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47
제146화 가자, 전충!
삼천 평의 면적을 자랑하는 현현각의 각주는 강퍅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팔십대 중반의 고령에 내공을 지니지 않은 범인임에도 허리가 꼿꼿했고 안광도 형형했다. 학자가 아니라 장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진소월에 따르면 학림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이라고 했다.
두 달 전 명교에 오자마자 진소월은 현현각부터 찾았다. 수십만 권의 서적을 소장한 현현각은 진소월에겐 보고(寶庫)나 다름없었다. 그녀와 담론을 나눴던 현현각주는 그녀의 방대한 학식에 찬탄을 연발하며 나보다도 더 귀빈으로 대했다.
유감스럽게도 노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다행히 송(宋)이라는 성을 기억해 낸 나는 진소월의 안부를 묻는 그의 인사에 대충 대답하고는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중원대륙의 지도들도 구비되어 있는지요?”
“그렇소이다. 팔방전도(八方全圖)는 중원뿐만이 아니라 북해와 서역, 남방과 동해 너머 섬들까지 망라하고 있다오. 총 팔십팔 권으로 이루어진 대서로서 지리는 물론이고 각 지역의 역사와 풍물, 명소와 방언들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소. 특히…….”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설명을 끊자 노인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명교의 문신들은 무인을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러시구려. 하지만 소중히 다루어주길 바라오.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깃든 역작이고 따로 복사본이 없으니. 실은 전날 진 소저도 본각의 고서와 기서들을 탐방하며 팔방전도부터…….”
“알겠습니다, 송 각주님. 어서 보여주십시오.”
노인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결례를 무릅쓰고 연속으로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간 건 시간이 급박해서가 아니라 한 번 입을 열면 반 각 이상 장광설을 쏟아내는 그의 습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날 진소월은 그런 노인과의 대화를 즐겼지만 나는 반의반 시진도 견디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내 태도가 못마땅했던지 노인이 직접 안내하지 않고 중년의 학사 한 명을 붙여주고는 휑하니 가버렸다. 나로서도 환영이었다. 군소리가 많은 부류는 질색이었다. 그런데 중년 학사도 노인 못지않은 다변이었다. 지도책이 있다는 서고로 향하는 내내 그는 쉴 새 없이 혀를 놀렸다. 떠버리 아저씨도 그랬는데, 학사들은 본래 이런 족속이었던가.
참다못해 양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하자 학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고막에 이상이 있는지를 묻더니 마치 의원인 양 귀의 구조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았다. 참으로 눈치도 없는 위인이었다.
다행히 인내심이 바닥을 칠 즈음 해당 서고에 당도했다. 나는 여전히 떠들어대는 학사를 무시하고 신속하게 작업에 착수했다.
삼층의 서고에 꽂힌 수십 권의 책자 중에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니 모두 네 권이었다. 하나씩 펼쳐보니 노인의 말처럼 지리만이 아니라 나에겐 쓸데없는 정보들도 잔뜩 들어있었다. 나는 진소월에게 배운 대로 평면의 지도를 입체적인 지형으로 전환하며 책들을 통독했다. 여섯 번 정독해 머릿속에 각인하고는 현현각을 나서니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구세원으로 갔다.
입구에 들어서는 데 복도로 달려가는 이광이 보였다. 나를 인지한 이광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악동처럼 화들짝 놀라며 달음박질을 멈췄다.
“어이, 꼬맹이. 여기서 뭐하는 거냐? 설마 수련을 빼먹은 건 아니겠지?”
이광의 뽀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아니에요, 큰 형님.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흠, 그쪽은 나가는 길이 아닌데? 내가 안 본다고 농땡이 치면 안 돼.”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런 적 없어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고모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발끈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이광이 돌연 주먹을 꽉 쥐더니 도발적인 눈빛을 발했다.
“두고 보세요. 반드시 큰 형님을 능가하는 무인이 될 테니까.”
어럽쇼? 요 맹랑한 녀석 같으니. 기개는 훌륭하다만 가능한 걸 꿈꿔야지.
강태수가 칭찬일변도로만 지도하는 탓인지 이광은 자기 주제를 몰랐다. 그의 무재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천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나 검황자는 물론이고 광객이나 괴선에도 한참 못 미쳤다. 내가 보기에 이광이 도달할 수 최대치는 작년 가을 나한테 깨졌던 태극검문의 단천검 정도였다. 기실 그 수준에만 이르러도 다행일 터였다. 물론 그가 마왕이나 도왕(刀王)처럼 대기만성 형일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순 없었다. 하여 나는 이광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대신 그를 격려하기로 했다. 자라나는 새싹의 기를 꺾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 열심히 해라. 나중에 성취를 확인할 테니까 게으름 피우지 말고.”
“안 피운다니까요!”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내 손길을 피한 이광이 내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며 외쳤다. 그를 붙잡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고는 독의의 석실로 걸음을 옮겼다.
“한 달이 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니 어인 행차신가?”
독의의 목소리가 사뭇 퉁명스러웠다. 나도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경과를 들으러 왔소.”
“무슨 경과?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
내가 노려보자 독의도 지지 않고 마주 쏘아보았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나는 그를 달랬다.
“약속은 꼭 지킬 테니 염려 마쇼.”
독의가 콧방귀를 꼈다.
“흥, 꼭이라니? 기억력이 형편없군. 그 확언을 벌써 세 번이나 깨뜨렸음을 잊었는가?”
할 말이 없었다.
독의가 뿔 난 까닭은 이모의 유해를 받지 못해서였다. 나는 독곡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그녀가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하필이면 독왕의 서거 후 금수독군과 은수독군이 자의로 행한 짓인지라 그 전에 독곡을 떠났던 점박이 노인도 알지 못했다. 다만 점박이 노인은 매장 시 토지에 스며들 독성 때문에 독인의 화장이 일반적이라는 점을 알려주었다. 독왕이 없으면 이모의 시체는 폐기물에 불과했다.
