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50
제149화 하아, 역시!
나를 구원한 이는 무왕이었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독왕에게 공을 돌리는 게 옳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마왕이 추격을 단념하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가?
내가 계양의 경계에 들어섰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마뇌는 마왕의 출정에 앞서 그에게 신신당부했을 터였다. 전왕이 혼자 왔을 리는 없으니 뒤를 조심하라고. 십중팔구 포차산 쯤에 무왕이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
마뇌는 두 달 보름 전 사벌에 잠입한 내가 사왕을 유인해 봉산에 은신해 있던 독왕과 함께 그를 제거하려 했던 일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고는 이번에도 내가 같은 수법을 쓰리라고 짐작하지 않았을까.
마왕에게 주의를 당부하면서도 마뇌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었다. 도왕이라는 비장의 패를 쥐고 있으니 내게 마왕을 유인할 기회 자체를 허락하지 않으리라 자신했으리라. 도왕더러 기운을 죽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나서라고 이른 이도 마뇌일 터였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장치였다. 처음부터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면 아예 달려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빼기 바빴을 테니.
하지만 마뇌는 내가 그의 덫을 빠져나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터였다. 내가 해냈으면서도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탈주가 가능했던 것은 세 가지 요인 덕분이었다.
첫째, 나의 탁월한 대처.
둘째, 운.
셋째, 도왕의 소극성.
세 번째 이유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도왕은 어째서 중상을 입고 달아나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을까. 그 전에 그가 날린 도풍들은 그의 전력이었을까. 애당초 그는 왜 적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마련에 들어있던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당사자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이었다. 그래도 진소월이라면 근사치를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천하에서 제일 아름답고 가장 영민한 여인을 떠올리자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하고 있는지 새삼스레 실감했다. 나는 하루 빨리 온전한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 * *
나는 고통을 수단으로 삼은 육신의 항의를 무시하고 줄기차게 내달았다. 마뇌가 자신의 실책을 인지하고 마왕을 다시 내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두어야 했다.
되도록 인적이 없는 경로를 택했지만 워낙 먼 거리를 가야하는 데다 백주(白晝)인지라 아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나를 목격한 이들은 전부 실혼인과 진배없는 노예들이었다. 팔마류의 마인들은 계양의 본단에 총집결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일천사백 리에 이르는 도주로 도처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들을 목도했다. 마련의 땅은 인간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인육을 쟁탈하기 위한 굶주린 자들의 아비규환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전쟁터의 살육전보다 백배는 더 끔직했다. 생자들 중 아이와 노인은 전무했다. 여자들도 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그저 희생자였다.
약육강식의 철칙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생지옥을 지나며 내 심장은 원초적인 분노로 펄떡거렸다. 내가 아무리 나만 아는 위인이라지만 이건 아니었다. 마련을 멸해야 하는 이유를 가슴에 새기며 나는 그날을 한시라도 앞당기자고 다짐했다.
* * *
해질녘에야 마련의 영토를 벗어난 나는 명교로 귀환하지 않고 산세가 준엄하기로 유명한 양지산맥의 협곡에서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들어갔다. 벼랑 중간에 난 동굴이라 사냥꾼이나 약초를 캐는 산인들에게 방해를 받을 염려가 없는 곳이었다.
길이가 채 일 장도 되지 않는 동굴 끝에 좌정한 나는 묵상에 잠겼다. 운공에 들지 않고 무학의 궁구부터 시작한 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였다. 진종일 달리는 내내 내 머릿속은 온갖 선들로 들끓었다. 들끓었다는 표현을 쓴 건 마치 불처럼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흥분을 누르며 정리에 착수했다.
마구잡이로 엉킨 선들을 풀 실마리를 찾는 일은 수월했다. 마왕과 도왕의 합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뇌리에 명멸했던 빛줄기를 소환하자 금세 시발점이 보였다.
또 다시 전율이 일었으나 나는 차근차근 실타래를 풀어나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기존의 성취를 뛰어넘는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음을 자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진입이 아니라 도약이었다. 나는 내가 발 딛고 선 토대에서 훌쩍 뛰어올라 나만의 공간을 유영하고 있었다.
나만의 공간!
그것이 핵심이었다. 내 무공의 뿌리가 무왕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청출어람을 부르짖어도 그의 춤사위에 갇힌 한 나는 그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었다. 아버지와 나에게 베푼 그의 은덕은 고맙기 이를 데 없으나 나는 누군가의 아류가 되기는 싫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매일 같이 무왕을 상대로 극한의 비무수련을 하면서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을 테지만 그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픈 내적 갈망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했을 터였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고 그토록 치열하게 수련했음에도 성과를 얻지 못한 건 무왕의 그늘이 너무 크고 짙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칠 것 같은 답답함 속에서도 나는 내 속에서 무언가 여물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물려주고 내가 심화-발전시킨 실전무학!
생사의 경계에서 터득한 깨달음들은 무왕과 무관하고 그가 가지지 못한 우리 부자만의 과실이었다. 무왕이라는 뿌리와의 연관성을 거세할 수 없었기에 완전한 독자성은 어불성설이었으나 독립의 단초는 될 수 있었다.
마왕과 도왕의 협공은, 그럼으로써 내가 처한 위급지경은 그 열매가 가지에서 뚝 떨어지도록 해주었다. 이제 그 열매의 씨앗에서 발아된 싹은 오로지 내 작품이 될 것이었다.
