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44
제143화 그리 돼도 나를 연인으로 여길 테요?
무왕은 구세원에서 동거하자는 내 권고를 물리쳤다.
소면통달을 찾아 그의 처소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한 후 나는 홀로 구세원으로 향했다. 밖에 등을 내걸지 않아 명교에서는 드물게 번듯한 외관을 자랑하는 단층 석조건물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약재 냄새가 진동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거북스러웠다. 친인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명교 상부(商府)에 한 자리를 얻은 진청운은 구세원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강태수와 이광은 수련을 하러 그들에게 배정된 연무장에 간 모양이었다. 광객은 행방이 묘연했다. 좋아하는 술을 마시러 저자에 나갔을까?
기척을 들은 독의가 내가 기거하는 석실로 왔다. 아직도 낮의 내 처사에 대한 불만이 면상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정말 그러긴가?”
“뭘 말이오?”
“몰라서 묻는 겐가?”
“알면 왜 묻겠소?”
“…….”
“할 말 없으면 가 보쇼. 바쁘니까.”
“나는 자네에게 진심으로 대했네. 혹시라도 내 진의를 곡해할까 봐 속을 다 뒤집어 보이고, 내가 자식처럼 여기던 보물도 아낌없이 내 주었네. 게다가 나는 자네 연인의 생명을 연장해 줄 의원이 아닌가. 그런 나에게 이런 푸대접은 온당치 않네.”
일리 있는 항의였다. 하지만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요? 엎드려 절이라도 할까?”
“둘 중 하나라도 들어주게. 독왕 어르신의 시신을 내주던가, 아니면 자네 피를 뽑게 해주던가.”
“이미 끝난 얘기요. 같은 소리 되풀이하는 건 질색이니까 다시는 꺼내지 마쇼. 다른 용건 없으면 그만 가 보쇼.”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독의가 나에게 쫓겨날 위험을 감지하고는 안구에 준 힘을 풀었다.
“독(毒)강시의 사체는 언제쯤 받을 수 있겠는가?”
나는 독의의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부라렸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아무리 적게 잡아도 보름은 걸릴 거요. 그 두 배가 소요될 수도 있고. 어쨌든 올해가 가기 전에는 ‘이모’의 몸을 견식하게 될 거요.”
“최대한 빨리 볼 수 있도록 신경 써주게.”
“알겠으니까 나가 보쇼.”
세 번째 축객령임에도 독의는 몸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더 들어왔다.
“또 뭐요?”
“인사할 기회를 주겠네.”
“무슨 소리요?”
“하루라도 빨리 독왕 어르신의 옥체를 뵙기 위해 지금부터 전력을 쏟을 참일세. 괴선이든 자네 연인이든 당분간은 보기 힘들 걸세. 어쩌면 해를 넘길 지도 모르네. 집중 치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그들을 깨울 참이니 가서 만나보게. 하지만 오래는 안 되네. 면담 시간은 반각으로 제한하겠네.”
나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나로서는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독의가 괴선의 전신에 꽂힌 수백 개의 대침들 중 몇 개를 뽑았다. 정신을 차린 괴선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난리를 쳤다.
“끄어어억! 아파 뒈지겠다, 이 변태야. 몇 번이나 혀를 깨물려다 참았다. 분명 일부러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일 테지? 선력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너도 한 번 당해봐라, 이 원수야. 뭐 하냐, 이놈. 저 기생오라비 같은 작자 잡아서 나처럼 고슴도치 꼴을 만들어주지 않고. 대침이든 대못이든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무자비하게 찔러 넣어라.”
나는 의아했다.
“의식이 있었단 말이오?”
“당연하지 이놈아. 차라리 혼절이라도 했으면 욕이라도 안 하지. 약이랍시고 내 입에 처넣는 건 얼마나 독한지 아느냐? 내장이 문드러지다 못해 썩어버릴 지경이다. 흰소리 그만 하고 어서 저 화상이나 때려잡아라, 이놈아. 그리고 송곳을 한 이백 개쯤 갖고 와서 급소고 나발이고 닥치는 대로 쑤셔 박아라.”
나는 독의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깨어있는 상태요?”
