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49
제148화 벌써 지쳤어?
나와 마왕의 격전에서 파생된 경기에 휩쓸려 반쯤 부서진 전각에서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인영을 인지했을 때 나는 도마(刀魔)일 거라 착각했다. 큼직한 반월도를 움켜쥐고 있는데다 내 진로를 가로막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단신의 도객은 도마가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도마라면 단지 칼을 치켜드는 것만으로 태산 같은 위압감을 발산할 수 없을 터였다. 천지간에 맹호희산(猛虎戱山)의 자세만으로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수 있는 도호(刀豪)는 단 한 명뿐이었다.
* * *
도왕(刀王) 조기(趙起).
십왕의 일인이자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를 넘어 천년제일도(千年第一刀)로 자타가 공인하는 희대의 무존(武尊)이었다. 그는 검총과 더불어 천하이대금역(天下二大禁域)으로 꼽히는 도천(刀天)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조기는 대기만성의 대명사였다.
그는 정파 무림의 명문 장구(長邱) 조가(趙家) 출신이었다. 조가는 수백 년 간 꾸준히 정파십대고수에 드는 도호들을 배출한 덕분에 늘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명가 중의 명가였다.
그러나 그들의 성세는 일백사십 년 전부터 급격히 꺾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밀려 번번이 오대세가에서 탈락한 도원 소가가 정파제일도문(正派第一刀門)이 되기 위한 수대에 걸친 노고를 보상받으며 잇따라 중원 전체를 아우르는 무명(武名)을 떨친 강호들을 길러낸 반면 조가는 반백 년 가까이 초절정의 초입에 든 고수조차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조가를 밀어내고 오대세가에 든 소가는 그들에게 재역전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더욱 분발했다. 그러나 기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해도 모자랄 판에 조가가 자중지란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데 대가문의 몰락은 한 순간이었다.
명가 중의 명가에서 강호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조가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갔다. 그러다 팔십여 년 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가의 후손들은 명예 회복과 가문 부흥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될 성 부를 묘목을 하나만 골라 가문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 집중적으로 육성하기로 한 것이었다. 실패하면 ‘모 아니면 도’ 식의 도박이었으나 무림은 결국 고수 놀음이었으니 그들의 결정은 궁여지책이되 현명한 구석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특단의 조치를 계획하고 실행했던 조가의 인물들은 모두 대실패로 끝났다고 한탄하며 통한 속에 눈들을 감았다. 그들이 선택한 묘목이 너무 늦게 거목이 된 탓이었다.
* * *
조기는 종가 태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가문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으로 간택된 건 어린 시절 드러낸 무재 덕분이었다.
불세출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조기의 무재는 가문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 단연 특출했다. 조가의 원로들은 그들이 세운 원칙에 따라 방계의 자손이지만 군계일학의 무재를 뽐낸 기재를 뽑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결정을 땅을 치고 후회하는 데는 채 오 년도 걸리지 않았다.
조기는 소위 조루였다. 조루는 초기에 반짝 빛나다 금세 시드는 영재를 비꼬는 무림의 은어였다.
가문의 전 재산이 들어간 영약들을 독차지하고 원로들로부터 비전을 특별지도 받았음에도 조기의 성취는 평범하게 성장한 또래들을 능가하지 못했다. 원로들은 자기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더욱 더 조기에게 매달렸다. 조기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치 못했다.
그는 천재가 아니라 둔재였다. 기초 무공에서는 탁월한 이해력을 과시하고 시현도 남들보다 배는 빨랐지만 상승 무학을 익히기 시작하자 한계를 여지없이 노정했다. 원로들이 아무리 쉽게 알려줘도 조기는 알아듣지 못했다. 이해가 부족하니 구현은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조기의 진도는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이미 그에게 남아있던 전답이며 고옥들의 서까래까지 뽑아 마련한 진귀한 영약들을 모조리 복용시킨 후라 조가의 원로들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차마 포기하지 못하고 몇 년을 더 용을 썼다.
