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52
제151화 나답게 구는 게 어떤 거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설마.
“큰일이라뇨?”
소면통달의 입에서 예상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독의가 사라졌소.”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은 독의가 독왕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는 의미였다. 아니, 이미 확보한 후 움직였다고 보아야 했다.
문제는 그에게 독왕의 시신을 빼앗긴 게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 두 명은 희생되었을 터였다. 어쩌면 네 명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얼이 빠져 있던 검황자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오?”
나는 검황자의 질문을 소면통달에게 옮겼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주십시오.”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소면통달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더니 설명에 앞서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오. 참으로 면목이 없소. 엿새 전 광객이 백운당에 찾아와 독의가 보이지 않는다기에 구세원에 가보았소. 괴선의 의실 밖에서 면담을 요청했는데 일언반구 대꾸도 없더이다. 괴선으로 짐작되는 이의 미약한 호흡만 들렸을 뿐이었소. 들어가 볼까 했지만 혹시라도 잘못 안 거면 독의가 난리를 칠 게 빤한지라 일단 지하도 확인해보기로 했소. 그런데 전왕의 정인이 든 의실에서는 아예 아무런 기운조차 감지되지 않았소.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기에 문을 열어보았소. 그랬더니 텅 비어있습디다. 그래서…….”
검황자가 소면통달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전왕의 정인이라면 진 소저 말씀입니까? 대체 독의는 누구고 의실은…….”
나는 검황자의 말을 막았다.
“나중에 다 얘기해주마. 일단 어르신 말씀을 마저 들어보자.”
내 눈짓을 받은 소면통달이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즉시 비상을 걸었소. 하지만 그 고약한 위인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더구려. 전왕의 청에 따라 분명 구세원 사방에 하루 열두 시진 내내 감시망을 깔아두었는데. 정말 미안하오. 면목이 없소.”
검황자가 또 끼어들었다.
“그 독의란 자가 진 소저도 데려간 겁니까?”
소면통달이 검황자를 힐끔거렸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그가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런 것 같으이.”
소면통달의 대답이 너무 무성의하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답변의 내용이 불만인지 검황자의 검미가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내게 원성을 쏟아냈다.
“대체 형은 뭘 하고 있었던 거요?”
나는 검황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소면통달에게 물었다.
“사라진 이가 또 있지 않습니까?”
우물쭈물하는 소면통달을 대신해 귀면나찰이 답변했다.
“숭인각(崇仁閣)에 머물던 전왕의 친인도 실종되었어요. 미안해요, 전왕. 호위를 붙여두었는데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그만.”
숭인각의 내 친인은 점박이 노인이었다.
구세원으로 향하며 검황자에게 저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진소월의 지병에 대해 알게 된 그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그토록 나를 거부했던 게 독인이라 나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었소?”
하아, 이런 걸 두고 아전인수라고 하는구나. 하도 가당찮은 소리인지라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그쯤에서 그쳤으면 좋았으련만 검황자는 이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런 위험천만한 자에게 진 소저를 맡기고 밖으로 돌아다닌 거요? 엿새 전이었다면 최소한 이레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 아니오? 어찌 그리 그녀에게 소홀할 수가 있소?”
나는 걸음을 멈추고 검황자를 노려보았다. 그쯤 해라, 인마. 네가 안 쑤셔도 아프니까.
검황자는 내 무언의 경고를 묵살했다.
“혹여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다 형 책임이오. 그녀가 잘못 되면 형을 용서하지 않을 거요.”
나는 검황자의 반반한 낯짝을 후려갈기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불난 집에 부채질 그만 하고 주둥이 좀 다물고 있어. 네가 씨부리지 않아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으니까.”
검황자의 동공에 화염이 일었다. 그러나 더 이상 비난을 퍼붓지 않고 입을 닫았다. 내 거친 언사에 겁을 먹고 그랬을 리는 만무했다. 그의 침묵은 깊은 분노의 표현이었다.
* * *
구세원 입구에 삼남일녀가 나와 있었다. 진청운, 광객, 이광, 그리고 강태수였다. 그들 모두 검황자를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반가운 기색을 자제하고 간단한 재회인사만 나누었다.
광객이 일다경 전 소면통달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면목이 없네, 은공. 정말 미안하이.”
나는 광객을 다독였다.
“어르신 잘못이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강태수가 울먹였다.
“소주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전 공자?”
“그녀는 괜찮을 거요, 강 호위. 조만간 데려올 터이니 아무 염려 마오.”
나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친인들을 일별하던 나는 이광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왜 그랬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광은 알아들었다. 말간 얼굴이 벌게지더니 그가 소리쳤다.
“저는 그럴 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큰 형님. 믿어주세요.”
심상치 않는 분위기를 눈치 챈 친인들이 일제히 소년에게 추궁의 눈길을 보냈다.
이광의 횡설수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독의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내 친인들에게 배정된 연무장 근처의 보원전 뒤뜰 측간에 감춰진 첩지를 수시로 독의에게 전해주었고 그 역도 수행한 모양이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아무도 그의 동태를 수상쩍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에 노기를 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소 어르신에겐 무슨 짓을 했냐?”
“…….”
이광은 내 엄한 눈빛을 더 견디지 못하고 토설했다.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제 말은, 단지 소 할아버지가 마시는 차에 미분(微粉)을 조금 뿌렸을 뿐이에요. 독의가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을 거라 했어요. 그냥 몇 마디 물어보고 싶을 뿐이라고. 소 할아버지와는 친분이 없어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것 같아 약을 쓰는 거라고 했어요.”