독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괴선과 경우가 다르네. 괴선은 한시도 정신 줄을 놓아서는 안 되네. 처음부터 이점을 주지시켰고 그는 보다시피 충실하게 내 처방을 이행하고 있다네.”
괴선이 독의가 재미삼아 안 줘도 되는 고통을 가하고 있다며 그에게 ‘쌍’으로 시작하는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독의는 그를 비웃었다.
“그렇게 의심스럽거들랑 당장 집어치우면 될 거 아니오, 괴선? 당신이 원하면 원력복원대법을 중단하리다. 솔직히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이게 얼마나 힘들고 고된 처치인 줄 아시오?”
괴선이 소심하게 항변했다.
“그러기에 누가 남의 선력을 빼앗으래? 여태 고생한 게 억울해서라도 끝까지 가야겠다, 이 악랄한 작자야.”
독의의 눈알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러면 군소리 집어치워. 앞으로 또 내 치료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구시렁거리면 진짜 고통이 뭔지 알려주지.”
가엽게도 괴선은 독의의 협박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나는 괴선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노인네를 괴롭히면 당신 대가리를 부숴주지.”
독의는 내 유치한 엄포에 콧방귀를 꼈다.
“흥, 그러던가. 반의반각 남았네.”
비릿한 조소를 남기고 독의가 석실을 나갔다. 나는 그를 쫓아가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독의가 사라지자 괴선이 기가 살았다.
“노인네라니? 나를 두고 한 소리냐, 이놈?”
“아, 제길. 만만한 게 나요?”
“어럽쇼, 이놈 보게? 잘 하면 한 대 치겠네 그려. 그래, 어디 한 번 쳐 봐라, 이놈아.”
“됐소. 손만 들어도 놀라서 기절할 거면서. 그나저나 왜 그리 엄살이 심하오? 꼬맹이라도 있었으면 창피해서 어쩔 뻔했소?”
“엄살? 하아, 미치고 팔딱 뛰겠구나. 이게 엄살이면 네놈은 옥면동자다.”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는, 이놈아. 개소리하지 말라는 소리지.”
“이런, 젠장.”
“젠장? 보자보자 하니까 이놈이 아까부터 대놓고 욕질이네? 좀 컸다 이거지? 오냐, 이놈. 어디…….”
“아, 그쯤 하쇼. 누워있는 동안 주구장창 속으로 말꼬리 잡는 연습만 했소?”
“그래, 이놈아. 그렇다면 어쩔 테냐?”
나는 괴선과의 ‘쓸데없는’ 입씨름이 정겹고 흥겨웠다. 그에겐 무슨 말을 들어도 거슬리지 않았고 어떤 말도 내키는 대로 내뱉을 수 있었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래 최초로 사귄 벗이거니와 가장 편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소, 노인장.”
괴선은 내 음성이 진지해졌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무슨 시간?”
“좀 전에 독의가 반의반 각이라고 했잖소? 그러니 내 말을 끊지 말고 그냥 들어주시오. 얼마 전 독왕 어르신이 돌아가셨소. 독의는 그분의 유체를 연구하고 싶어 하오. 나는 그가 노인장의 선력을 완전히 복원하고 망가진 힘줄을 원상회복 시킨다는 조건으로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소. 하여 그는 이제부터 노인장의 치료에 전력을 다할 게요. 짐작컨대 원래 그가 예정했던 기간보다 훨씬 단축할 듯싶소. 힘들겠지만 그날까지 잘 버티길 바라오.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요. 조만간!”
잠시 기다렸지만 괴선은 대꾸가 없었다. 얼마나 벅찰까. 나는 흐뭇했다.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소? 감동 받았소?”
“감동은 이놈아.”
“그러면 뭐요?”
“그렇게 안달복달하지마라, 이놈아. 네놈이 설치지 않아도 될 일은 되고, 네놈이 설쳐도 안 될 일은 안 되는 법이다. 그러니 매사 순리에 따라…….”
“아, 제길. 잘 해줘도 잔소리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엄살 부리지 말고 어서 낫기나 하쇼.”
“엄살이 아니래도 그러네, 이놈이.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아프거나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게 정상인 게야. 그런 게 순리란 말이다, 이놈아.”
