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5
제14화 일대일이라면
진소월은 내 속을 읽었다.
“그이의 복수를 할 셈인가요?”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진소월이 아미를 찌푸렸다.
“내 아버지에게서 부용 아씨가 현가에 들었다는 얘기는 들었죠?”
“그렇소.”
“신필주는 딸을 다리 삼아 현가와 거래를 텄어요. 그리고 지난 이십 년 간 입지전적인 업적을 쌓았죠. 일개 변방 흑문의 수첩에서 일약 중원 전역에 이름을 알린 거부가 됐으니까요.
그는 현재 상운(商雲)의 대문통(大聞通)이자 보성 현가의 봉공(奉公)이에요. 그가 그러한 위치에 도달한 데는 현가의 비호와 지원이 절대적이었지만 현가 또한 그로부터 그 못지않은 이득을 얻었어요. 그에게 살림을 맡긴 덕분에 오대세가에서 가장 튼실한 재정을 구축했으니까요. 그런 연유로 신필주는 현재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요.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아나요?”
모를 리가 있겠는가. 진소월은 노물이 나 같은 놈이 감당할 수 없는 거물임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복수 따윈 꿈도 꾸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충고에 따를 생각이 붕어 코털만큼도 없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노물은 떠버리 아저씨를 기만하고 종내는 사지로 몰아넣은 짓거리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쉽지는 않을 터였다. 노물이 현가를 등에 업고 있다면, 그리고 현가의 인사들이 그를 징치하려는 나를 저지하려 든다면 원치 않는 충돌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했다. 그들더러 내 개인적인 은원을 해결하고자 할 뿐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요구한들 씨가 먹힐 리 만무했다.
절로 쓴웃음이 났다.
절곡을 나오며 부모님과 두 아저씨의 원들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떠버리 아저씨 건은 간단히 해결되리라 여겼다. 모녀가 잘 지내는지 확인한 후 조용히 떠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런데 뜻밖에도 일이 커지게 생겼다. 잘못하면 오대세가의 일원이라는 현가와 대립하게 될 판이니.
“왜 나를 걱정하는 거요? 오늘 이전에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진소월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을 주었다.
“전 공자가 학림수호령이기 때문이에요.”
“무슨 소리요?”
“학림수호령이 후인을 고를 때 고려하는 바를 알고 있나요?”
“모르오.”
“두 가지에요. 하나는 불세출의 무재이고 다른 하나는 굳건한 정심(正心)이에요. 단순하면서도 매우 까다로운 조건들이죠. 그 둘을 충족시키는 아이를 구하기란 의외로 어려우니까요. 언젠가부터 학림의 수호령이 일맥전승으로 바뀐 이유죠. 아무튼 학림수호령에게 선택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후인의 기재와 선성(善性)은 보장된 셈이나 진배없어요.”
헛웃음이 날 뻔했다.
떠버리 아저씨에게 구환도법을 전수받긴 했지만 나는 학림수호령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다만 내게 훗날 재주가 뛰어나면서도 욕심이 없는 아이를 찾아 학림수호령의 맥을 이어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이에 이어 그이의 후인까지 신필주의 먹잇감이 되도록 두고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만든 거예요.”
나도 모르게 비꼬는 소리가 나왔다.
“그것 참 고맙구려. 헌데 그 늙은이는 당신 부친의 은인이자 당신의 외조부가 아니오? 어째서 그 늙은이가 언짢아 할 행동을 하는 게요?”
진소월은 침묵했다. 나도 침묵으로 압박했다. 진소월이 분홍빛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신필주에게 묶여있지만 나는 그와 의절한 지 오래에요. 예전에 그는 이곳을 비처로 사용했어요. 공개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사안들을 여기서 처리했죠. 아기였던 나를 옆에 두고서.
나는 본의 아니게 그가 떠드는 소리를 들어야 했어요. 일일이 나열할 순 없지만 대부분이 협잡과 음모, 사기와 악행 모의였죠. 나중에 그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나는 넌덜머리가 났어요.
그는 심지어 나를 그의 딸처럼 길러 거대방파에 팔아치울 궁리를 했어요. 내 천형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예요. 내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알자 그는 나를 헌신짝처럼 버렸어요. 나로서는 다행이었죠.
