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46
제145화 노인장 말이 맞소
독의는 독왕의 시신을 손에 넣었다는 보고를 받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교를 떠난 후 잠적할 것이었다.
단순히 몸을 숨기는 데 그치지 않고 가기 전에 필히 친인들에게 해코지를 하려 들 터였다. 살아온 행적을 보건대 그는 백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하루 열두 시진 내내 그를 감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그가 작심하고 패악을 저지르려 하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보물’이 그의 수중에 들지 못하도록 예방조치를 취해야 했다.
기실 무영을 절곡에 남겨둔 것도 독의를 염두에 둔 처사였다. 독의는 그가 바라마지 않는 보물이 그런 오지에 들어있음을 꿈에도 모를 터였다.
하지만 점박이 노인을 통해 독의가 진소월에게서 나에 관한 모든 정보를 캐냈음을 알게 된 후 사정이 변했다. 절곡은 내가 독왕의 시신을 명교에 들고 오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가 일순위로 떠올릴 보물의 소재였다. 무영에겐 혹시 외인이 올지 모르니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도록 일러두었으나 초절정의 고수가 은밀히 방문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우려가 상당했다.
하여 나는 점박이 노인에게 절곡으로 가서 무영을 만나 내 지시를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독의가 생각보다 빨리 명교로 돌아오는 바람에 아슬아슬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의 방수가 절곡으로 향하기 전에 충분히 절곡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무영은 내 지시에 따라 독무가 자욱한 숲에 가서 전날 독왕이 마련한 지하거처에 들 것이었다. 진소월도 알지 못하기에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곳이었다. 따로 당부해두긴 했지만 무영은 그게 아니더라도 바깥의 흔적을 철저히 지울 정도의 감각이 있는 이였다. 나는 그를 신뢰했다.
그럼에도 당장 절곡에 가볼까 하는 유혹이 일었다. 하지만 나는 유혹을 뿌리쳤다.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끝났을 터였다. 차라리 여기서 독의의 동향을 지켜보는 게 나았다. 소면통달에게 청하면 독의가 구세원을 출입하는 정도는 손쉽게 포착할 수 있을 터였다. 그가 구세원을 나가 명교를 벗어나면 몰래 따라갈 참이었다. 들키면 제압하면 그만이었다.
마음을 정한 나는 소면통달을 보러 백운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독의는 구세원에서 두문불출했다.
외부인을 일절 들이지 않았기에 간자와 접촉하는 기미도 없었다. 뭔가 비밀스러운 소통수단이 있을는지도 몰랐으나 그럴 성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진소월과 괴선의 치유에 전념하려는 걸까.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을 택한 걸까.
점박이 노인은 무왕이 명교에 들고 여드레 후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무사히 임무를 마쳤음을 보고했다. 그로써 심중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감이 싹 가셨다. 긴 여정에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점박이 노인은 구세원에 들자마자 회광반조라도 보이듯 활기를 되찾았다. 독의 때문이었다.
둘의 대면은 기묘했다. 점박이 노인을 일장에 짓뭉갤 수 있는 강자이면서도 독의는 그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쩔쩔 맸다. 반면 점박이 노인은 쥐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신이 난 모습이었다.
독의는 치료에 심대한 방해가 되니 점박이 노인을 구세원 밖으로 몰아내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농담이 아님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삭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계절임에도 독의는 땀을 줄줄 흘렸다. 그가 병이 나면 곤란해질 터이기에 나는 점박이 노인을 구세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점박이 노인은 묻지 않았는데도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독의는 상당한 수준의 술사였다. 무인으로 치면 초절정의 상급이라면서 그렇기에 더욱 더 자신의 술력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라 했다. 전날 스스로를 천하제일술사라 칭했던 그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나는 점박이 노인의 도움을 빌어 그 동안 찜찜했던 부분을 해소했다. 구세원의 친인들을 불러 독의에게 낚였는지 여부를 점검한 것이었다.
공력 덕분에 술법에 걸리지 않았을 광객과 강태수는 대충 살펴보고 진청운과 이광은 면밀히 확인했다. 모두 깨끗했다. 점박이 노인은 독의가 채혼주를 통해 그들의 속을 뒤적인 흔적이 티끌만큼도 없다고 확언했다.
나로서는 의외의 결과였다. 나는 독의가 진청운이나 이광에게 수작을 부려 그들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의심했다. 진청운이든 이광이든 본의 아니게 명교에 든 독의의 방수와 독의를 잇는 심부름꾼 노릇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틀린 추론이었다.
여하간 점박이 노인 덕분에 나는 적어도 독의의 술수에 대해선 부담을 내려놓고 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참고로 전날 독의가 채혼주에 관해 사실대로 털어놓은 것도 점박이 노인을 의식한 선제조치였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는 진소월을 통해 내가 점박이 노인을 부르러 광객을 독곡에 보냈음을 알게 되었을 터였다. 하여 어차피 나중에 들통 날 터이니 그럴 바에야 미리 토설하는 게 이롭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었다. 내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같은 이유로 독의의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종자였다.
* * *
내게 몹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기를 펼쳐놓기 전에 두어 가지 사항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먼저 장왕의 처치는 없던 일이 되었다. 쌍둥이가 끝내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소면통달의 집요하고도 간곡한 설득에 못 이긴 남매는 결국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구세원에 몰려갔을 때 쌍둥이는 장왕과 의형을 위해 굴욕을 감수하고 독의에게 무릎을 꿇었다. 정작 사달을 일으킨 이는 그토록 장왕의 수술을 원했던 소면통달이었다. 독의가 말을 바꾼 것이 발단이었다. 성공 확률이 일 할이 아니라 일 푼이라는 독의의 말에 발끈한 소면통달이 어째서 나흘 만에 십분의 일로 떨어졌느냐고 따졌다. 독의는 ‘자기 맘’이라는 황당한 논리로 응수했다.
