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51
제150화 정신 차려, 인마
내가 건넌 연강의 지류에서 은천은 오륙백 리 거리였다. 범인에겐 이동하는 데 족히 열흘은 걸릴 장도지만 나에겐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월강한 지 반 시진 만에 나는 명교의 터전에 이르렀다. 게으른 소의 등짝처럼 누런 빛깔 일색인 은천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비스듬히 하강하던 나는 낙하할 지점을 쉽게 포착했다. 실뱀처럼 기다랗게 늘어선 남쪽 담장 한 곳에서 내 기감을 자극하는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공중에서 뚝 떨어져 내리자 네 쌍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나는 나를 주목하는 이들을 휘둘러보았다. 팔 척의 해골노인이 단연 두드러졌다. 검왕이었다. 나에게 발한 그의 안광이 사뭇 흉흉했다. 세 번의 만남에서 한 번도 나에게 고운 눈길을 보낸 적이 없지만 이번엔 유독 살벌했다.
그의 맞은편엔 검황자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일별하고는 의미를 헤아리기 힘든 눈빛을 그 우라지게 영롱한 동공에 담았다.
검황자의 좌우엔 쌍둥이 남매가 서 있었다. 귀면나찰은 마치 그의 호위라도 된 양 검왕의 접근을 가로막듯 반보 앞으로 나와 있었다. 나는 실소했다. 이 노파도 검황자에게 홀딱 반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상대를 가려가며 나서야지. 검왕은 검을 쓸 것도 없이 무형지기만으로 그녀의 동체를 두 동강 낼 수 있는 절대강자였다.
장왕과 소면통달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 상 구덩이에 있을 공산이 컸다. 무왕도 없었다. 이상했다. 북소리를 들었을 터이니 궁금해서라도 나와 보았을 터인데. 설마 고성을 일으킨 주인공이 검왕임을 알고는 재회를 꺼린 걸까. 이유가 궁금했지만 한가롭게 무왕을 생각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검왕이 다짜고짜 무지막지한 압기를 발했기 때문이었다.
검왕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네놈이 광이를 꼬드겼을 터이지?”
압기에 저항하느라 내가 입을 열지 못하자 검황자가 대신 답변했다.
“아닙니다, 사부. 이번 출행은 어디까지나 제자의 자발적인…….”
검황자가 변호를 끝내도록 기다려주지 않고 검왕이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저놈이 네게 수작을 부리는 걸 들은 이가 있거늘.”
나는 전후사정을 짐작했다. 검왕이 말하는 자는 뱀눈 조추임에 틀림없었다. 아마도 뽕나무 숲 너머 어딘가에 숨어서 나와 검황자를 지켜본 모양이었다. 너무 멀어 대화를 엿듣지는 못했을 테지만 넉 달 후에 일어난 검황자의 갑작스러운 출타가 내 탓이라고 검왕에게 일러바치는 데는 충분했을 터였다.
뱀눈이 그날 실제로 내 제안을 들었을 리는 만무하니 좀 더 우겨도 될 것을 순진한 검황자는 검왕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렇더라도 출행을 결심한 건 다름 아닌 제자이옵니다. 그러니 저이에겐 잘못이…….”
성질머리 더러운 검왕은 이번에도 검황자가 갸륵한 언사를 완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닥치래도! 또 한 번 이놈을 비호하려들면 그 즉시 이놈 목을 쳐버리겠다.”
부아가 치밀었다. 어이, 해골. 내 목숨이 늙은이 주머니 속의 공깃돌이오? 제멋대로 가지고 놀게.
나는 분기를 제어하지 않고 눈으로 표출했다. 내가 노려보자 검왕의 누리끼리한 눈동자에 시뻘건 섬광이 번득였다. 살기였다.
나는 서슬 퍼런 검왕의 양안을 직시했다.
재작년 가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 눈에서 태산과 망망대해와 무저갱을 보았다. 내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절대자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절감하고는 절망했더랬다. 그러나 지금은 견딜 만했다. 여전히 위압적이되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을 끌어올려 검왕이 가한 백만 근의 압기를 받아내면서 나는 분기를 터뜨렸다.
“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게 뭔 행패요? 제자 관리를 못한 책임을 왜 엉뚱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거냐고. 아니, 그 전에 검총이 뇌옥이오?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게. 그리고 저 친구가 당신이 기르는 개요? 말을 안 듣는다고 삶아먹을 참이오?”