그러나 결국 모두들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포기를 선언하고 말았다. 조기가 겨우 열세 살 때였다. 어찌 된 게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퇴보하는 조기로 인해 화병으로 몸져누운 원로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그나마 남아있던 일속들마저 뿔뿔이 흩어지며 조가는 완전히 폐가로 화했다.
가문의 희망에서 멸문의 원흉으로 전락하며 혈족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아야 했던 조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고난의 길을 걸었다. 수십 년 간 강호를 떠돌며 패배가 몇 배는 많은 비무 행을 벌이던 그가 고만고만한 무인에서 일약 사상 최강의 도호로 우뚝 서게 된 건 그의 가문이 그를 ‘대(大)실패작’으로 낙인찍은 후 무려 일 갑자 후의 일이었다.
* * *
도무지 이해난망이었다.
도왕은 마왕과 결탁할 인물이 아니었다. 낭왕과 접촉을 시도한 사벌처럼 마련도 십왕 급의 거물을 포섭하려 들 가능성 있음을 나현이 알렸을 때 나와 진소월이 염두에 둔 이들은 해왕과 빙왕이었다. 그들은 각각 장왕에게 가로막혀 중원진출을 접은 전례가 있으니 마왕과 손을 잡는대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난은 나와 독왕의 관계를 들먹이며 무마시킬 터였다. 아니, 애당초 마인들은 세간의 비난 따위를 신경 쓸 족속이 아니었다.
도왕은 검왕 이상으로 마왕과의 연수를 상상하기 어려운 이였다. 뼛속까지 정파임을 자처하는 데다 마련과는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도천을 세운 후 검총을 본 따 철저한 중립을 선포했지만 그가 누구와 싸운다면 마련이 될 터였다. 그런 이가 난데없이 마련의 본거지에 나타나서는 마왕이 아니라 나에게 칼을 겨누고 있으니 내가 놀란 것도 당연지사였다.
꿈에서라도 믿기지 않을 일이었으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따라서 넋 놓고 있을 새가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나는 도왕의 출현을 인지하자마자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그가 치켜든 반월도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장왕의 공진에 맞먹는 무지막지한 도풍이 휘몰아쳤다. 재빨리 대처한 덕분에 직격을 모면했지만 폭풍 같은 칼바람의 여파에 걸린 나는 팽이처럼 돌며 석조건물의 벽에 처박혔다. 중심을 잡을 여력이 없어 머리부터 부딪치는 바람에 두개골이 깨진 듯싶었다. 석벽을 부수고 나가떨어진 내 동체 위에 마왕의 쇠사슬이 떨어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철삭 끝이 아슬아슬하게 내 발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발목 절단의 위기를 넘기자마자 바로 목이 달아날 처지에 놓였다. 인정사정없이 내리꽂히는 마왕의 철삭에서 벗어날 방위는 한 군데 뿐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도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전율했다.
찰나지간 시간이 정지하고 뇌리에 수많은 빛줄기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최상의 성과를 얻었음을 자각했으나 황홀경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당장 진퇴를 결정해야 했다.
내 선택은 도왕이었다. 어떤 재주를 부리더라도 다섯 갈래로 나뉜 마왕의 철삭은 흘려낼 수 있을 성싶지 않아서였다. 걸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도왕을 만만하게 본 건 아니었으나 마왕에게 즉살당하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나는 최후를 예감했다. 도왕이 방금 전과 같은 도풍을 날린다면 도저히 빗겨낼 방도가 없었다. 이쪽도 생존 확률은 거의 전무했다.
미리 절망하며 나는 도왕이 도사린 곳으로 몸을 날렸다. 마왕의 철삭이 내 등을 훑고 지나갔다. 호신강기로 차단했음에도 거리가 너무 가까워 척추가 바스러졌다. 그 상태로 튀어나가자마자 흉포하고 강맹한 칼바람이 나를 덮쳤다.