독의의 농락에 노발대발하며 소면통달은 그를 일장에 쳐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다. 오히려 귀면나찰과 옥면수라가 그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독의를 처단하면 나에게 누를 끼치게 될 거라는 쌍둥이의 만류에 소면통달은 어쩔 수 없이 분기를 눌렀다. 하지만 구세원을 나가자마자 애꿎은 땅에다 장공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고 나중에 이광이 나에게 귀띔해주었다. 나는 소면통달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회복의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장왕은 예전 그대로였다.
아니, 한 가지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여전히 오시만 되면 발광하며 구덩이로 달려갔지만 더 이상 나와 손을 섞으려들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면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거렸다. 그러면서 연신 ‘같은 편’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전날의 격전 중 여러 차례 그를 위급지경에서 구해주었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한 모양이었다. 귀중한 비무 상대를 잃은 셈이었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도 장왕에게 깊은 전우애를 느끼고 있었다.
장왕은 무왕과의 비무는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공력은 엇비슷했으나 구사하는 무학의 정교함에서 발생한 차이로 인해 둘의 대결은 무왕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매번 일백 초 언저리의 공방전을 펼쳤지만 무왕이 독한 마음을 품었다면 십초 이내에 승부를 종결지을 수 있었을 터였다.
나현이 보내는 정보엔 쓸 만한 게 없었다.
마련의 동향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싸여있었고 내가 특별히 부탁한 사안에 관해서도 알아낸 바가 전무했다. 정보망을 총 가동했으나 나현은 낭왕의 소재에 대해 털끝만큼의 단서도 얻지 못했다.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가 사벌에 들어있지 않음은 거의 확실했다. 그랬다면 어떤 식으로든 사벌의 그릇 수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나현의 촉수에 걸려들었을 터였다.
그렇다고 낭왕이 천랑성으로 돌아간 것도 아닌 듯했다. 나현의 그물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 확언할 수는 없었으나 여러 경로로 취득한 정보에 따르면 천랑성은 낭왕의 장기부재로 인한 동요가 확연하다고 했다. 낭왕이 적, 즉 우리를 교란시킬 작정으로 이미 귀환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은폐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니 그는 아직 중원에 있다고 보아야 했다.
낭왕은 대체 어디에 은신하고 있을까. 그를 버리고 떠난 사왕과는 감정을 풀었을까.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답을 찾을 길은 막막했다.
* * *
소면통달이 구세원에서 일으킨 소동이나 낭왕의 행방 등 몇몇 자질구레한 일들이 가끔 신경을 붙들긴 했지만 나는 모처럼 무학의 궁구와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십오일 간의 분투는 무왕과의 비무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가 명교에 온 지 사흘 후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로 그와 맞섰다. 쌍방 전력을 쏟아낸 격전은 삼십 초 만에 무왕의 승리로 끝났다.
무왕은 예상했던 대로 내 성장의 폭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한 달 전 정맹에서 치렀던 비무에서 나는 겨우 칠 초를 버텼다. 그날 다음에 볼 때는 초수를 삼십으로 늘릴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나 자신도 이렇게 빨리 약속을 지키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는 우쭐하지 않았다. 겸손의 발로가 아니었다. 뿌듯한 마음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불만이 팽배했다.
무왕에게 충격을 주었으나 나는 본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생사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왕은 사왕과 낭왕을 격퇴하며 내가 현시한 실전 무력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무왕에게 내 진면모를 보일 수 없다는 것은 불만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실망감이 더 컸다.
나는 무왕과의 비무수련이 내 무학을 한층 심화시켜 주리라 기대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욕심이 났다. 욕심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첫날도. 그 이후로도.
하루 최소 반 시진은 할애했던 이광에 대한 무공지도마저 무기한 보류하고 수련에만 집중했음에도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매일 세 차례 무왕에게 전력을 다해 부딪쳤으나 번번이 패했다. 패배가 문제가 아니었다. 남는 게 없었다. 나는 그저 내 무학의 현재와 한계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반면 무왕은 나와의 비무를 통해 얻는 바가 상당했다. 나중엔 그가 더 적극적으로 비무를 원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내 무력이 정체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날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내단이 내보내는 원력이 확충된 결과였다.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을 넘어가는 동안 무학 방면으로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거대한 철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구월 초하루에 있었던 검황자와의 결전 이후 두 달여 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던 터였기에 느닷없는 정체는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대로만 가면 조만간 전왕이란 별호에 걸맞은 무위에 도달하리라 들떴던 나는 크게 낙담했다. 그런 와중에도 심마를 극복하기 위해 이전 어느 때보다 분투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깊은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무왕은 조급함을 버리라고 뻔한 충고를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망상임을 알면서도 내 행운을 앗아간 듯해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무왕과의 첫 비무가 있고 한 달 보름이 지난 날 첫 눈이 내렸다. 서설이자 폭설이었다.
미친 듯 철봉과 옥소를 휘두르다 광란을 멈추고 하늘과 땅을 가득 덮은 흰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현듯 뇌리에 괴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챈다고 떡이 나오더냐? 자고로 순리를 따라야지 떡고물이라도 떨어지는 법이다, 이놈아. 그러니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 말고…….’
반사적으로 반발하려다 퍼뜩 한 생각이 떠올랐다.
“순리라……. 노인장 말이 맞소.”
중얼거림이 내 두툼한 입술을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나는 수련장으로 삼은 들판을 떠나 명교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