워낙에도 한겨울이긴 했지만 공기가 꽁꽁 얼어붙었다.
옥면수라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고 귀면나찰은 흉터로 덮인 낯짝에 경악을 가득 담았다. 검황자는 그저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신비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빌어먹을.
압권은 검왕이었다. 그의 면상이 바람에 쓸리는 풀처럼 나풀거렸다. 희한하게도 눈가나 뺨만이 아니라 살점이 전혀 없는 이마와 턱에도 경련이 일었다. 심지어는 꼬챙이처럼 가는 목덜미까지 파르르 떨렸다. 가히 가관이었다.
“지,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검왕이 잘못 들었으리라 자위하는 듯해 나는 확실히 못을 박아주었다.
“노망기가 있다고 귀도 먹었소? 세월에 장사 없다더니 천하의 검왕도…….”
아쉽게도 나는 비아냥거림을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뽑아든 검왕의 장검에서 분출된 청광이 나를 쪼갰기 때문이었다.
* * *
물론 나는 이등분되지는 않았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상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대비하고 있음에도 당하기엔 나는 너무 뛰어난 싸움꾼이었다. 검왕의 발검과 살초는 내가 작심하고 말을 쏟아냈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가 첫 발언을 끝까지 들어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으면 중간에 자르지도 못했을까. 측은한 바가 없지 않았으나 통쾌함이 만 배는 더 컸다.
여하튼 중요한 건 내 심사가 아니라 전황(戰況)이었다. 놀라지 마시라들. 내 도발로 촉발된 급전직하는 내 우세로 치달았다. 나는 초반 십여 초 동안 검왕을 몰아붙이며 주도권을 행사했다.
고백컨대 무력 외적인 요소의 도움을 적잖이 받았다.
나는 검왕을 알았다. 그의 검공은 한우경과 검황자에게서 지겹도록 겪은 것이었다. 물론 형(形)이 같다고 위력까지 동일한 건 아니었다. 한우경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둘의 검공은 고양이와 호랑이의 앞발질의 차이였다. 비슷한 동작이지만 압박감은 천양지차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 발톱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나를 할퀼 것인지 알고 있었다.
반면 검왕은 나를 몰랐다. 그가 아는 내 무공은 지하비처 및 검총에서 검황자와 치렀던 비무에서 본 게 전부였다. 그는 지난 넉 달 간 내가 무학 방면에서 얼마나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는지 꿈에도 모를 터였다. 내 원력이 두 배 가까이 불어났음도 알 턱이 없었다.
이는 방심을 불러일으키고 방심은 망신을 초래하는 법이었다. 내가 그의 일초를 절묘하게 흘리며 쏘아낸 빛줄기에 우견을 찍힌 검왕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역시 십왕 중 으뜸을 다툰다는 절대검호다웠다. 내 반격을 전혀 예기치 못했을 터임에도 검왕은 빛의 속도로 반응하며 치명타를 모면했다. 내 광환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심히 아쉬웠다. 애초에 겨냥했던 대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갔으면 검을 부리지 못할 부상을 입힐 수도 있었는데.
노림수가 실패했지만 검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 나는 맹공을 퍼부었다. 검왕은 내가 퍼붓는 빛줄기의 폭포에 크고 작은 외상을 허용하며 방어에 급급했다. 그러다 서서히 충격을 추스르고 전열을 정비하더니 균형을 맞추었다. 팽팽한 공방전이 십이삼 초가량 지속되었다. 그러다 형세가 역전되었다. 아무래도 무학의 심오함과 공력의 심후함에서 나는 아직 검왕에게 미치지 못했다. 총 삼십 초가 경과할 즈음부터 나는 정면충돌을 접고 회피에 주력해야 했다.
괜한 만용을 부리다 곤경을 자초한 걸 후회하느냐고?
천만에!
나는 내 결단이 낳은 결과에 대만족이었다. 검왕의 살의는 명백했다. 그런 그를 상대로 삼십 초를 버틴 건 동굴에서의 성과가 상당하다는 방증이었다. 허를 찔렀다지만 기본적인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검왕 같은 초(超)강자를 상대로 일시적이라도 우위를 점하는 건 불가능했을 터였다.