괴선의 주장에 반박하려는 데 소리도 없이 석실에 들어온 독의가 방해했다.
“시간 됐네, 전왕. 나는 여기서 괴선을 처치해야 하니 그 아이에게 가 보게. 반각쯤 지나면 저절로 혼절할 걸세. 그러면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나가게나. 도중에도 그 아이의 손을 잡거나 뺨을 어루만지거나 하지는 말게. 말만 나눠야 하네. 참! 막 깨서 정신이 몽롱할 수도 있네. 자, 서두르게나. 정인과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러면 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아 아까운 시간을 잡아먹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시간이 아까운지라 나는 쫓기듯 지하 석실로 내려갔다.
석실 문을 열자 지독한 악취가 엄습했다. 코는 물론이고 폐까지 도려내고 싶을 정도였다. 진소월은 그 악취 한 가운데 누워있었다. 멍한 눈을 뜨고서.
그녀의 모습은 사흘 전과 대동소이했다. 달라진 점은 입에 꽂혀있던 깔때기가 없어진 것뿐이었다. 전신에 멍이 든 것처럼 푸르뎅뎅했고 그 아름답던 얼굴은 문둥이의 낯짝처럼 뭉개져있었다. 설마 이 상태로 연명하는 건 아닐 테지?
만약 그렇다면 어찌 될까. 나는 그래도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은 내심에 나는 씁쓸했다. 그러고는 내가 나 자신을 기만해왔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 동안 내가 반한 건 진소월의 미모가 아니라 그녀의 지모라고 믿어왔다. 절반만 사실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보석처럼 빛나는 영민함의 소유자일지라도 저런 몰골이었으면 애초에 연심이 싹 틀 수 있었을까.
나도 여느 사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중요한 건 껍질이 아니라 본성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껍질에 끌리지 않고서도 마음을 줄 수 있을까.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한편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진소월은 어떨까. 유감스럽지만 그녀가 내 외관에 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다. 그렇다면 그녀를 매혹시킨 건 내 성격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 가능성 역시 희박했다.
이리저리 포장해도 까놓고 보면 결국 내 능력, 보다 정확하게는 무력이 답이었다. 첫 만남 때 강태수를 압도함으로써 내가 강한 사내임을 과시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거들떠보기는 했을까. 그 이후 태극검문의 단천검을 꺾음으로써 실제로는 훨씬 상위의 강자임을 입증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푹 빠졌을까.
나는 석대로 다가가며 진소월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무력을 상실하면 어쩔 거요, 소월? 그리 돼도 나를 연인으로 여길 테요?’
물론 입 밖으로 꺼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진소월이 좋아하는 인사를 했다.
“내가 왔소, 소월.”
좁쌀만 한 구더기가 끓고 있던 짓무른 눈에서 파란 안광이 분출되었다.
그러나 진소월의 동공엔 초점이 맺혀있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었으나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다행히 청력엔 이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전 가가?”
“그렇소. 좀 어떻소?”
“어지러워요. 그런데 감각이 없어요. 머리만 남고 몸이 사라진 것 같아요. 전 가가 목소리도 아득하게 들려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차라리 다행이었다.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진소월은 큰 충격을 받았을 터였다. 그러고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을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소. 아니, 만사가 순조롭게 풀리고 있소. 독의 말로는 경과가 썩 좋다고 합디다. 곧 팔팔해져서 나와 입맞춤을 할 수……있을 거요.”
무심코 내뱉었다가 분홍빛 입술이 뭉개진 자리에 들어선 시커먼 구멍에 시선이 간 나는 간신히 말을 마쳤다. 속이 쓰렸다.
내 속을 읽은 듯 진소월이 화제를 돌렸다.
“독왕 어르신은 모셔왔나요?”
“그 어른은 보름 전 타계하셨소.”
“아! 그럼 그분 유체는 어쨌나요?”
“…….”
“독왕 어르신의 시신은 어디에 두었나요?”
나는 진소월의 거듭된 질문에 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다시 오겠소, 소월.”
석실을 나온 나는 일층으로 올라갔다. 기감을 끌어올려 독의의 소재를 파악했다. 그는 아직 괴선의 방에 있었다. 그리로 간 나는 다짜고짜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