거듭 말하지만 나는 그를 외조부로 여기지 않아요. 아버지도 그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주고자 불철주야 애쓰고 있고요. 그러니 우리의 진의를 의심하지 말아요.”
하마터면 손을 뻗어 진소월의 뺨을 어루만질 뻔했다. 여하간 궁금증을 해소한 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음성을 두꺼운 입술 밖으로 내보냈다.
“의심하지 않소. 그럴 리가 있겠소?”
탐스러운 빛깔과 완벽한 곡선을 자랑하는 진소월의 입술에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미소가 걸렸다.
복도에서 기척이 나더니 강태수가 방에 들어섰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소주. 하지만 급전이 와서.”
강태수가 내민 첩지를 받아든 진소월이 내용을 확인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단천검이 전원에 나타났다는군요.”
나는 어깨를 웅크렸다. 그 동작의 의미를 곡해한 진소월이 나를 안심시켰다.
“염려하지 말아요. 내일까지 이곳에 은신해 있다가 파주나 고연으로 피신하면 괜찮을 거예요. 감시망에 걸리지 않을 경로를 알려줄 게요. 그곳들에서라면 단천검이나 태극검문의 검사들이 전 공자를 잡겠다고 설치지 못할 거예요. 두 곳의 터줏대감인 자운궁(紫雲宮), 진무관(眞武館)과 껄끄러운 관계니까요.”
“거기에 갈 생각 없소.”
“그러면요?”
“전원으로 돌아가 단천검을 상대할 테요.”
강태수가 부리부리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소월이 가지런한 눈썹을 반듯한 이마로 추켜올렸다.
“단천검이 어떤 인물인지 아나요?”
“대충은.”
“단천검은 대충 알고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에요. 그는 백도방주인 독두귀도와 더불어 성주 무림 최강을 다투는 초절정의 검호(劍豪)에요. 전 공자가 안평 무림대회에서 꺾은 태극검문의 신성과는 만월과 반딧불의 차이라고 보면 돼요. 그러니…….”
나는 진소월의 말을 끊었다.
“소저는 그는 알지만 나에 대해선 잘 모르잖소?”
내 말을 알아들은 진소월이 단도직입했다.
“단천검을 이길 수 있나요?”
“일대일이라면.”
강태수의 입에서 짧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진소월의 봉목엔 이채가 서렸다. 눈싸움을 하듯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려 줘요. 아버지에게 전서구를 날려야겠어요. 전 공자가 단천검을 단독으로 만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볼 게요.”
“알겠소.”
일 각 후 우리는 와옥을 나왔다.
강태수가 진소월을 안아들었다. 그러고는 장원 밖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나는 진소월을 안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강태수의 경공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한 번 도약에 칠팔 장씩 쭉쭉 나아가면서도 자세와 착지가 안정적이었다. 품에 든 진소월을 배려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반 식경 후쯤 우리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나는 진소월이 가리킨 수림으로 몸을 날렸다.
잣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낡은 사당이 나왔다. 나는 사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잇달아 들리면 어떤 연유로든 일이 틀어졌다는 뜻이었다. 진소월은 그 경우엔 지체 없이 장원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설령 단천검에게 방수가 딸려있더라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멀리서 간헐적인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단천검이 홀로 이 사당으로 향할 거라는 신호였다.
나는 마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차근차근 전신의 뼈마디를 풀었다.
얼마 후 인기척이 잡혔다. 이내 두 개의 그림자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안력을 돋우어 인영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둘 다 낯이 익었다. 하나는 사마귀 노인, 단천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월루주 진청운이었다.
나는 의아했다. 단천검이 진청운을 길잡이로 삼은 건 그렇다 쳐도 사당까지 데리고 온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진청운을 마당 끝에 대기시킨 단천검이 나에게 걸어왔다. 그러고는 삼사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본 나는 실소했다. 그는 내가 아니라 사당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경계하는지는 불문가지였다.
“그 노인네는 여기에 없소. 그러니 그렇게 떨지 마쇼.”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단천검이 손을 들어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러자 진청운이 허리를 접어 예를 표하고는 마당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단천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올 줄 알면서도 나를 기다렸더냐?”
“그렇소.”