무시무시한 검초들에 나도 전신에 여러 군데의 검상을 허용하긴 했으나 전투불능에 처할 만큼의 중상은 입지 않았다. 초수를 감안하면 선전 수준을 넘어 기적이나 진배없었다. 지금부터도 이삼십 초는 더 버텨낼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나는 과욕을 부리지 않고 도피할 채비를 했다. 끝장을 볼 작심이면 검왕을 저승길의 동반자로 삼기는 어려울지라도 팔 한 짝쯤은 가져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구태여 그럴 까닭이 없었다. 늘 나를 멸시했던 검왕에게 한 방 먹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늘 이후로 그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전력을 쏟아 부어 후련하게 반격을 한 후 전권을 벗어나려던 찰나 변수가 생겼다.
우우웅.
공간이 울더니 무시무시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폭풍은 해일로 화해 검왕을 덮쳤다. 해일을 수직으로 가르며 검왕이 빠져나왔다. 일견 무사했지만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검왕은 노기를 발하며 그를 공격한 장왕에게 응징을 하려들었다. 장왕이 그의 검강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나는 즉각 끼어들었다. 검왕은 어쩔 수 없이 장왕에게 겨눈 검을 내게로 돌려야 했다. 하지만 나와 일합을 주고받자마자 교전을 포기하고 훌쩍 거리를 벌렸다. 장왕이 다시 그의 측방에 강맹한 장공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회피하며 검왕이 악을 썼다.
“이 비겁한 놈들!”
그의 발언은 별무효과였다. 이해력이 부족한 장왕에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나는 그런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위인이기 때문이었다. 무림대회처럼 규칙을 정해놓고 하는 공식적인 비무도 아닌데 일대일이면 어떻고 일대이면 또 어떤가. 이기는 게 장땡이지.
장왕과 내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계속 합공하자 검왕은 체면불구하고 도주했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그도 보신을 우선시하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았다.
“두고 보자!”
유치찬란한 언사를 남긴 검왕이 꽁무니에 불이 붙은 것처럼 정신없이 내뺐다. 나는 그를 쫓으려는 장왕을 붙잡았다. 내 손에 팔을 붙들린 장왕이 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같은 편…….”
가슴이 뭉클했다.
“맞습니다, 어르신.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내가 장왕에게 화답한 순간 허공에서 백의인영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무왕이었다.
“어찌 된 일이냐?”
이미 까마득히 멀어진 검왕에게 시선을 보내며 무왕이 물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보시다시피 튀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야 오셨는지요?”
내 목소리에서 불만을 감지했는지 무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답하기 전에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온 소면통달이 그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저이는 누구요?”
소면통달이 가리킨 이는 흑점으로 화한 검왕이 아니라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검황자였다.
나는 검황자를 무왕과 소면통달에게 소개했다.
“이 반반한 친구는 그 유명한 검황자입니다. 의형으로 떠받드는 저를 보러 왔다는군요. 뭐, 꼭 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몰래 집을 뛰쳐나왔다가 노한 사부가 잡으러 온 모양입니다. 제가 잘 말씀드려 돌려보냈습니다. 말씀이라기보다는 몸의 대화라고나 할까요.”
너스레를 떤 나는 검황자에게 걸어가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정신 차려, 인마. 그리고 어서 인사드려라. 무왕 어르신과 장왕 어르신, 그리고 명교의 태상호법이신 소면통달 어르신이시다.”
검황자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 헤 벌어진 입술에서 침만 흘렸다면 다들 정말로 천치라고 여겼을 터였다.
나는 그를 이해했다. 나라도 몇 달 만에 만난 그가 무왕과 자웅을 겨루는 광경을 목도했다면 충격으로 뇌가 마비되었을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방금 전 엄한 사부에게 혼나서 정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나중에 좀 진정이 되면 제가 데리고 어르신들을 찾아뵙겠습니다.”
중인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검황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짓궂게 물었다.
“가자. 진 소저가 보고 싶어 미치겠지?”
나는 검황자를 위해서라도 진소월이 본모습으로 돌아와 있기를 바랐다. 만약 보름 전과 같은 상태라면, 그리고 검황자가 그녀를 본다면 내 무위를 견식한 것 못지않은 충격을 받을 터였다.
목석처럼 서있는 검황자를 끌고 가려던 나는 소면통달을 비롯한 삼대호법의 면상이 일제히 우그러진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내 질문에 서로 답을 미루고 우물쭈물하던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큰일 났소, 전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