“몰랐다고 했잖소.”
“독강시 건만 따지는 게 아니잖은가?”
“…….”
“지금이라도 약속을 지키게. 아니, 약속과 무관하게 불철주야 자네 여자와 괴선을 돌보는 데 전심전력을 쏟는 나에게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는 게 도리일세.”
내 피를 달라는 요구임을 알아들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그들은 어떻소? 아직도 멀었소? 괴선은 그렇다 치고 진 소저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요? 그녀에게 당신의 비법을 전하는 게 조건의 하나임을 잊은 게요?”
“내 욕심만 차리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아이를 깨워 비방을 알려줄 수 있네. 하지만 그리 했을 때 후과는 자네가 책임질 텐가?”
“무슨 말이오?”
“알면서 묻지 말게. 비방과 처치는 별개의 영역일세. 설령 그 아이가 내 머리에 든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자가 치료는 어림도 없네. 다른 의원에게 맡길 수도 없고. 치료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네. 몸 상태의 변화에 맞춰 매번 투약의 양을 정밀하게 조절해야할뿐더러 약물 자체의 성분도 비율을 조정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아예 바꿔야 하네. 그것은 말로 전할 수 있는 범위 밖의 기술일세. 마치 상승의 무학이 구결이 아니라 깨달음의 영역이듯이.”
진위야 어찌 됐든 설득력이 상당했다.
“그러면 언제쯤 그녀의 치료가 끝나겠소?”
“나도 알 수 없네. 하지만 얼마 걸리지 않을 걸세. 일차 처치는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며칠 내로 정신을 차릴 수도 있네.”
일순 마음이 약해졌다. 진소월이 깬 연후 그녀를 보고 갈까.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결심한 김에 결행해야 했다.
“잠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소?”
내 요청에 독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나는 말귀를 알아들었다.
“저번보다 상태가 더 심하단 말이오?”
“몸뚱이도 얼굴 꼴이 되었다고 해 두지.”
나는 오랫동안 심중에 품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치료가 완료되면 그녀는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거요?”
“우리 계약 내용은 그 아이의 연명이지 미모의 보존이 아니잖은가?”
독의의 반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 * *
결국 진소월을 보지 않고 구세원을 나왔다.
나는 백운당에 들러 소면통달에게 출교를 알렸다. 그가 행선지를 물었지만 답을 아꼈다.
들판을 지나면서는 잠시 갈등했다. 무왕에게 말하고 갈까. 아니면 그냥 갈까.
고민은 짧았다. 나는 무왕의 움막으로 내려가지 않고 내쳐 날았다.
목적지는 명교에서 북서 방면으로 오천이백 리가량 떨어진 계양이었다. 계양은 마련의 총단이 자리한 대도이자 일만의 마인들이 우글거리는 용담호혈이었다.
나는 명교를 출발한 지 이틀 후 새벽 계양 인근의 포차산에 이르렀다. 가속을 거듭하며 최고속력으로 날았음에도 예정했던 시간의 두 배가 소요된 까닭은 오는 도중에 여러 차례 길을 헤맸기 때문이었다. 현현각에서 지도를 보며 경로를 숙지했지만 아무래도 나에게 맞춤한 진소월의 설명을 듣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포차산에서 계양까지는 십리 정도의 거리였다. 그럼에도 거대한 마기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졌다.
산정에 서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마기에 몸을 맡겼다. 나를 덮친 마기는 내 심장을 옥죄고 심혼을 장악했다. 나는 순식간에 심상을 채운 공포에 진저리를 쳤다. 검마류에서의 혈전을 통해 극복했다고 여겼지만, 착각이었다. 여전히 마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검마류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마왕의 소굴을 찾아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리고 이렇게 내면의 공포를 직시할 용기도 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서 공포의 실체인 마왕의 형상을 떠올렸다.
칼로 벤 듯 쭉 찢어진 눈, 얄팍한 염소수염, 근육질과는 거리가 먼 상체, 짧은 팔다리에 볼록한 배. 볼품이 없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외양이었으나 내겐 흉신악살보다 무서운 모습이었다. 그가 일 장 반 길이의 철삭을 휘두르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경기가 일었다.
마기에 잠긴 채 나는 뇌리에 소환한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덜덜 떨면서! 그의 쇠사슬이 내 몸뚱이를 휘감더니 가차 없이 쪼갰다. 오체분시 된 내 동체는 도로 붙었다. 그러자 마왕이 다시 나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수십 개의 육편으로 화했지만 내 조각들은 금세 합체했다.
마왕은 끊임없이 나를 죽였고 나는 그때마다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차츰 저항의 강도를 높여갔다. 어느 순간부터 마왕의 철삭은 단번에 나를 절단 내지 못했다. 그는 나를 잡는 데 애를 먹었다. 내 반격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부단한 시도 끝에 내 철봉과 옥소에서 발출된 빛줄기들이 마왕의 어깨와 복부를 찍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원하는 그림에 이르렀으나 내 승리는 요원했다. 그에게 타격을 입힐 수는 있으되 아무리 용을 써도 역전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마왕에게 수백 번을 깨지는 동안 나는 어느새 공포를 잊고 오롯이 전투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눈을 떴다. 그러자 눈부신 햇살이 밀려들었다. 쓴웃음이 났다. 상상비무에 빠져 있다 날이 밝은 것도 몰랐던 것이었다.
캉!
철봉과 옥소를 꺼내 부딪치며 결의를 다진 나는 나 자신에게 출정을 명했다.
“가자, 전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