들랑 주라고 했다네.”
나는 광객이 품에서 꺼내 건네준 첩지를 폈다. 낯익은 글씨가 직사각형의 비단종이 위에 깨알처럼 박혀있었다.
* * *
첩지는 사흘 전 내가 명교로 귀환하자마자 소면통달을 통해 나현에게 보냈던 서신에 대한 답신이었다. 손으로 덮으면 가려질 작은 종이엔 내가 요구했던 정보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내가 최우선적으로 조사할 것을 부탁했던 낭왕에 관한 내용이 첫머리를 장식했다. 첩지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꽤 방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백지나 다름없었다. 이는 나현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사벌이 그만큼 은밀하게 이번 일을 추진했다는 방증이었다.
아마도 낭왕은 수하들을 거느리지 않고 단독으로 중원 행에 나선 후 사벌에 들지 않고 모처에 대기했을 터였다. 그러니 나현으로서도 그의 동향을 포착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내가 세 번이나 아무도 모르게 정맹에 들었던 것처럼 절대지경의 고수가 작심하고 잠입을 도모하면 제아무리 촘촘한 그물이라도 잡아내기 어려운 법이었다.
장왕에 관해서는 예상대로였다. 발광의 목격자들이 너무 많은데다 벌써 열흘 이상 지났으니 그의 이상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나현이 알 정도면 그 이상의 정보력을 가진 사벌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독의와 관련한 보고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나는 그가 나현 같은 상운의 문통과 접촉해 독왕의 사망 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리라 보았다. 그런데 첩지에 따르면 독의는 엉뚱하게도 정맹에서 목격되었다. 그의 친정이나 다름없는 사벌도 아니고 정맹이라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첩지의 끝부분은 무왕의 행방에 관한 것이었다. 나로서는 낭왕의 동향 못지않은 관심사였다.
달랑 두 줄이었으나 그 열 배에 달하는 낭왕에 관한 보고보다 훨씬 실속이 있었다. 첩지에서 무왕의 소재를 확인한 나는 비로소 낭왕과 사왕의 대화에서 석연치 않았던 부분을 이해했다.
그들은 무왕이 사천 리 밖에 있다고 떠들었다. 납득하기 어려웠다. 정맹은 명교에서 직선거리로 사천구백 리 떨어져 있으니 사천 리가 아니라 오천 리라고 하는 게 타당했다. 단순한 말실수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그들에게 따져 물을 상황이 아닌지라 그냥 넘어갔으나 내심 찜찜했다.
첩지는 내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말실수가 아니었다. 무왕은 명교가 자리한 은천에서 정확히 삼천팔백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니 오천 리가 아니라 사천 리가 맞았다.
아무튼 무왕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 나는 독의가 정보를 캐기 위해 정맹을 찾은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충격을 받았다. 대체 무왕은 거기엔 왜 갔을까.
* * *
빠르게 첩지를 훑은 나는 대충 품에 쑤셔 넣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삼 보 만에 멈춰서야 했다. 이번에 나를 잡은 건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북소리였다.
둥, 둥, 둥, 둥…….
고성의 의미를 모르는 광객이 내가 별안간 심각해지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가, 은공?”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어르신.”
“누가 온단 말인가?”
그때 들판의 동편에 점 하나가 나타났다. 점은 점점 커지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저이는 소면통달이 아닌가?”
들판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려온 소면통달이 숨도 고르지 않고 다급한 음성을 토해냈다.
“이걸 어쩌오, 전왕?”
이미 상황판단을 마친 나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어쩌긴요. 잘 대처해야지요.”
꽁꽁 얼어붙었던 소면통달의 낯짝이 봄 눈 녹듯 풀렸다.
“아! 벌써 회복한 모양이구려. 다행이오. 정말 다행이오. 교주가 나서기 힘든 상태인지라 심히 걱정했다오. 말하기도 민망하나 너무 아프다며 세 시진 내내 어리광만 부리고 있소. 내상이 생각보다 중한 듯하오. 연신 토혈을 하는구려. 헌데 교주 없이 홀로 적을 상대할 수 있겠소?”
광객이 대답을 대신했다.
“적이 누군지는 모르나 은공도 지금 싸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오, 소면통달. 방금 운공을 마쳤거니와 아직 걷는 것조차 버거워하는데.”
기껏 풀렸던 소면통달의 표정이 도로 굳었다.
“아아, 큰일이로다.”
광객이 내게로 눈을 돌렸다.
“대관절 누가 온단 말인가, 은공?”
둘 중 하나였다. 마왕, 아니면 무왕.
사왕이나 낭왕 중 한 명이 하다 만 싸움을 마무리 짓기 위해 전장으로 돌아올 확률은 전무에 가까웠다. 사왕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위인이고 낭왕도 그럴 성싶지 않았다. 가볍지 않은 내-외상을 입은 데다 이쪽에 초절정 극상의 고수가 다섯이나 있음을 알았으니 아무리 싸움닭의 성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시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할 터였다. 더욱이 장왕이 결전에 임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 턱이 없으니 나에 필적하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되돌아올 가능성은 일 푼에도 미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나는 십중팔구 무왕이리라 추측했다. 그의 행선지를 감안하건대 명교를 떠난 게 시급을 다투는 중대 사안 때문임은 아닐 터였다. 그가 거기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소일할 리는 만무하니 시간상으로 볼 때 지금쯤 명교로 돌아오는 중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
다만 나는 무왕의 행로가 출발점에서 따지면 동북 방면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적들의 침공에 대비해 급하게 깔아놓은 감시망은 서편에 치우쳐있었다. 무왕이 나현의 첩지에 나온 ‘그곳’에서 출발해 곧장 이곳으로 향했다면 그 경계선을 통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했다.
하여 나는 북소리를 일으킨 주인공이 마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라면 소면통달의 말마따나 큰일이었다.
마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일시에 내 심상을 장악한 공포를 애써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목소리는 떨려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무왕 어르신일 듯싶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아닐 경우에 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최소 한 시진의 여유가 있으니 그 동안 장왕 어르신을 준비시켜주십시오. 저도…….”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소면통달이 난색을 표했다.
“교주는 어려울 것 같소, 전왕.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구려. 교주는 해가 지면 어린아이가 아니라 숫제 천치가 되오. 도통 말이 통하지 않소. 미안하오. 면목이 없소.”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소면통달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대책이 있소?”
나는 선뜻 답을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