내 말투가 못마땅한지 단천검이 검미를 일그러뜨렸다.
“네 배후가 어디더냐?”
“알아서 뭐하시게?”
“…….”
“내가 어마어마한 배후를 가지고 있다면 뒤로 돌아서서 꽁무니를 뺄 거요?”
나를 노려보던 단천검이 불문곡직 검을 빼들었다. 그의 발검에 대응해 나도 왼손에 철봉을 쥐었다.
“싸우기에 앞서 몇 가지 물어봅시다. 대체 왜 나를 잡으려는 거요? 정말 그 철부지한테 꿀밤 한 대 친 걸 가지고 이러는 거요? 일전에도 말했지만 정당방위였소. 그 자식은 나를 죽인답시고 달려들었는데 그 정도면 많이 봐 준 거 아니오?”
“…….”
“제길, 입에 자물쇠를 채웠소? 원수를 진 것도 아니니 가급적 말로 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전날 내 양 팔을 다 자르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소?”
“그만 떠들고 덤벼라.”
“그러지.”
그 말과 함께 나는 단천검에게 쇄도했다.
캉!
철봉과 보검의 충돌은 굉음을 일으켰고 불꽃을 튀겼다. 첫 일합의 결과는 나의 열세였다. 단천검은 한 치의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은 반면 나는 태풍을 맞은 나무처럼 휘청거렸다.
단천검의 검이 내 좌견을 찔러왔다. 팔을 잘라버릴 태세였다. 나는 퇴를 발해 물러서는 대신 상체를 회전시키며 팔꿈치로 단천검의 명치를 찍었다. 단천검은 검을 들지 않은 왼 손바닥으로 막아냈다. 그의 장심에 담긴 경력이 내 뼈를 울렸다.
지근거리에서 삼사 초를 교환한 우리는 다시 한 번 철봉과 검을 부딪친 후 떨어졌다. 이번에도 이득을 본 쪽은 단천검이었다. 그는 반 보만 물러섰지만 나는 칠팔 보나 튕겨나갔다. 그럼에도 낭패한 기색을 보인 쪽은 단천검이었다. 위력을 배가시킨 그의 검을 받고도 내가 멀쩡한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단천검이 때 이르게 검기를 피워 올렸다.
그의 검첨에서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이자 나는 탐색전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검기가 아니라 검강이었다.
내가 철봉을 쭉 뻗었다. 다음 순간 단천검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내 철봉에서 발출된 뇌전이 그의 면상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내 암수를 피해낸 단천검이 나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검강을 일으켰다. 그가 강기를 두른 검을 칼처럼 휘두르자 허공에 기묘한 곡선이 생겨났다. 태극의 물결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퇴와 회를 동시에 발한 나는 아슬아슬하게 검강의 여파를 빠져나왔다.
진신 무력을 드러낸 단천검은 폭풍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도 때때로 퇴보를 밟아야했다. 결정타를 날릴라치면 내가 날카로운 반격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내 팔을 자르려다 부상을 입을 수는 없었던지 단천검은 번번이 양보했다.
하지만 그의 검강이 더욱 선연해졌다. 드디어 십이 성의 공력을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그의 시퍼런 눈빛은 기필코 내 양팔을 절단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나는 한계임을 알았다.
예상대로였다. 벙어리 아저씨의 뇌전십이검(雷電十二劍)만으로 단천검 같은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무공의 수준에 차이가 나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무학 자체의 깊이만 따진다면 뇌전십이검은 태극검문의 검공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고전하는 까닭은 내공부족에 있었다. 단천검의 공력은 나를 압도했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절대적인 힘에서 밀리면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단천검은 노련함 방면으로도 초일류였다.
물론 내게는 전세를 단숨에 뒤집을 수단이 있었다. 모친의 원력이었다. 원력을 발산하면 이번엔 단천검이 나와 동일한 처지에 처하게 될 터였다. 그의 내공으로는 원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장의 패를 아꼈다. 단지 승리가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철봉으로만 맞서지 않았을 것이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강자와의 실전경험이었다. 그것이 절곡을 떠났던 가장 큰 이유였다.
전력을 쏟아내기 시작한 단천검에 맞서 나도 옥소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국면은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