나는 죽지 않았다.
뜻밖에도 해일 같은 폭풍에는 빈 틈이 있었다. 절망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기에 나는 기적적으로 주어진 실낱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폭풍을 헤집고 빠져나가자 마왕이 알아듣지 못할 괴성을 내질렀다.
멈춰 서서 그에게 뭐라고 했는지 묻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쏜살같이 내뺐다. 마왕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알아들었다. 그는 도왕에게 나를 쫓을 것을 닦달하고 있었다. 그 지체가 나에게 사오 장의 거리를 벌어주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도 추격자가 한 명임을 알았다. 마왕임에 분명했다. 도왕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으나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도왕이 가세했으면 뿌리치기 어려웠을 터였다.
운신불능에 준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달렸다. 마왕이 악착같이 뒤따라왔다. 그의 경신은 나에게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우리는 단숨에 계양을 벗어나 벌판을 가로질렀다. 마왕이 진부한 대사를 날렸다.
“거기 서라!”
나는 마왕의 청에 응했다. 내가 돌연 신형을 멈추고 광환을 쏘아내자 마왕이 허둥지둥 철삭을 휘둘러 방어했다. 그러나 광환에 실린 경력을 쳐낸 반동으로 휘청거렸다. 그에게 일격을 가한 나는 도주를 재개했다.
기실 방금 전의 기습은 승부수였다. 쫓고 쫓기는 전투에 이골이 난 나는 무작정 달아나기만 해서는 덜미를 잡힐 우려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 마왕에게 내가 반격을 할 수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그의 추격의지를 약화시키고자 했다.
마왕은 내 기대대로 주춤했다. 계속 쫓아오긴 했으나 맹렬함의 강도가 떨어졌다. 그래서야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나를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여전히 절대불리의 형국이었다. 우선 나에겐 더 이상 마왕의 추격을 저지할 여력이 없었다. 경신에 필요한 최소치만 남기고 나머지 원력을 모조리 광환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원력이 고이는 데 일각 이상 소요될 터였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부상이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지만 나는 한계에 임박했음을 알았다. 이대로 가다간 반의반 각 이내에 스스로 도주극을 접어야 할 판이었다.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으나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나는 최악의 경우 마왕을 끌어안고 폭사할 각오를 했다. 그러던 차에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나와 십이삼 장의 거리를 유지한 채 쫓아오던 마왕이 은연 중 속도를 늦춘 것이었다. 그는 나처럼 경신에 지장을 초래할 부상을 당한 건 아니었기에 어리둥절했다.
어느새 새벽에 들었던 포차산 근처에 이르렀음을 자각한 나는 마왕이 무엇을 꺼리는 지 알아차렸다. 마침 한계에 달한 나는 내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무작정 발을 세우자 마왕도 멈춰 섰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불문곡직 달려들었으면 무조건 염왕전으로 직행했을 터였다.
“뭐야? 벌써 지쳤어?”
내 물음에 마왕이 되물었다.
“네놈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인상을 썼다.
“알긴 뭘 알아, 쥐새끼. 대가리 굴리지 말고 빨리 쫓아오기나 해. 혼자 달리기 심심하니까.”
나는 극악의 고통을 참으며 포차산으로 달음박질쳤다. 민망할 정도로 느렸지만 마왕은 나를 쫓지 않고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산턱에서 몸을 돌린 나는 마왕에게 소리쳤다.
“뭐해? 안 따라오고.”
멀리서 나를 노려보던 마왕이 말없이 돌아섰다. 그러고는 계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속도로 보건대 내게로 쇄도했다면 반호흡만에 도달했을 터였다.
마왕이 작은 점으로 화할 때까지 우두커니 바라보던 나는 응급처치가 끝나고 원력도 적게나마 운용 가능해지자 삭풍에 헐벗은 수목들을 고스란히 드러낸 산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