자랑삼아 미리 밝히자면, 훗날 내가 몇몇 친인들에게 들려준 회상을 바탕으로 사가들은 내가 동굴에 들었던 무력(武曆) 일천사십팔 년 십이월 십팔일을 무황 전충이 진정한 대종사의 반열에 오른 날로 기록했다. 장차 오절신공과 더불어 쌍천신공(雙天神功)으로 일컬어질 광무신공(光舞神功)이 태동한 날이니 당연한 처사였다.
참고로 내가 내 절기들의 통합 명(名)에 ‘춤출 무(舞)’ 자를 붙인 건 무왕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 * *
타다닥 타다다닥.
어디서 콩 볶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깬 것은 아니었다. 선들의 뭉치를 풀어 내 공간 속에 이런저런 형상들을 그리고 나니 마침 그 소리가 날아온 것이었다. 묵상을 마쳤지만 나는 한 동안 동굴 속에 머물러있었다. 도약의 여운을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어둠이 묽어지더니 아침햇살이 동굴에 스며들었다. 나는 들어갈 때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후 곧장 동진을 시작했다. 아직 부상이 덜 아물었지만 경신을 펼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명교로 직행하던 중 우측으로 멀리 보이는 시진으로 향한 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까 지나쳤던 소읍들도 유난히 시끌벅적했다.
혹시? 그 콩 볶는 소리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예상대로였다.
혼잡한 저자에 떨어져 내린 나는 어깨가 떡 벌어진 털보사내에게 다가갔다. 칠 척의 장신에 골격 또한 우람한 나에게 겁을 먹지 않았음을 과시하려는 듯 털보가 나를 닮은 고리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핏발 선 눈알이 터질 듯했다. 나는 그의 위협적인 태도를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오?”
딴엔 정중한 언사였지만 털보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웬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 이른 아침부터 어르신의 앞길을 가로막고는 생뚱맞은 헛소리를…….”
털보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행인들 중 눈썰미 좋은 이가 대뜸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저, 저, 저, 전왕이다!”
대번에 소동이 일었다. 털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하지만 제법 강단이 있는지 혼비백산한 와중에도 내 정체를 확인하려 들었다.
“저, 저, 저, 정말로 전왕이십니까?”
“그렇소. 그런데 오늘이…….”
나는 질문을 반복하지 못했다. 털보가 입에 거품을 물고는 까무러쳤기 때문이었다. 나더러 ‘거지발싸개’라 했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처신이었다.
쩝. 입맛을 다신 나는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한 군중을 휘둘러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 답을 주었다.
“정월 초하루입니다, 전왕.”
하아, 역시!
동굴에서 대여섯 시진 정도 머물렀으리라 여겼는데 나는 열이틀 동안이나 묵상이 들었던 것이었다. 어쩐지 허기가 심하게 지더라니.
* * *
나는 행로를 변경했다.
동남 방면으로 날아가면서 자문했다. 과연 그 잘생긴 친구가 올까.
넉 달 전 검황자와 헤어지며 나는 우리와 함께 하고 싶으면 정월 초하루에 늪지로 오라고 일러두었다. 나로서는 그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지 어떨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진소월의 의견을 물어보았으나 그녀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눈치를 보건대 올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검총을 나오기 위해서는 총주인 검왕의 허락이 있어야했다. 만약 그에게 알리지 않고 무단으로 상백산을 떠나면 영원히 검총으로 돌아갈 수 없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선 처벌도 감수해야 했다.
나는 검왕이 검황자의 외출을 허용할 성싶지 않았다. 검왕의 독단적 성정을 감안하건대 검황자가 검총을 나오려면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이미 결정판에서의 패배로 진소월과의 연분이 물 건너갔는데 그가 그런 모험을 하려 들까.
진소월이 아니더라도 검황자는 자신의 무력이 나를 능가한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나올 수 있을 터였다. 검왕의 허락과 상관없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나와의 대면을 스스로 허락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뭐, 제 자존심보다 진소월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다면 할 말 없고.
만약 전자를 앞세운다면 내 제안을 거부할 공산이 컸다. 검총에만 틀어박혀 있어 지난 석 달 간 내가 전왕이란 별호를 획득하는 등 얼마나 엄청난 성장을 했는지 알 턱이 없을 테지만 전날의 대결에서 보인 성취만 고려하더라도 어지간한 비약을 이루지 않은 한 나를 확실히 넘어섰다는 자신감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측과는 무관하게 나는 검황자가 늪지로 오기를 바랐다. 그의 얼마만큼 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순수하게 그가 보고 싶었다. 내 심상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은 결코 괴선이나 광객에 못지않았다.
전속력을 발하며 서두른 덕분에 정오가 좀 지났을 무렵 늪지에 당도했다.
검황자는 없었다. 나는 동굴에서 추리고 다듬은 신(新)초식들을 초현하며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해가 지고 밤이 이슥하도록 그는 오지 않았다. 혹시 몰라 달이 서편으로 기울도록 남아있었지만 그가 끝내 나타나지 않아 나는 늪지를 떠났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벌써 보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친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깨어있는 진소월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하며 삼천이백 리를 비행했다. 연강 근역에 이르렀을 때 희미한 북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둥, 둥, 둥, 둥.
아스라이 들렸지만 천둥소리 같았다.
원래도 최고속도로 날고 있었지만 나는 가속을 발하며 경신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 후 연강 상공을 지나가는데 또 다시 고성(鼓聲)이 울렸다. 이번엔 나를 발견한 지상의 누군가가 북을 친 것이었다.
강궁이 쏘아낸 화살보다 빠르게 날았지만 북소리를 따라잡는 건 어림도 없었다. 북소리는 나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휑하니 명교로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