속이 쓰렸다. 이광은 아버지와 형제결의까지 했던 홍 문사와 같은 짓을 한 것이었다. 신의를 이용한 배신.
나는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왜 그랬냐?”
“…….”
“왜 독의의 수족이 되었느냐고 묻고 있잖으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광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도전적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발악하듯 외쳤다.
“저도 큰 형님처럼 강해지고 싶었어요. 큰 형님은 물론이고 고모도 할아버지들도 저를 우습게 여겼어요.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죽는 날까지 큰 형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며. 하지만 독의는 달랐어요. 그는 저도 큰 형님 못지않은 무인이 될 수 있다고 했어요. 큰 형님이 강한 건 비력(秘力) 때문이라며, 제게도 그 힘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 힘을 얻으면 저도 초인이 될 거라고.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가 준 신단을 복용하고 얼마 후 호학자 할아버지의 유은장(幽隱掌)을 발출할 수 있는 공력이 생겼어요. 적어도 십 년은 지나야 구현할 수 있다는 절기를 신단 복용 후 단 며칠 만에 해냈다고요.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독의가 완전한 비력을 갖출 때까진 절대로 남들한테 알려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비력을 줄 수 없다고 해서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거예요. 저는, 저는 강해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강태수가 별안간 이광을 끌어안더니 울부짖었다.
“제발 광이를 살려주세요, 전 공자.”
차라리 구명을 간청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이리 되자 이광의 생살을 두고 고민해야 했다.
* * *
고통스러운 결정을 보류한 나는 친인들을 내버려두고 구세원으로 들어섰다. 검황자는 나를 따라오지 않고 그들과 함께 밖에 남았다.
약내가 진동하는 복도를 따라 걸어간 나는 괴선의 의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몇 사람의 기척이 났다. 문을 여니 석대에 누운 괴선과 의원으로 보이는 노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의원들은 삐쩍 마른 괴선의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소면통달에게서 괴선이 목숨은 건졌으나 전신불수가 되었음을 들었기에 나는 의원들이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그의 굳은 몸을 풀어주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입실하자 의원들이 길게 읍을 했다.
“이 어른과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내 요청을 명령으로 받아들였는지 의원들은 허리를 굽힌 상태로 의실을 나갔다.
괴선이 눈알을 굴려 나를 보았다.
“공사다망한 놈이 여긴 어인 일이냐?”
나는 묵묵히 괴선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하늘이 무너지기라고 했냐? 죽상 펴라, 이놈아. 가뜩이나 험상궂은 면상이 아예 흉신악살이 되버리잖느냐.”
“……미안하오, 노인장.”
“그건 또 무슨 미꾸라지 옆구리 터지는 개소리냐? 네놈이 왜 미안해?”
“…….”
“죽상 펴래도. 낯 뜨거워 차마 네놈에게 감사인사는 못했으나 원망하는 마음은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 더 없이 만족하느니라. 정말이다. 그 지랄 같은 고통에서 해방된 것만 해도 어디냐? 더욱이 가장 중요한 혀도 멀쩡하고. 그러니 어울리지도 않는 잡소릴랑 집어치우고 너답게 굴어라, 이놈아.”
“나답게 구는 게 어떤 거요?”
“몰라서 묻는 게냐? 뻔뻔하고 능청스럽고 곧 뒈져도 큰소리치는 게 네놈다운 게지. 고작 괴물인 주제에 제가 제일인 줄 알고…….”
“아, 됐소. 제길, 괜히 왔군. 이렇게 펄펄한 줄 알았다면 내 일이나 보는 건데.”
“말본새하고는, 이놈이. 오냐, 어서 꺼져라. 모처럼 인생과 대우주를 관조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방해하지 말고. 기분이 얼마나 끝내주는 지 아느냐? 몸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됐다. 쇠귀에 경 읽기지.”
나는 괴선의 손을 잡았다. 시체처럼 차가웠다.
“다음에 올 땐 그 늙은이를 끌고 오겠소. 목을 갖고 오거나.”
“아서라, 이놈아. 감정을 앞세우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야. 그 아이를 구하는 데나 전력하려무나. 할 수 있을 테지?”
“물론이오.”
의실을 나온 나는 밖에 대기하고 있던 의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어른을 잘 부탁드립니다.”
의원들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 * *
구세원을 나온 나는 바로 출발했다.
보름 전 마련으로 떠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친인들에게 행선지를 밝혔다. 절곡이었다.
독왕의 시신은 이미 독의의 손에 넘어갔을 터였다. 그는 명교에서 사라지기 전에 절곡에 사람을 보내 조치를 취해두었을 터였다. 그러므로 내가 절곡에 가는 까닭은 혹시나 싶어서가 아니었다. 무영의 안위 확인이 목적이었다.
독의는 괴선을 내팽개쳤지만 그의 명줄은 보존했다. 내 친인들 누구에게도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진소월과 점박이 노인을 데려갔지만 그들은 만약의 경우 인질로 삼을 의도였을 공산이 컸다. 돌아올 다리를 완전히 불 지르고 떠난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무영에겐 전날 헤어지며 만에 하나 불가항력의 적이 쳐들어올 경우 저항하지 말고 독왕의 시신을 내주라고 일러두었다. 점박이 노인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동일한 지침을 전달했다. 무영이 내 명을 이행했다면 살아있을 가능성이 상당했다. 독의, 혹은 그의 지시를 받은 방수들이 구태여 저항하지 않는 무영을 해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바람 섞인 추측에 불과했다. 무영의 생존 여부는 절곡에 가보아야 알 터였다. 나는 독의나 그의 방수들이 그를 건드리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를 하잘것없는 존재로 착각해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쓰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참이었다.